내가 사는 이유는?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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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1-23 22:33
*** 내가 사는 이유는? / 고후 5:1-10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5:1-10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시간의 본문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논하는 철학적인 냄새가 풍기는 듯 하지요? 제목부터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질문도 철학적으로 해 볼까요!
여러분은 왜 삽니까?
도대체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금 당혹스럽지요?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적인 원리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지금 이 나라의 교회가 갈 데까지 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자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살아 숨쉬는 생명이 충만한 유기체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교회는 예수님의 경고처럼, 교리만 내세우는 율법주의와 화려하게 포장되었지만 실속이 없는 기복주의가 가득한 형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길 따위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알고, 교리를 잘 아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만족하게 여깁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든지 능력 받아서 육신의 생활도 형통하고 영적인 삶도 평안을 누리며, 교회의 일이나 신앙을 통하여 자기만족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관심이라는 말입니다. 본문9-10절을 봅시다.
“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9절의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 말씀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이 말씀을 줄이면 ‘헌신의 삶’입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왜 ‘헌신의 삶’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10절 말씀처럼, 우리의 인생을 끝내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판정 승’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시험치는 일’에 대하여 이골이 나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 입학하는 일에서부터 중간고사, 기말고사, 졸업시험, 취직시험, 승진시험, 자동차 면허시험에 각종 자격시험까지, ‘인생은 곧 시험이다.’고 할 정도로 많은 시험을 치릅니다. 그런데 시험은 언제 치러도 항상 긴장이 됩니다. 시험지를 받아들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그것도 제한된 시간 안에 주어진 문제를 끝내야 합니다. 마감 종이 울리고 나면 잘했든지 못했든지 미련 없이 답안지를 제출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평생도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치르는 시험은 재시험을 할 수도 있으며, 좀더 준비해서 다른 기회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평생은 재연될 수가 없으며,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결말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창조주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10년을 살았던, 90년을 살았던,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산서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시며, 본문10절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사람이 육신으로 세상에 살 때에 ‘헌신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이 헌신의 삶의 결과를 따라서 영원한 삶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영원한 집을 위한 것입니다.
본문1-5절을 봅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내용이 좀 어렵지요? 단어 풀이부터 해봅시다. “장막 집”이란, 일시적인 거주지인 ‘천막’을 말하는데,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무너지면”이라는 말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을 의미합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란 ‘하나님 나라에서 살 신령한 몸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를 면하기 위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 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해두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준비 된 자와 준비되지 못한 자의 ‘판정장면’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생명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말은 생명의 부활을 소망하는 ‘부활신앙의 삶’을 말합니다. 즉 내가 사는 이유는? 생명의 부활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4절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의 삶에 허덕이며 고생하며 한숨쉬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것은 죽을 육신이 생명의 부활을 얻도록 함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세상에서 즐길 것을 즐기지 않고 절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오직 ‘생명의 부활’을 얻기 위함입니다. 만일 ‘생명의 부활’이 없고 이 땅에서의 육체의 삶뿐이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5: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이어서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부활의 확증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보증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5절). 이 확실한 진리가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삶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위하여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6-7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한다.”는 말은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를 의미합니다. 비록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연히 떨어져 있습니다. 즉 우리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으로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부활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때에는 실제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고백합니다. 즉 지금은 육신의 삶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거울을 통하여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희미하게 보이지만, 생명의 부활 이후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되는 실제적인 동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20:29절에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시면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도 못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눈에 확실하게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뿐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한 순간에 없어진다는 것을 지금 주변의 환경과 사건을 통하여 너무나 명백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일서 2: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을 위하여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주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입니다. 이 삶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곧 헌신의 삶입니다. 헌신의 삶이란 나 자신의 소유물이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입구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보고계실 때에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헌금을 가장 많이 드린 헌금으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직접 들어 보십시오. 마가복음 12:44절입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온전한 헌신’이었습니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은 여인도 자신의 전부를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우리의 작은 일부를 드리고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으려고 기대합니다. 내 작은 만족을 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뜨거운 부흥을 원하면서도 나를 드리기에는 인색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적인 헌신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헌신은 예배의 필수요소입니다. 그리고 헌신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기도와 수고의 땀입니다. 예수님처럼 땀방울에 피가 베일 정도의 간절한 기도와 땀이 흐르는 수고가 동반되는 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 우리가 땀 흘려 번 돈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것도 바로 이 헌신의 한 표현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뜨거운 부흥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60, 70년대의 한국교회처럼 말입니다. 성경의 초대교회의 역사가 지금 중국 가정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부흥의 중심에 서 있는 지도자는 헤븐리맨(Heavenly 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윈(雲) 형제(본명, 리우전잉/劉陣英)가 있습니다.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브라더 윈'(Brother Yun)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윈 형제는 세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중국에 일어나고 있는 이적과 부흥의 불길이 무슨 특별한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기에 대하여 윈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처음 독일에 가서 유럽 여러 나라의 교회를 순회할 때, 그곳의 신자들도 동일한 질문을 하더군요. 중국 교회에는 무언가 다른 새로운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궁금해 했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치유사역이나 기적의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웅장한 건물에 노인 몇 분만 앉아 계시는 서구의 교회에서 저는 정말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넣는 그들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전부를 드리지 않았지요. 중국 가정교회의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 전부를 드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위대한 사랑의 놀라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헌신은 ‘내가 하나님의 영역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지역이며,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자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로마서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역이 되게 합시다. 내가 하나님의 영역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나를 다스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나의 진정한 헌신이 없이는 나 자신의 행복도, 가정의 행복도, 교회의 행복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영역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 지역에 나타나게 하실 것입니다. 땔감이 없이는 불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땔감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헌신이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역사를 일으키는 부흥의 땔감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이를 통하여 주님의 세계를 만들어 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나의 삶을 당당하게 준비합시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5:1-10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시간의 본문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논하는 철학적인 냄새가 풍기는 듯 하지요? 제목부터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질문도 철학적으로 해 볼까요!
여러분은 왜 삽니까?
도대체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금 당혹스럽지요?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적인 원리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지금 이 나라의 교회가 갈 데까지 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자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살아 숨쉬는 생명이 충만한 유기체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교회는 예수님의 경고처럼, 교리만 내세우는 율법주의와 화려하게 포장되었지만 실속이 없는 기복주의가 가득한 형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길 따위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알고, 교리를 잘 아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만족하게 여깁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든지 능력 받아서 육신의 생활도 형통하고 영적인 삶도 평안을 누리며, 교회의 일이나 신앙을 통하여 자기만족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관심이라는 말입니다. 본문9-10절을 봅시다.
“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9절의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 말씀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이 말씀을 줄이면 ‘헌신의 삶’입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왜 ‘헌신의 삶’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10절 말씀처럼, 우리의 인생을 끝내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판정 승’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시험치는 일’에 대하여 이골이 나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 입학하는 일에서부터 중간고사, 기말고사, 졸업시험, 취직시험, 승진시험, 자동차 면허시험에 각종 자격시험까지, ‘인생은 곧 시험이다.’고 할 정도로 많은 시험을 치릅니다. 그런데 시험은 언제 치러도 항상 긴장이 됩니다. 시험지를 받아들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그것도 제한된 시간 안에 주어진 문제를 끝내야 합니다. 마감 종이 울리고 나면 잘했든지 못했든지 미련 없이 답안지를 제출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평생도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치르는 시험은 재시험을 할 수도 있으며, 좀더 준비해서 다른 기회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평생은 재연될 수가 없으며,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결말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창조주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10년을 살았던, 90년을 살았던,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산서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시며, 본문10절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사람이 육신으로 세상에 살 때에 ‘헌신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이 헌신의 삶의 결과를 따라서 영원한 삶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영원한 집을 위한 것입니다.
본문1-5절을 봅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내용이 좀 어렵지요? 단어 풀이부터 해봅시다. “장막 집”이란, 일시적인 거주지인 ‘천막’을 말하는데,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무너지면”이라는 말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을 의미합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란 ‘하나님 나라에서 살 신령한 몸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를 면하기 위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 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해두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준비 된 자와 준비되지 못한 자의 ‘판정장면’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생명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말은 생명의 부활을 소망하는 ‘부활신앙의 삶’을 말합니다. 즉 내가 사는 이유는? 생명의 부활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4절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의 삶에 허덕이며 고생하며 한숨쉬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것은 죽을 육신이 생명의 부활을 얻도록 함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세상에서 즐길 것을 즐기지 않고 절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오직 ‘생명의 부활’을 얻기 위함입니다. 만일 ‘생명의 부활’이 없고 이 땅에서의 육체의 삶뿐이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5: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이어서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부활의 확증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보증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5절). 이 확실한 진리가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삶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위하여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6-7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한다.”는 말은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를 의미합니다. 비록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연히 떨어져 있습니다. 즉 우리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으로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부활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때에는 실제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고백합니다. 즉 지금은 육신의 삶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거울을 통하여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희미하게 보이지만, 생명의 부활 이후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되는 실제적인 동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20:29절에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시면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도 못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눈에 확실하게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뿐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한 순간에 없어진다는 것을 지금 주변의 환경과 사건을 통하여 너무나 명백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일서 2: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을 위하여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주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입니다. 이 삶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곧 헌신의 삶입니다. 헌신의 삶이란 나 자신의 소유물이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입구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보고계실 때에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헌금을 가장 많이 드린 헌금으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직접 들어 보십시오. 마가복음 12:44절입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온전한 헌신’이었습니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은 여인도 자신의 전부를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우리의 작은 일부를 드리고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으려고 기대합니다. 내 작은 만족을 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뜨거운 부흥을 원하면서도 나를 드리기에는 인색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적인 헌신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헌신은 예배의 필수요소입니다. 그리고 헌신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기도와 수고의 땀입니다. 예수님처럼 땀방울에 피가 베일 정도의 간절한 기도와 땀이 흐르는 수고가 동반되는 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 우리가 땀 흘려 번 돈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것도 바로 이 헌신의 한 표현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뜨거운 부흥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60, 70년대의 한국교회처럼 말입니다. 성경의 초대교회의 역사가 지금 중국 가정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부흥의 중심에 서 있는 지도자는 헤븐리맨(Heavenly 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윈(雲) 형제(본명, 리우전잉/劉陣英)가 있습니다.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브라더 윈'(Brother Yun)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윈 형제는 세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중국에 일어나고 있는 이적과 부흥의 불길이 무슨 특별한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기에 대하여 윈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처음 독일에 가서 유럽 여러 나라의 교회를 순회할 때, 그곳의 신자들도 동일한 질문을 하더군요. 중국 교회에는 무언가 다른 새로운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궁금해 했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치유사역이나 기적의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웅장한 건물에 노인 몇 분만 앉아 계시는 서구의 교회에서 저는 정말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넣는 그들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전부를 드리지 않았지요. 중국 가정교회의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 전부를 드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위대한 사랑의 놀라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헌신은 ‘내가 하나님의 영역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지역이며,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자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로마서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역이 되게 합시다. 내가 하나님의 영역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나를 다스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나의 진정한 헌신이 없이는 나 자신의 행복도, 가정의 행복도, 교회의 행복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영역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 지역에 나타나게 하실 것입니다. 땔감이 없이는 불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땔감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헌신이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역사를 일으키는 부흥의 땔감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이를 통하여 주님의 세계를 만들어 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나의 삶을 당당하게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