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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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1-17 21:20
***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 사 41:8-16
** 본문말씀
이사야 41:8-16 /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1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15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16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 들어가는 말
연안부두 골목에 젓갈을 파는 두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한 아줌마는 장사가 잘 되었지만, 다른 아줌마는 장사가 잘 안 되었습니다. 장사가 잘 안되는 아줌마가 어느 날 외출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한껏 멋을 냈습니다. 그날은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학부형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여러 학부형들이 모여 있는 한쪽 가에 앉아있는데, 옆의 아줌마가 인사를 걸어왔습니다.
“경수엄마는 무얼 하세요?”
“음 …… 해요!”
“뭐 하신다구요?”
“그냥…음…해요!” “…”
자신의 직업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음 … 해요’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소개해야만 했습니다. 장사도 잘 안되고, 쓸 돈도 많지 않고 부끄럽기도 해서 다른 엄마들에 비해 자신이 처량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한번도 자신을 ‘젓갈장사 아줌마’라고 툭 터놓고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잘 되는 아줌마는 달랐습니다. 이 분도 딸의 학교 학부형 모임에 갔는데, 학부형들이 서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주머니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젓갈장사 아줌마 정숙이 엄마입니다. 학생엄마들 모두 김치도 담그고 젓갈도 드시니, 젓갈을 사실 때에는 언제나 저를 찾아 주세요. 연안부두 골목 47호 울산 댁입니다. 오시기만 하면 두 배나 기쁘게 해드리고, 젓갈도 두 배나 드릴게요.… 호호호…”
두 사람의 삶이 너무나 대조가 되지요? 한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지만, 다른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부심이 없으면 자신감이 없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이 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읽기만 해도 용기가 생기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10절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어서 14절을 봅시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고 하십니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고 적극적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2:3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팡세’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과 물리학자이며 종교사상가인 ‘파스칼’은 사람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은 괴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하고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의 행복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8:32절을 봅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로 삼으실 때에는 모든 것을 주시기로 이미 작정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로마서8:17절 상반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두가 이런 담대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처럼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합니다. 가지는 것과 누리는 것은 다릅니다. 자린고비처럼 수십억 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몇 만원을 가졌지만 효과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를 누리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죄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넘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대단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하나님을 배반한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있는 남 유다의 기울어져 가는 장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람의 힘과 우상을 의지하던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동족들의 멸망을 지켜보면서도 자신들도 서서히 하나님을 멀리하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기울어져 가는 유다 왕국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유대 백성의 경성과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지금 돌이키면 번역과 복을 누리겠지만, 만약 회개하지 아니하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반복하십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에 환난이 닥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지신 생각은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며, 도우시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29: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이 문제가 됩니다. 이사야 59:1-2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려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죄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 곁에 늘 함께 있으며, 죄를 지으려는 욕구도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 담대한 삶과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4:7절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면 적극적으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보다 더 나은 쪽을 택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2:20-21절을 봅시다.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죄는 멀리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마음에 죄악 된 마음만 품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돕지도 않으십니다. 시편 66:18절에서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지만 죄는 어두움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결코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능력 있는 삶,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죄를 멀리하십시오.
2.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심지가 견고해야 합니다.
이사야 26:3절을 봅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심지”란 ‘…틀’ 혹은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견고한”이라는 말은 ‘버티다’ ‘의지하다’ ‘유지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사람을 평강 중에서도 평강(perfect in peace)으로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가 하면, 심지가 견고하지 못하여 작은 일에도 흔들거리는 사람에 대하여는 야고보서 1:6-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란 ‘흔들리는 마음으로 변덕이 심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변덕이 심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자주 바뀐다는 뜻입니다. 환경이 좋고, 기분이 좋고, 일이 잘 될 때에는 감사하다가, 환경이 어두워지고, 일이 잘 되기 않을 때에는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신앙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걸고 나아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이 신앙의 길에서 마음이 흔들거리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얻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니엘은 왕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신에게 절하거나 기도하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왕명을 알고서도 마음을 굽히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국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역시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명령을 알고도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다니엘3:18절에서 그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결국 이들도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에스더도 역시 생명의 위기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굳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인 하만뿐만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게 하셨고, 왕의 큰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셉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울도,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흔들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 자신의 편한대로, 자신의 요령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잘 되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의 ‘유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 왔던 젊은 부자 관원도 그러했습니다. 부자 관원은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으며, 관원은 자신 있게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10:21-22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세상의 재물이나 자식이나 무엇이라도 그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신뢰하고,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한 지렁이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상하고 깨어지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땅 끝에서부터 붙들고 땅 모퉁이에서부터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들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 몸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력과 평안함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담대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죄를 멀리하며, 어떤 환경과 상황에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리하여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행복한 삶을 이루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본문말씀
이사야 41:8-16 /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1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15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16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 들어가는 말
연안부두 골목에 젓갈을 파는 두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한 아줌마는 장사가 잘 되었지만, 다른 아줌마는 장사가 잘 안 되었습니다. 장사가 잘 안되는 아줌마가 어느 날 외출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한껏 멋을 냈습니다. 그날은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학부형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여러 학부형들이 모여 있는 한쪽 가에 앉아있는데, 옆의 아줌마가 인사를 걸어왔습니다.
“경수엄마는 무얼 하세요?”
“음 …… 해요!”
“뭐 하신다구요?”
“그냥…음…해요!” “…”
자신의 직업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음 … 해요’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소개해야만 했습니다. 장사도 잘 안되고, 쓸 돈도 많지 않고 부끄럽기도 해서 다른 엄마들에 비해 자신이 처량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한번도 자신을 ‘젓갈장사 아줌마’라고 툭 터놓고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잘 되는 아줌마는 달랐습니다. 이 분도 딸의 학교 학부형 모임에 갔는데, 학부형들이 서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주머니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젓갈장사 아줌마 정숙이 엄마입니다. 학생엄마들 모두 김치도 담그고 젓갈도 드시니, 젓갈을 사실 때에는 언제나 저를 찾아 주세요. 연안부두 골목 47호 울산 댁입니다. 오시기만 하면 두 배나 기쁘게 해드리고, 젓갈도 두 배나 드릴게요.… 호호호…”
두 사람의 삶이 너무나 대조가 되지요? 한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지만, 다른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부심이 없으면 자신감이 없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이 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읽기만 해도 용기가 생기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10절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어서 14절을 봅시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고 하십니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고 적극적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2:3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팡세’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과 물리학자이며 종교사상가인 ‘파스칼’은 사람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은 괴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하고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의 행복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8:32절을 봅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로 삼으실 때에는 모든 것을 주시기로 이미 작정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로마서8:17절 상반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두가 이런 담대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처럼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합니다. 가지는 것과 누리는 것은 다릅니다. 자린고비처럼 수십억 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몇 만원을 가졌지만 효과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를 누리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죄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넘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대단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하나님을 배반한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있는 남 유다의 기울어져 가는 장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람의 힘과 우상을 의지하던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동족들의 멸망을 지켜보면서도 자신들도 서서히 하나님을 멀리하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기울어져 가는 유다 왕국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유대 백성의 경성과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지금 돌이키면 번역과 복을 누리겠지만, 만약 회개하지 아니하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반복하십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에 환난이 닥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지신 생각은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며, 도우시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29: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이 문제가 됩니다. 이사야 59:1-2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려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죄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 곁에 늘 함께 있으며, 죄를 지으려는 욕구도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 담대한 삶과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4:7절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면 적극적으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보다 더 나은 쪽을 택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2:20-21절을 봅시다.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죄는 멀리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마음에 죄악 된 마음만 품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돕지도 않으십니다. 시편 66:18절에서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지만 죄는 어두움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결코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능력 있는 삶,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죄를 멀리하십시오.
2.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심지가 견고해야 합니다.
이사야 26:3절을 봅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심지”란 ‘…틀’ 혹은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견고한”이라는 말은 ‘버티다’ ‘의지하다’ ‘유지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사람을 평강 중에서도 평강(perfect in peace)으로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가 하면, 심지가 견고하지 못하여 작은 일에도 흔들거리는 사람에 대하여는 야고보서 1:6-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란 ‘흔들리는 마음으로 변덕이 심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변덕이 심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자주 바뀐다는 뜻입니다. 환경이 좋고, 기분이 좋고, 일이 잘 될 때에는 감사하다가, 환경이 어두워지고, 일이 잘 되기 않을 때에는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신앙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걸고 나아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이 신앙의 길에서 마음이 흔들거리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얻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니엘은 왕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신에게 절하거나 기도하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왕명을 알고서도 마음을 굽히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국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역시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명령을 알고도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다니엘3:18절에서 그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결국 이들도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에스더도 역시 생명의 위기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굳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인 하만뿐만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게 하셨고, 왕의 큰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셉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울도,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흔들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 자신의 편한대로, 자신의 요령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잘 되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의 ‘유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 왔던 젊은 부자 관원도 그러했습니다. 부자 관원은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으며, 관원은 자신 있게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10:21-22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세상의 재물이나 자식이나 무엇이라도 그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신뢰하고,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한 지렁이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상하고 깨어지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땅 끝에서부터 붙들고 땅 모퉁이에서부터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들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 몸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력과 평안함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담대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죄를 멀리하며, 어떤 환경과 상황에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리하여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행복한 삶을 이루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