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생애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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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7-05 11:03
*** 야베스의 생애 / 역대상 4:9-10
*** 들어가는 말
역대상 4:9-10, “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어느 날, 작은 개 한 마리가 커다란 사냥개 옆에 나란히 섰다. 사냥개가 으르렁거리면서 작은 개에게 물었다. \"너도 개축에 드냐?\" 작은 개는 감히 사냥개에게 정면으로 대어들 생각은 못하고, 아주 공손하게 대답했다. \"물론 저는 당신만큼 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저를 보고 고양이라고 하지는 않는답니다.\"
어느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었다. 읽는 중에 7장 9절의,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예수님, 내가 입을 흰옷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여러분, 작은 개는 개가 아닙니까? 그리고 천국에 어린아이가 입을 작은 흰옷도 있겠습니까? 여러분, 작은 개도 개이며, 마찬가지로 꼬마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는 남녀노소, 인종,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시편16:3절에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고 하셨으며, 50: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이 바람 부는 대로 떠도는 평범하고 보통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는 아주 특별한 삶을 살도록 계획되었으며, 유일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즉 창세 이래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겠지만, 그 가운데서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날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두고 유독 자신에게만 다짐하듯 물으시고, 장래의 고난을 말씀하시는 것이 불안했든지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기대어 있는‘요한’을 지목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시며 “너는 나를 따르라”고하셨습니다. 이는 부름 받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사명은 각 성도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삶을 비천하게 여기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타인의 삶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족보에 이름만 등장하고, 어떤 사람은 그의 삶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보통의 삶을 산 사람과 특별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역대상 1장-9장까지는 6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거대한 선민의 족보입니다. 그 중에서 아주 당돌함을 느끼게 하는 한 사람이 바로 ‘야베스’입니다. 그의 생애가 직접적으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짧은 구절을 통하여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유다 지파 중에서 드고아 지역에 정착한 고스의 아들입니다. 본문에서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존귀한 자'라는 것은 재산이 많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가 있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해서 존경받는 사회 지도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야베스는 처음부터 존귀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야베스는 태어나는 과정부터 어려움과 슬픔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의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라는 말씀으로 보아 아마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는데,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이 ‘고통을 받는 자’입니다. 한평생 그는 ‘야베스’로 불리며 ‘고통’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마 야베스의 어머니는 난산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불행스러운 환경을 가진 야베스가 어떻게 존귀한 자가 되었겠습니까? 짧은 본문에는 특별한 삶을 살도록 하는 세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야베스는 위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베스는,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생각해 주시기를 원하는 열망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복에 복을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얼마나 당돌한 기도입니까?! 그는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허송세월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도 없고, 계획도 없고, 열망도 없는 사람들이 육신의 삶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 없는 짐승들처럼 그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거룩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소원이 있어야 하고 꿈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5:28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위하여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으며, 그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빌립보서 2:13절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성도들조차 평범한 삶으로 주저앉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두려움과 겸손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 일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저는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2) 나태함과 만족함을 혼동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목표나 계획이나 열망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목표가 뚜렷했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열망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와 열망하는 소원이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믿음 안에서 만족하는 삶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인한 평안함입니다. 그러나 나태함이란, 계획이나 열망이 없는 게으름입니다.
두 번째, 야베스는 성장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베스에 대하여 다른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과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믿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은 야베스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재능도, 능력도, 교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평범한 사람을 특별한 인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그 곳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하여 위대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특히,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스럽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9절에서 보듯이 야베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여기 어머니들도 아이들이 태어날 때 아이가 정상인인지 아니면 장애아인지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야베스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어떤 불리한 조건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베스는 그 불리한 조건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열망으로 승화시키는 성숙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불리한 조건 때문에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지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다른 사람들보다 불리한 조건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불리한 조건이란 없습니다. 오직,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9:23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야베스는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야베스의 생애가 단 한 절 기도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표현력이 풍부한 이상적인 기도도 아니었고, 자신의 뜻을 애매하게 숨기는 형식적인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간단하고도 사실적이며, 구체적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나의 토지를 넓혀주시기를 원합니다.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근심 없는 생활을 원합니다.’
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숨김이 없고 구체적이고 간단한 기도입니까? 야베스의 기도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기도는 결코 이론이 아니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한 형식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책망하시면서, ‘그들의 기도는 형식적으로 길지만 의미 없는 중얼거림(중언부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기도의 모범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의미가 깊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의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식적이 아닌, 진정한 기도의 생활은 분명히 삶을 변화시킵니다. 야고보서4:2절에서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 하셨고, 에베소서3:20절에서는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33: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무엇을 해 주시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어떤 기도에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진정한 기도일 때 말입니다.
여러분, 야베스는 남보다 어려운 환경과 여건이었지만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어 허락하심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뜨거운 열망과 믿음과 기도로서, 하나님의 천국 창고를 활짝 여는 능력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역대상 4:9-10, “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어느 날, 작은 개 한 마리가 커다란 사냥개 옆에 나란히 섰다. 사냥개가 으르렁거리면서 작은 개에게 물었다. \"너도 개축에 드냐?\" 작은 개는 감히 사냥개에게 정면으로 대어들 생각은 못하고, 아주 공손하게 대답했다. \"물론 저는 당신만큼 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저를 보고 고양이라고 하지는 않는답니다.\"
어느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었다. 읽는 중에 7장 9절의,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예수님, 내가 입을 흰옷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여러분, 작은 개는 개가 아닙니까? 그리고 천국에 어린아이가 입을 작은 흰옷도 있겠습니까? 여러분, 작은 개도 개이며, 마찬가지로 꼬마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는 남녀노소, 인종,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시편16:3절에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고 하셨으며, 50: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이 바람 부는 대로 떠도는 평범하고 보통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는 아주 특별한 삶을 살도록 계획되었으며, 유일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즉 창세 이래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겠지만, 그 가운데서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날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두고 유독 자신에게만 다짐하듯 물으시고, 장래의 고난을 말씀하시는 것이 불안했든지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기대어 있는‘요한’을 지목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시며 “너는 나를 따르라”고하셨습니다. 이는 부름 받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사명은 각 성도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삶을 비천하게 여기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타인의 삶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족보에 이름만 등장하고, 어떤 사람은 그의 삶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보통의 삶을 산 사람과 특별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역대상 1장-9장까지는 6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거대한 선민의 족보입니다. 그 중에서 아주 당돌함을 느끼게 하는 한 사람이 바로 ‘야베스’입니다. 그의 생애가 직접적으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짧은 구절을 통하여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유다 지파 중에서 드고아 지역에 정착한 고스의 아들입니다. 본문에서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존귀한 자'라는 것은 재산이 많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가 있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해서 존경받는 사회 지도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야베스는 처음부터 존귀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야베스는 태어나는 과정부터 어려움과 슬픔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의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라는 말씀으로 보아 아마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는데,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이 ‘고통을 받는 자’입니다. 한평생 그는 ‘야베스’로 불리며 ‘고통’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마 야베스의 어머니는 난산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불행스러운 환경을 가진 야베스가 어떻게 존귀한 자가 되었겠습니까? 짧은 본문에는 특별한 삶을 살도록 하는 세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야베스는 위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베스는,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생각해 주시기를 원하는 열망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복에 복을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얼마나 당돌한 기도입니까?! 그는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허송세월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도 없고, 계획도 없고, 열망도 없는 사람들이 육신의 삶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 없는 짐승들처럼 그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거룩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소원이 있어야 하고 꿈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5:28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위하여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으며, 그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빌립보서 2:13절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성도들조차 평범한 삶으로 주저앉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두려움과 겸손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 일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저는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2) 나태함과 만족함을 혼동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목표나 계획이나 열망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목표가 뚜렷했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열망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와 열망하는 소원이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믿음 안에서 만족하는 삶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인한 평안함입니다. 그러나 나태함이란, 계획이나 열망이 없는 게으름입니다.
두 번째, 야베스는 성장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베스에 대하여 다른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과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믿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은 야베스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재능도, 능력도, 교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평범한 사람을 특별한 인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그 곳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하여 위대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특히,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스럽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9절에서 보듯이 야베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여기 어머니들도 아이들이 태어날 때 아이가 정상인인지 아니면 장애아인지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야베스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어떤 불리한 조건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베스는 그 불리한 조건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열망으로 승화시키는 성숙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불리한 조건 때문에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지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다른 사람들보다 불리한 조건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불리한 조건이란 없습니다. 오직,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9:23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야베스는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야베스의 생애가 단 한 절 기도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표현력이 풍부한 이상적인 기도도 아니었고, 자신의 뜻을 애매하게 숨기는 형식적인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간단하고도 사실적이며, 구체적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나의 토지를 넓혀주시기를 원합니다.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근심 없는 생활을 원합니다.’
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숨김이 없고 구체적이고 간단한 기도입니까? 야베스의 기도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기도는 결코 이론이 아니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한 형식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책망하시면서, ‘그들의 기도는 형식적으로 길지만 의미 없는 중얼거림(중언부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기도의 모범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의미가 깊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의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식적이 아닌, 진정한 기도의 생활은 분명히 삶을 변화시킵니다. 야고보서4:2절에서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 하셨고, 에베소서3:20절에서는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33: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무엇을 해 주시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어떤 기도에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진정한 기도일 때 말입니다.
여러분, 야베스는 남보다 어려운 환경과 여건이었지만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어 허락하심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뜨거운 열망과 믿음과 기도로서, 하나님의 천국 창고를 활짝 여는 능력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