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세상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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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6-24 14:17
*** 공존하는 세상 / 마태복음 13:24-30
마태복음 13:24-30(현대어성경) “24 예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농부가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과 같다. 25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 사이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자랄 때에 가라지도 같이 자랐다. 27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이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였는데 가라지가 잔뜩 올라왔습니다.' 28 `원수가 와서 그랬구나.' 주인이 소리쳤다. `저희가 가라지를 뽑을까요?' 종들이 묻자 29 주인이 대답하였다.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 보면 밀까지 뽑게 되니 30 둘 다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내가 추수꾼들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 불에 태우고 밀은 곳간에 거두어들이도록 하겠다.' ”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논에는 벼의 어린 싹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농부들은 모내기를 하면서 이미 추수 때를 생각합니다. 잘 자라서 많은 수확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겠지요. 농부들은 추수 때의 많은 수확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틈틈이 물의 양을 조절하며, 비료를 뿌리고, 해충방제를 위하여 약을 뿌리고, 김을 맬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바로 이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사람도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곡식처럼 수확되리라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다음의 37-43절까지가 이 비유의 해설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16-17절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유명한 전도자 ‘썬다 싱’을 아시지요? 인도의 이름난 성자인 ‘선다 싱’은 원래 힌두교의 한 분파인 ‘시이크 교도’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난폭하여 청소년 시절에는 선생님들 앞에서 신약 성경을 한 장씩 찢어서 불태울 정도였습니다. 그의 변화는 14세 때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일어났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면서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부모는 그를 쫓아내었고, 이웃 사람들은 그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썬다 싱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향에서부터 전도를 시작하여 결국 무서운 아버지까지 하나님께로 인도했으며, 인도의 기독교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추한 자기 동족들의 발을 씻기며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40세에 티벳 산속으로 사라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인도 사람들은 그를 ‘인도에 나타난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야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과 고통과 눈물이 있으며, 동시에 주님 안에서 사는 기쁨과 생명과 평안도 있습니다.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아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십니다. 마태복음 3:10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과 추수’를 비유하고 있는 본문은 흔히 ‘가라지 비유’라고 부릅니다. ‘가라지’는 밀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밀의 종류가 아니라, ‘독 보리’의 일종입니다. 일종의 ‘독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를 먹게 되면 흔히 구토증이 생기고, 심하게는 생명의 위험성이 있을 만큼 위험한 풀입니다. 가라지는 크기가 밀보다 좀 작은 것이 차이점이며, 자라나는 그 자체는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가라지가 자라날 초기 단계에는 전문가들도 잘 구별하기가 어렵고, 열매를 맺게 될 때 비로소 구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라지는 뿌리를 밀 주변으로 깊숙이 내리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면 밀이 함께 뽑혀져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제거하려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 속에서도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현존하는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십니다. 곧, 교회는 성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자식들과 혼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있고, 심지어는 가라지까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처럼, 교회나 세상이나 모두 선과 악이 공존(共存)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함께 거하듯이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있습니다. 신자(信者)와 불신자(不信者)가 따로 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고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는 이 두 가지 부류 중 하나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알곡도, 사탄의 자녀인 가라지도 모두 공존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도 선과 악은 공존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육체의 욕망과 영의 욕망이 함께 거하여, 이 두 마음이 언제나 싸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마음을 로마서 7:21-2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라고 탄식합니다. 고린도전서 5:10절에서는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 성도의 삶의 자리가 악과 공존하는 세상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괴롭히는 가라지를 굳이 교회 공동체 속에, 또는 우리의 영에 남겨두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밭에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본 종들이 주인에게 보고를 하면서 “뽑아 버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냥 두어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밭에 무관심해서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물론 주인의 관심은 알곡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께서는 알곡을 위하여 가라지에게도 똑같이 은혜를 내리십니다. 마태복음 5:4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햇빛과 비의 은총이 세상의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짐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공평한 처사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의 항변처럼 “의인은 비참하게 살고, 의인을 비참하게 만드는 악인은 오히려 잘 되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말입니다. 하박국 1: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여러분은 세상이 이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처럼, 믿음의 선진들이나, 오늘의 성도들이 동일한 문제로 고민해 왔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뇌물 받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도 저렇게 잘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지요? 요나 선지자가 침략자의 도시인 니느웨 성이 불 심판을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이 부정한 세상이 확 불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52-54절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지역을 지날 때였습니다. (현대어성경)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동네에 방을 구하러 미리 심부름꾼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돌아왔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 마을 사람들이 일행들을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인간이므로 우리와 똑같은 마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라지들에게도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것은 가라지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다치게 할까 봐 염려하시는, 알곡을 위한 특별한 사랑과 배려 때문입니다. 바로 본문29절이 성도를 향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를 더 깊이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가라지의 시절은 추수 때까지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추수 때부터 전성기를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추수 때까지이지만 하나님께서 굳이 가라지를 허용하신 것은,
1)성도를 보호하기 위함이요,
2)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사기 2:20-23절에서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그러면 그 추수의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추수의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고 파종기와 추수기가 이르듯이 추수 때는 반드시 옵니다. 베드로후서 3:10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라고 하십니다.
‘1992년 10월 28일 밤 12시, 예수님께서 공중 재림한다.’고 시한부 종말론 자들인 ‘다미선교회’가 떠들어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추수 때를 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추수 때인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수에 대비해야 합니다. 농부들은 추수할 시기가 언제인지를 압니다. 적절한 시기에 곡식들을 거두고, 과일과 채소를 수확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추수 시기는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만 아십니다. 다만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시기가 다가옴을 짐작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32-35절을 봅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추수 때를 어떻게 대비해야 합니까? 먼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기본적인 기준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의(義)도 ‘믿음’입니다. 로마서 14:23절에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사악하게 보시는 것은 행악, 도적질, 살인, 간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부하는 것과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신앙의 기준이 내 육신의 욕망이 아니었는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을 을 따랐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기준은 ‘실천’입니다. 실천은 믿음과 동시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대로 실행하지 않는 것은 죽은 씨앗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가 추수 때를 대비한 성도의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달란트 비유’를 연속적으로 제시하십니다. 이는 마지막 날에 성도들의 믿음과 그 믿음대로 실천한 삶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들은 믿음과 실행에 대하여 각각 ‘주님과의 혼인잔치’와 ‘영원한 상급’과 ‘하나님나라의 상속’이라는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과 행함이 동시에 존재해야 할 자리는 항상 깨어 있는 ‘감사’입니다. 골로새서 4:2절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고 권면하십니다. 감사는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말씀을 종합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식들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비록 추수 때까지이지만 하나님께서 굳이 가라지를 허용하신 것은,
1)성도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2)성도가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추수 때에 천국 곡간에 들어가게 되는 알곡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을 바라는 사람은 모든 환경과 여건을 잘 이겨내어야 합니다. 비바람도 폭풍우도 밝은 날도 어두운 날도 잘 견뎌 내야 합니다. 이 모든 환경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기준은 ‘믿음’과 ‘믿음대로 행하는 삶’과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감사’입니다. 추수 때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중요한 때에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 끝까지 전력 질주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복된 삶을 천국 곡간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