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땅, 머물러야 할 곳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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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4-30 00:06
*** 떠나야 할 땅, 머물러야 할 곳 / 창 11:31-12:9
*** 들어가는 말
창세기 11:31-12:9,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중요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자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리란 ‘내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지난 12월에 일어난 동남아시아의 ‘쓰나미’(지진해일)를 기억하시지요? 우리나라 여행객들도 많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배낭여행 중이던 대학생의 죽음에 대하여 방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여러 지역을 여행하다가 마침 해일이 일어나던 그 시간에 피해가 컸던 푸켓 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산 열차전복 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사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오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머무는 자리는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입니다. 삶의 경영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 시간, 건강, 재능, 물질 등을 사용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여겨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봉사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따라서 쾌락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경영은 함께 태어난 쌍둥이라 할지라도 똑같지 않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설계와 경영을 잘 하여서 ‘성공적인 삶’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또는 인생 설계는 잘 되었지만 잘 못된 경영으로 ‘고전’ 하거나 ‘실패적인 삶’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대부분은 자신의 삶의 경영으로 자신이 머무는 자리가 결정됩니다. 이처럼 사람이면 누구나 평생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 경영자들입니다.
1828년 러시아에 아주 못생긴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작은 회색 눈, 큰 팔다리를 늘 비관하며
“나는 너무 못 생겨서 도저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을 거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자라면서 인생의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사랑에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특히 소년은 어른이 된 후 ‘신앙의 가치가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 신념이 승화된 명작을 남겼습니다. 이 명작이 ‘부활’이며, 이 소년은 부활의 작가 ‘톨스토이’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진리를 발견하여 자신의 삶을 잘 경영하게 될 때 참된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시켜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영원한 소망이 있는 자리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함께 없어질 육신의 자리입니까? 우리는 인생의 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가 남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어떠한 길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지나온 걸음을 살펴보고, 또한 앞으로의 인생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에는 창세기 첫 단원인 창조의 역사에 대한 결론과 더불어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출발을 말합니다. 새 역사의 문을 여는 첫 등장인물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가족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한 긴 여행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목해야 할 중요한 요점은 이들이 머물렀던 장소들입니다. 이들이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인 ‘갈대아 우르’가 가장 먼저 등장하고, 두 번째는 아브라함의 중간 정착지이자 다른 식구들의 정착지가 되어버린 ‘하란’이라는 도시이며, 세 번째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히 주어진 미래의 도시 ‘가나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최종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하여 여행하지만 그의 생전에는 약속만 받았을 뿐, 목적지에서 삶을 펼쳐보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가 떠나야 할 땅은 무엇이며,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 삶에는 떠나야할 땅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땅 ‘갈대아 우르’는 그들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육신적으로 살아왔던 목마름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땅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2:1절에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고 하십니다.
‘갈대아 우르’는 ‘갈대아’ 지역의 수도인 ‘우르’입니다. 이 지역은 고대 바벨탑이 세워졌던 ‘시날 평지’입니다. 그런가하면, 고대의 세계를 제패한 4대 강국인 ‘갈대아’(B.C 2300-1370), ‘앗수르’(B.C 1370-606), ‘바벨론’(B.C 606-538), ‘메대 파사’가 일어났던 지역입니다. 지금의 지형으로는 이라크 남부에 위치합니다. 이 도시는 이미 4천여 년 전에 무역이 성행했고 상업이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인구가 30만에 육박했음을 볼 때, 얼마나 번창한 도시였는가를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우르’는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는데, 특별히 ‘나나’라는 달의 신을 숭배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외경에는 아브라함의 부친인 데라도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입니다.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르’라는 말은 ‘목마르다. 폐허가 되었다. 황폐하다’는 의미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겉으로 볼 때, 활발하고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뭔지 모르게 사람들을 목마르게 만드는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그 원인은 여호수아24:2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예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았으며, 피를 많이 흘린 전쟁의 도시였고, 우상을 숭배하던 도시였기 때문에 영혼의 갈증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일들에 사로잡혀 인생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떠나야할 땅입니다. 에베소서5:8절을 봅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은 역시 에베소서4: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땅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인 습관과 어두움의 일들입니다. 여러분은 불신자 때의 일들을 다 버렸습니까? 세상적인 습관으로부터 확실하게 떠났습니까?
2. 우리 삶의 경영에는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 땅이 있습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난 아브라함 가족은 ‘하란’이라는 도시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메마른 광야 길을 여행하다가 잠시 쉬고자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인 ‘데라’가 늙어서 긴 여행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7: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오랜 기간을 하란에 머물면서 부를 쌓았고 후손을 낳았습니다(창12:5). ‘하란’이라는 이름은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사막 지대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산은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닙니다. 이 산 때문에 가는 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란은 언제나 장애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도시였습니다. 하란은 아브라함의 삶에도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나가야 할 땅에서 너무나 오랜 기간을 머물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군사혁명을 일으켜 16년 동안 장기집권을 한 것이며, 두 번째로는 군인 출신의 통치자로서 경제적 발전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며, 세 번째로는 그의 집권 중에 부부가 모두 나라 안에서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박 대통령에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박 대통령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카터 대통령의 친구가 박대통령에게 목사를 보내어 신앙 상담을 하도록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방문이 이루어지기 한 주간 전에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확실한 태도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의미 없는 땅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것은 아버지인 ‘데라’가 죽은 직후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적인 여러 가지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가족, 재물, 명예, 권력, 건강, 쾌락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 땅에서 잠시 지나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누리도록 주신 선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선물 자체에 집착하고 열중하며, 잠시 지나가는 것을 영원한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선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으며, 찬송가 269장에서도 “웬 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 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고 탄식합니다. 베드로후서 3:10-11절에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지나쳐야 할 땅에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3.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에 정착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사도행전7:4-5절을 봅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자손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그가 가나안에 도착하고서도 25년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손인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써, 또는 택함 받은 민족으로서의 믿음을 키우고 자질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곳입니다. 세상 끝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계시록에서 약속하신대로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으로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적 자질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모든 삶을 맡기고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비록 지금은 이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 안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혼이 부활한 생명으로 살고 있으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시민도 아브라함처럼 세상적인 고통과 시련이 분명히 있습니다. 로마서 8:17-18절(현대어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께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의 재산을 분깃으로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그 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면 그분의 고난에도 함께 동참하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대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능히 이기게 하시며, 주님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영하고 있으며,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직도 떠나야 할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지나가야 할 땅에서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주님께 맡겨진 경영이 되며,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머물러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며,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충만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창세기 11:31-12:9,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중요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자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리란 ‘내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지난 12월에 일어난 동남아시아의 ‘쓰나미’(지진해일)를 기억하시지요? 우리나라 여행객들도 많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배낭여행 중이던 대학생의 죽음에 대하여 방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여러 지역을 여행하다가 마침 해일이 일어나던 그 시간에 피해가 컸던 푸켓 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산 열차전복 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사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오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머무는 자리는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입니다. 삶의 경영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 시간, 건강, 재능, 물질 등을 사용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여겨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봉사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따라서 쾌락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경영은 함께 태어난 쌍둥이라 할지라도 똑같지 않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설계와 경영을 잘 하여서 ‘성공적인 삶’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또는 인생 설계는 잘 되었지만 잘 못된 경영으로 ‘고전’ 하거나 ‘실패적인 삶’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대부분은 자신의 삶의 경영으로 자신이 머무는 자리가 결정됩니다. 이처럼 사람이면 누구나 평생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 경영자들입니다.
1828년 러시아에 아주 못생긴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작은 회색 눈, 큰 팔다리를 늘 비관하며
“나는 너무 못 생겨서 도저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을 거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자라면서 인생의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사랑에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특히 소년은 어른이 된 후 ‘신앙의 가치가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 신념이 승화된 명작을 남겼습니다. 이 명작이 ‘부활’이며, 이 소년은 부활의 작가 ‘톨스토이’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진리를 발견하여 자신의 삶을 잘 경영하게 될 때 참된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시켜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영원한 소망이 있는 자리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함께 없어질 육신의 자리입니까? 우리는 인생의 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가 남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어떠한 길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지나온 걸음을 살펴보고, 또한 앞으로의 인생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에는 창세기 첫 단원인 창조의 역사에 대한 결론과 더불어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출발을 말합니다. 새 역사의 문을 여는 첫 등장인물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가족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한 긴 여행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목해야 할 중요한 요점은 이들이 머물렀던 장소들입니다. 이들이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인 ‘갈대아 우르’가 가장 먼저 등장하고, 두 번째는 아브라함의 중간 정착지이자 다른 식구들의 정착지가 되어버린 ‘하란’이라는 도시이며, 세 번째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히 주어진 미래의 도시 ‘가나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최종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하여 여행하지만 그의 생전에는 약속만 받았을 뿐, 목적지에서 삶을 펼쳐보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가 떠나야 할 땅은 무엇이며,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 삶에는 떠나야할 땅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땅 ‘갈대아 우르’는 그들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육신적으로 살아왔던 목마름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땅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2:1절에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고 하십니다.
‘갈대아 우르’는 ‘갈대아’ 지역의 수도인 ‘우르’입니다. 이 지역은 고대 바벨탑이 세워졌던 ‘시날 평지’입니다. 그런가하면, 고대의 세계를 제패한 4대 강국인 ‘갈대아’(B.C 2300-1370), ‘앗수르’(B.C 1370-606), ‘바벨론’(B.C 606-538), ‘메대 파사’가 일어났던 지역입니다. 지금의 지형으로는 이라크 남부에 위치합니다. 이 도시는 이미 4천여 년 전에 무역이 성행했고 상업이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인구가 30만에 육박했음을 볼 때, 얼마나 번창한 도시였는가를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우르’는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는데, 특별히 ‘나나’라는 달의 신을 숭배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외경에는 아브라함의 부친인 데라도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입니다.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르’라는 말은 ‘목마르다. 폐허가 되었다. 황폐하다’는 의미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겉으로 볼 때, 활발하고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뭔지 모르게 사람들을 목마르게 만드는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그 원인은 여호수아24:2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예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았으며, 피를 많이 흘린 전쟁의 도시였고, 우상을 숭배하던 도시였기 때문에 영혼의 갈증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일들에 사로잡혀 인생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떠나야할 땅입니다. 에베소서5:8절을 봅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은 역시 에베소서4: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땅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인 습관과 어두움의 일들입니다. 여러분은 불신자 때의 일들을 다 버렸습니까? 세상적인 습관으로부터 확실하게 떠났습니까?
2. 우리 삶의 경영에는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 땅이 있습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난 아브라함 가족은 ‘하란’이라는 도시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메마른 광야 길을 여행하다가 잠시 쉬고자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인 ‘데라’가 늙어서 긴 여행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7: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오랜 기간을 하란에 머물면서 부를 쌓았고 후손을 낳았습니다(창12:5). ‘하란’이라는 이름은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사막 지대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산은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닙니다. 이 산 때문에 가는 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란은 언제나 장애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도시였습니다. 하란은 아브라함의 삶에도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나가야 할 땅에서 너무나 오랜 기간을 머물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군사혁명을 일으켜 16년 동안 장기집권을 한 것이며, 두 번째로는 군인 출신의 통치자로서 경제적 발전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며, 세 번째로는 그의 집권 중에 부부가 모두 나라 안에서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박 대통령에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박 대통령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카터 대통령의 친구가 박대통령에게 목사를 보내어 신앙 상담을 하도록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방문이 이루어지기 한 주간 전에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확실한 태도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의미 없는 땅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것은 아버지인 ‘데라’가 죽은 직후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적인 여러 가지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가족, 재물, 명예, 권력, 건강, 쾌락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 땅에서 잠시 지나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누리도록 주신 선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선물 자체에 집착하고 열중하며, 잠시 지나가는 것을 영원한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선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으며, 찬송가 269장에서도 “웬 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 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고 탄식합니다. 베드로후서 3:10-11절에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지나쳐야 할 땅에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3.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에 정착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사도행전7:4-5절을 봅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자손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그가 가나안에 도착하고서도 25년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손인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써, 또는 택함 받은 민족으로서의 믿음을 키우고 자질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곳입니다. 세상 끝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계시록에서 약속하신대로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으로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적 자질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모든 삶을 맡기고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비록 지금은 이 세상에 머물고 있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 안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혼이 부활한 생명으로 살고 있으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시민도 아브라함처럼 세상적인 고통과 시련이 분명히 있습니다. 로마서 8:17-18절(현대어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께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의 재산을 분깃으로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그 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면 그분의 고난에도 함께 동참하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대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능히 이기게 하시며, 주님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영하고 있으며,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직도 떠나야 할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지나가야 할 땅에서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주님께 맡겨진 경영이 되며,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머물러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며,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충만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