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안목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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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4-09 23:35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안목 / 요한복음 4:27-38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4:27-38(현대어성경) 27 바로 그때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떤 여자와 이야기하고 계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나 아무도 그 여자와 무슨 내용으로 이야기하셨는지는 묻는 사람이 없었다. 28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세요. 나의 지난날을 낱낱이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그분을 만나보세요.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29 (28절과 같음) 30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보려고 동네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은 예수께 잡수실 것을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절하시며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제자들은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을까 ?' 하고 수군거렸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시작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라! 인간 영혼의 광막한 밭은 우리 주위에서 이미 누렇게 익어 이제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다. 36 추수하는 사람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영혼들을 하늘의 곳간에 거두어들인다. 그러면 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할 것이다. 37 한 사람은 뿌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게 하였다. 다른 사람이 일한 것을 너희가 추수하게 될 것이다'
지난 5일에 여러 집사님과 성도님들이 수고하여 나무를 옮기기도 하고 새로 심기도 하여 교회당 모습이 새롭고 깨끗해졌습니다. 이렇게 교회당을 가꾸다보니 제가 전임전도사 시절에 섬기던 교회가 생각이 납니다.
그 때의 교회는 교회당을 새로 짓고 화단을 가꾸기 위하여 성도들을 동원했습니다. 전나무 종류, 벚나무와 등나무, 해당화, 철쭉 등을 심었습니다. 학생들도 청년들도 부지런히 물도 주고 거름도 주며 녹음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한 교회당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나무들이 좀처럼 자라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에이, 맨날 물만 주면 뭐하나! 크지도 않는데!” 라며, 표시도 안 나는 물주는 일이 짜증스럽다는 투입니다.
나무를 심은 지 1년여가 지난 후에 등나무는 줄기를 많이 뻗었고, 철쭉도 많이 컸습니다. 그러나 벚나무, 전나무는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자란 기색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좀 잘 자라는 나무를 심지!” 라고 한마디씩 합니다. 이제 겨우 일년을 지나놓고서 말입니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라는 말처럼, 우리 인생들의 조급한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무에 물주는 사람들이 불평하듯이,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또는 무엇인가 나 자신의 뜻대로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믿지 않는 이웃, 믿지 않는 가족들이 많은 정성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기미가 보이지 않거나, 전도한 사람이 믿음이 자라지 않아서 실망감이 쌓인다고 합니다.
나무가 쓸 만한 목재로 자라기까지는 몇 십 년에서 몇 백 년이 걸립니다. 사과나무, 배나무, 감나무 등 유실수들이 모종을 심은 후 처음 과실을 맺기까지는 최소한 5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멀리 앞을 내다보는 안목도 부족하고,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합니다. 기다림을 싫어하고 그저 조급하여 금방 심고 금방 수확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득을 볼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도 모든 산업의 근본이 되는 기초과학과 제조업 등의 1차 산업분야는 인기가 없습니다. 짧은 시간에 이득을 보는 서비스업, 소비성산업 등의 3차 산업분야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덩달아서 신앙도 속전속결 형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쁜데 오래 앉아서 기도하고 성경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이런 시대에 발맞추어 예배도 행사도 빠르게 진행하고 간소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사람을 잡으려면 신앙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저는 분명히 무엇인가 관점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가까운 길인 ‘사마리아’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수가’라고 하는 성에 이르렀을 때, 주님은 특별한 만남을 위하여 마을로 들어가셔서 마을 입구에 있는 우물가에 멈추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다른 사람들이 쉬는 한낮에 물을 길러 온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당장 물이 필요했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을 길러 오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은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함과 배고픔으로 인하여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갔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여 우물가에 왔을 때, 예수님은 어떤 여인과 대화 중이셨습니다. 곧 여인은 황급히 마을을 향하여 달려갔고, 제자들은 가져온 음식을 예수님께 권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시면서 드실 기색이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없는 사이에 누가 먹을 것을 갖다 드렸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은 하나님을 뜻을 행하여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눈앞에 있는 자신들의 필요였습니다. 그들에게 미래의 일이나 자신들의 사명 같은 것은 아직 먼 곳에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디모데전서6:17절에서 충고하십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여기서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이란, 재물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세심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과거에 매여 현실을 그럭저럭 땜질하듯 살지는 않는가? 아니면 현실의 이익에 집착하느라 장래의 일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장래에 대한 소망을 위하여 성실하게 준비하거나 투자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현실에 매어있는 제자들의 관심을 끌어올리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제자들은 당혹함을 느꼈습니다. 들판은 이제 막 피어오른 보리 싹들로 파랗게 뒤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파종기(播種期)는 12월-1월이며, 추수기는 4월 중순부터 5월말 사이입니다. 보리는 보통 10월경에 파종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봐서, 그때가 12월쯤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해 못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들판의 보리를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희들” 즉, ‘세상적인 관점’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넉 달 후에나 추수하게 될 보리밭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보신 것은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들판을 달려오는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수에 갈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앞쪽의 25절에서 그들의 관심도를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리고 본문29절에서 흥분된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여인의 말을 듣고 우물가로 달려오는 무리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갈급함과 관심을 보게 됩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라는 말은, 곡식이 잘 익어서 추수해야 할 때를 말하는데, 자칫 추수가 늦어지면 버리게 될 정도의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마음이 갈급하여 적절한 영적인 추수기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적인 안목이 없었습니다. 오직 배고픈 자신들의 욕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 된 사마리아 여인은 물 긷는 일도 잊은 채,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로 몰려왔으며,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매료되어 예수님을 이틀을 더 붙잡았습니다. 순식간에 온 마을이 메시아의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틀 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적인 추수였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세계는 물질문명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보다 육신의 풍요로운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자신의 육신의 욕망으로 인하여 영적인 안목이 없었던 것처럼, 오늘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안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들판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고, 이웃들로부터 소외당하며, 영혼의 생명마저 잃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고심할 때, 예수님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추수를 기다리는 영혼들을 보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보이는 육신에만 관심 가질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셨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6:27절에서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은 썩어질 육신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멸시받고 소외당하며 죽어 있는 영혼들입니다. 성도들의 양식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즉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포기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은 우리의 장래를 보장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12:3절에서,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셨고, 디모데전서6:17-19절에서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하신 것은, 생의 후미진 곳, 많은 사람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바라보지 않는 곳, 마땅히 돌아보아야 함에도 눈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보지 못하는 곳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안목입니다. 희어져 가는 밭이란! 누구나 낫을 들고, 거두어야 할 밭입니다. 다시 말하면, 때가 지나면 거두지 못할 밭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표준과 인간의 표준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전도의 두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뿌리는 일과 거두는 일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뿌리는 자나 거두는 자들에게 각각 합당한 보답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3:6-8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심는 일”, “뿌리는 일”이란?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물주는 일”, “거두는 일”이란,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말씀을 전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나 거두는 자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6: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일꾼 된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섬기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일꾼인 우리는 일의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4: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6: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하나님의 약속하신 심판의 때가 늦어짐으로 인하여 일에 지치고 피곤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 그리하면 때가 이르겠고 거두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관심 갖는 일들이 더디고 늦어짐으로 낙심되거나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하나님의 뜻에 올바르고, 그 일을 위하여 충실하게 일하고 있다면, 결과가 좀 더디더라도 인내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일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하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신 예수님의 관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열심 있게 일하며, 소망의 씨앗들을 뿌리고 가꾸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4:27-38(현대어성경) 27 바로 그때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떤 여자와 이야기하고 계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나 아무도 그 여자와 무슨 내용으로 이야기하셨는지는 묻는 사람이 없었다. 28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세요. 나의 지난날을 낱낱이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그분을 만나보세요.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29 (28절과 같음) 30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보려고 동네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은 예수께 잡수실 것을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절하시며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제자들은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을까 ?' 하고 수군거렸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시작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라! 인간 영혼의 광막한 밭은 우리 주위에서 이미 누렇게 익어 이제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다. 36 추수하는 사람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영혼들을 하늘의 곳간에 거두어들인다. 그러면 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할 것이다. 37 한 사람은 뿌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게 하였다. 다른 사람이 일한 것을 너희가 추수하게 될 것이다'
지난 5일에 여러 집사님과 성도님들이 수고하여 나무를 옮기기도 하고 새로 심기도 하여 교회당 모습이 새롭고 깨끗해졌습니다. 이렇게 교회당을 가꾸다보니 제가 전임전도사 시절에 섬기던 교회가 생각이 납니다.
그 때의 교회는 교회당을 새로 짓고 화단을 가꾸기 위하여 성도들을 동원했습니다. 전나무 종류, 벚나무와 등나무, 해당화, 철쭉 등을 심었습니다. 학생들도 청년들도 부지런히 물도 주고 거름도 주며 녹음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한 교회당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나무들이 좀처럼 자라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에이, 맨날 물만 주면 뭐하나! 크지도 않는데!” 라며, 표시도 안 나는 물주는 일이 짜증스럽다는 투입니다.
나무를 심은 지 1년여가 지난 후에 등나무는 줄기를 많이 뻗었고, 철쭉도 많이 컸습니다. 그러나 벚나무, 전나무는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자란 기색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좀 잘 자라는 나무를 심지!” 라고 한마디씩 합니다. 이제 겨우 일년을 지나놓고서 말입니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라는 말처럼, 우리 인생들의 조급한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무에 물주는 사람들이 불평하듯이,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또는 무엇인가 나 자신의 뜻대로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믿지 않는 이웃, 믿지 않는 가족들이 많은 정성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기미가 보이지 않거나, 전도한 사람이 믿음이 자라지 않아서 실망감이 쌓인다고 합니다.
나무가 쓸 만한 목재로 자라기까지는 몇 십 년에서 몇 백 년이 걸립니다. 사과나무, 배나무, 감나무 등 유실수들이 모종을 심은 후 처음 과실을 맺기까지는 최소한 5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멀리 앞을 내다보는 안목도 부족하고,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합니다. 기다림을 싫어하고 그저 조급하여 금방 심고 금방 수확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득을 볼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도 모든 산업의 근본이 되는 기초과학과 제조업 등의 1차 산업분야는 인기가 없습니다. 짧은 시간에 이득을 보는 서비스업, 소비성산업 등의 3차 산업분야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덩달아서 신앙도 속전속결 형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쁜데 오래 앉아서 기도하고 성경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이런 시대에 발맞추어 예배도 행사도 빠르게 진행하고 간소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사람을 잡으려면 신앙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저는 분명히 무엇인가 관점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가까운 길인 ‘사마리아’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수가’라고 하는 성에 이르렀을 때, 주님은 특별한 만남을 위하여 마을로 들어가셔서 마을 입구에 있는 우물가에 멈추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다른 사람들이 쉬는 한낮에 물을 길러 온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당장 물이 필요했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을 길러 오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은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함과 배고픔으로 인하여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갔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여 우물가에 왔을 때, 예수님은 어떤 여인과 대화 중이셨습니다. 곧 여인은 황급히 마을을 향하여 달려갔고, 제자들은 가져온 음식을 예수님께 권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시면서 드실 기색이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없는 사이에 누가 먹을 것을 갖다 드렸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은 하나님을 뜻을 행하여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눈앞에 있는 자신들의 필요였습니다. 그들에게 미래의 일이나 자신들의 사명 같은 것은 아직 먼 곳에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디모데전서6:17절에서 충고하십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여기서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이란, 재물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세심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과거에 매여 현실을 그럭저럭 땜질하듯 살지는 않는가? 아니면 현실의 이익에 집착하느라 장래의 일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장래에 대한 소망을 위하여 성실하게 준비하거나 투자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현실에 매어있는 제자들의 관심을 끌어올리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제자들은 당혹함을 느꼈습니다. 들판은 이제 막 피어오른 보리 싹들로 파랗게 뒤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파종기(播種期)는 12월-1월이며, 추수기는 4월 중순부터 5월말 사이입니다. 보리는 보통 10월경에 파종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봐서, 그때가 12월쯤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해 못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들판의 보리를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희들” 즉, ‘세상적인 관점’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넉 달 후에나 추수하게 될 보리밭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보신 것은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들판을 달려오는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수에 갈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앞쪽의 25절에서 그들의 관심도를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리고 본문29절에서 흥분된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여인의 말을 듣고 우물가로 달려오는 무리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갈급함과 관심을 보게 됩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라는 말은, 곡식이 잘 익어서 추수해야 할 때를 말하는데, 자칫 추수가 늦어지면 버리게 될 정도의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마음이 갈급하여 적절한 영적인 추수기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적인 안목이 없었습니다. 오직 배고픈 자신들의 욕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 된 사마리아 여인은 물 긷는 일도 잊은 채,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로 몰려왔으며,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매료되어 예수님을 이틀을 더 붙잡았습니다. 순식간에 온 마을이 메시아의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틀 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적인 추수였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세계는 물질문명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보다 육신의 풍요로운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자신의 육신의 욕망으로 인하여 영적인 안목이 없었던 것처럼, 오늘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안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들판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고, 이웃들로부터 소외당하며, 영혼의 생명마저 잃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고심할 때, 예수님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추수를 기다리는 영혼들을 보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보이는 육신에만 관심 가질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셨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6:27절에서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은 썩어질 육신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멸시받고 소외당하며 죽어 있는 영혼들입니다. 성도들의 양식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즉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포기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은 우리의 장래를 보장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12:3절에서,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셨고, 디모데전서6:17-19절에서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하신 것은, 생의 후미진 곳, 많은 사람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바라보지 않는 곳, 마땅히 돌아보아야 함에도 눈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보지 못하는 곳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안목입니다. 희어져 가는 밭이란! 누구나 낫을 들고, 거두어야 할 밭입니다. 다시 말하면, 때가 지나면 거두지 못할 밭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표준과 인간의 표준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전도의 두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뿌리는 일과 거두는 일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뿌리는 자나 거두는 자들에게 각각 합당한 보답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3:6-8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심는 일”, “뿌리는 일”이란?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물주는 일”, “거두는 일”이란,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말씀을 전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나 거두는 자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6: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일꾼 된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섬기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일꾼인 우리는 일의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4: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6: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하나님의 약속하신 심판의 때가 늦어짐으로 인하여 일에 지치고 피곤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 그리하면 때가 이르겠고 거두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관심 갖는 일들이 더디고 늦어짐으로 낙심되거나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하나님의 뜻에 올바르고, 그 일을 위하여 충실하게 일하고 있다면, 결과가 좀 더디더라도 인내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일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하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신 예수님의 관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열심 있게 일하며, 소망의 씨앗들을 뿌리고 가꾸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