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할 수 없는 행복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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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3-27 21:12
*** 비교할 수 없는 행복 / 고린도전서 15:12-20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15:12-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의 죄에 팔려서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그늘에서 살던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속죄 제물로 내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 있는 아름다운 하늘 본향의 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에릭 사우어’는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인류를 대신하여 죽은 교주도 없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교주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소망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종교도 사상도 없습니다. 인류의 가장 확실한 소망은 ‘부활’뿐입니다. 만일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만큼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고 흥청망청하는 세상 사람들이 더 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시 사는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에 고난도 어려움도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1955년, 쉰 살이 넘은 흑인 여자가수가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오페라 ‘가면무도회’에 출연하여 관중을 감동 속에 몰아넣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1902년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 여인은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노래했으며, 결국 세계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 앤더슨’입니다. 그녀가 메트로폴리탄에 출연한 그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제 시선은 고난과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했지요. 제 아픔은 오직 예수님만이 아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생의 위기가 올 때라 하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을 만날 때까지 잊어서는 안 될 행복의 보장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시는 도장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행복으로서의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1. 내가 죽어야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이라고 하십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영의 죽음입니다. 영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결별된 삶을 말하며, 육의 죽음은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 이후 모두가 영으로는 죽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basar(rc;B, / flesh / 몸, 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6: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즉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짐승과 똑같은 ‘고깃덩어리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인 영의 사람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이미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은 영의 사람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영의 부활, 즉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의 부활을 경험하여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남은 것은 육체의 부활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육체의 생명이 있다면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새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본문 뒤의 52절을 봅시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은 이미 부활하였으며, 육체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그러면 부활의 삶을 누리기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6:6절을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에베소서 4:22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부활의 삶을 누리기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은 ‘옛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육체의 욕망대로 살던 세상 습관에 사로잡힌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이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로나 생활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옛 사람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활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과 믿지 않는 친구가 만났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개종한 친구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래 자네 기독교로 개종했다지?” “그렇다네.”
“그러면 그리스도에 관해 자네는 많은 것을 알고 있겠군. 그 분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모르겠네.”
“그러면 그분은 몇 살 때 돌아가셨지?” “그것도 모르겠군.”
“그분은 어떤 설교를 했지?” “그것 역시 모르겠네.”
“자네는 기독교로 개종했다면서 아는 것이 별로 없군.”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나도 그분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무척 부끄럽다네.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지. 3년 전 나는 술주정뱅이였고 많은 빚을 지고 있었어. 우리 가족은 알거지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고, 아내와 이이들은 저녁에 내가 집에 돌아오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지. 하지만 나는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네. 모든 빚도 청산했고, 이제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네. 내 자식들은 저녁이 되면 나의 귀가시간을 간절히 기다린다네. 이 모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네. 나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와 같은 것들을 알고 있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세상적인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욕설도, 거짓말도, 시기도, 질투도, 원망도, 염려도, 의심도. 마음 씀씀이부터 모든 세상적인 습관과 말씨와 행동에 이르기까지 생활이 변하고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생활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지 못하면 부활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야고보서 2:22절에서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6절에서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생활 속에서 행하여 질 때에 온전하게 되며, 영생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세상의 욕망을 따르던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부활의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임을 믿어야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17-18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망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도저히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을지라도 내가 다시 살지 못한다면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쁘게 주님을 따르는 것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미래의 것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보증하신 하나님의 약속 어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셨는데, 요한복음 11:25-26절에서는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시며, 요한복음 6:44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어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임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서론에서 말씀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미 영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육신의 부활은 보증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우리는 부활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부활의 사람임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기웃거리면서 세상에 빌붙어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부귀영화를, 명예와 권력을, 방탕과 쾌락을, 좀 더 좋은 집을, 좀 더 편안한 생활을 얻어 보려고 기웃거립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이는 부활의 사람이면서 부활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불쌍한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생명심판은 없습니다. 즉 천국행과 지옥행을 나누는 그런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심판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한 저주의 죽음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 죽음은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15절을 봅시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부활의 사람이 누리도록 허용된 자유이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곧 나의 죽음이며 나의 부활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믿고 생활 속에서 행동해야 하며,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부활의 사람으로 남을 배려하며 사랑하는 여유로움과 담대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활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3.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달려야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7-58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모든 운동경기는 끝까지 기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도중에 멈추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경주도 이와 같습니다. 내 생애가 끝나는 그날, 내 육신의 호흡이 그치는 그날, 아니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최상의 기량으로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에만 십자가를 생각하지 말고, 일평생 우리 가슴에 주님의 십자가를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부활을 내 부활로 확신하면서, 일평생 부활의 사람으로 여유롭게 사랑하며 배려하면서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그리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영광의 면류관과 영원한 생명으로 완전한 부활의 삶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15:12-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의 죄에 팔려서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그늘에서 살던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속죄 제물로 내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 있는 아름다운 하늘 본향의 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에릭 사우어’는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인류를 대신하여 죽은 교주도 없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교주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소망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종교도 사상도 없습니다. 인류의 가장 확실한 소망은 ‘부활’뿐입니다. 만일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만큼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고 흥청망청하는 세상 사람들이 더 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시 사는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에 고난도 어려움도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1955년, 쉰 살이 넘은 흑인 여자가수가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오페라 ‘가면무도회’에 출연하여 관중을 감동 속에 몰아넣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1902년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 여인은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노래했으며, 결국 세계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 앤더슨’입니다. 그녀가 메트로폴리탄에 출연한 그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제 시선은 고난과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했지요. 제 아픔은 오직 예수님만이 아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생의 위기가 올 때라 하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을 만날 때까지 잊어서는 안 될 행복의 보장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시는 도장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행복으로서의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1. 내가 죽어야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이라고 하십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영의 죽음입니다. 영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결별된 삶을 말하며, 육의 죽음은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 이후 모두가 영으로는 죽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basar(rc;B, / flesh / 몸, 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6: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즉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짐승과 똑같은 ‘고깃덩어리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인 영의 사람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이미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은 영의 사람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영의 부활, 즉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의 부활을 경험하여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남은 것은 육체의 부활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육체의 생명이 있다면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새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본문 뒤의 52절을 봅시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은 이미 부활하였으며, 육체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그러면 부활의 삶을 누리기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6:6절을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에베소서 4:22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부활의 삶을 누리기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은 ‘옛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육체의 욕망대로 살던 세상 습관에 사로잡힌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이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로나 생활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옛 사람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활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과 믿지 않는 친구가 만났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개종한 친구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래 자네 기독교로 개종했다지?” “그렇다네.”
“그러면 그리스도에 관해 자네는 많은 것을 알고 있겠군. 그 분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모르겠네.”
“그러면 그분은 몇 살 때 돌아가셨지?” “그것도 모르겠군.”
“그분은 어떤 설교를 했지?” “그것 역시 모르겠네.”
“자네는 기독교로 개종했다면서 아는 것이 별로 없군.”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나도 그분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무척 부끄럽다네.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지. 3년 전 나는 술주정뱅이였고 많은 빚을 지고 있었어. 우리 가족은 알거지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고, 아내와 이이들은 저녁에 내가 집에 돌아오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지. 하지만 나는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네. 모든 빚도 청산했고, 이제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네. 내 자식들은 저녁이 되면 나의 귀가시간을 간절히 기다린다네. 이 모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네. 나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와 같은 것들을 알고 있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세상적인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욕설도, 거짓말도, 시기도, 질투도, 원망도, 염려도, 의심도. 마음 씀씀이부터 모든 세상적인 습관과 말씨와 행동에 이르기까지 생활이 변하고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생활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지 못하면 부활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야고보서 2:22절에서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6절에서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생활 속에서 행하여 질 때에 온전하게 되며, 영생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세상의 욕망을 따르던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부활의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임을 믿어야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17-18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망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도저히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을지라도 내가 다시 살지 못한다면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쁘게 주님을 따르는 것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미래의 것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보증하신 하나님의 약속 어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셨는데, 요한복음 11:25-26절에서는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시며, 요한복음 6:44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어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임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서론에서 말씀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미 영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육신의 부활은 보증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우리는 부활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부활의 사람임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기웃거리면서 세상에 빌붙어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부귀영화를, 명예와 권력을, 방탕과 쾌락을, 좀 더 좋은 집을, 좀 더 편안한 생활을 얻어 보려고 기웃거립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이는 부활의 사람이면서 부활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불쌍한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생명심판은 없습니다. 즉 천국행과 지옥행을 나누는 그런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심판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한 저주의 죽음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 죽음은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15절을 봅시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부활의 사람이 누리도록 허용된 자유이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곧 나의 죽음이며 나의 부활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믿고 생활 속에서 행동해야 하며,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부활의 사람으로 남을 배려하며 사랑하는 여유로움과 담대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활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3.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달려야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7-58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모든 운동경기는 끝까지 기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도중에 멈추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경주도 이와 같습니다. 내 생애가 끝나는 그날, 내 육신의 호흡이 그치는 그날, 아니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최상의 기량으로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에만 십자가를 생각하지 말고, 일평생 우리 가슴에 주님의 십자가를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부활을 내 부활로 확신하면서, 일평생 부활의 사람으로 여유롭게 사랑하며 배려하면서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그리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영광의 면류관과 영원한 생명으로 완전한 부활의 삶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