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예수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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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3-21 22:46
*** 복된 예수 / 이사야 53:1-6
** 들어가는 말
이사야 53:1-6,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시온 성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흔들며,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면서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로마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들떠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국가를 이루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소원을 예수님이 이루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들어서신 예수님은 이미 성전의 무너짐과 예수살렘의 멸망을 보셨습니다. 지금은 ‘호산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몇 날이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될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라고 선명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정작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히려 멸시하며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면서도 행복과 자유뿐만 아니라 부귀영화와 생명까지 주시는 예수님을 푸대접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고 환영하며 맞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9-12절을 봅시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진짜 복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옛 말에 “등 시린 절 받기 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푸대접한 사람에게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이 계면쩍다.’는 뜻입니다.
영국 여왕이 별장을 나와 부근을 산책하다가 졸지에 비를 만났습니다. 가까운 오두막집으로 가서 ‘우산을 좀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여왕인줄 모르고 살이 부러진 헌 우산을 내주었습니다. 그 후 여왕의 시관이 그 집을 찾아와서 여왕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금일봉과 헌 우산을 돌려주었습니다. 오두막집 주인은 너무나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마 오두막집 주인이 우산을 빌리는 분이 자기 나라의 여왕임을 알았다면 그렇게 대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조차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받고 살지만, 주님을 푸대접하기는 유대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푸대접과 멸시와 버림에도 불구하고 독생자 예수님을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요한일서 4:10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내 생명과 내 유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모른척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주님은 ‘나와 함께 하면 형통하고 행복이 있고, 평안과 기쁨이 있다.’고 하시며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내 마음문 밖에 서서 ‘문 좀 열어 달라.’고 두드리시지만 피곤하다고, 귀찮다고, 감수해야 할 손해와 희생이 너무 크다고 못들은 척 외면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모든 일이 잘 되고 복 받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내 생애에 복된 예수가 되기 원한다면 꼭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2-3절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출신과 겉모습을 보며, 나약한 죽음을 보고서 외면하고 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따르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자신들의 꿈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두 제자의 기록이 누가복음 24:13-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꿈을 잃은 두 제자가 실망감에 싸여 고향인 엠마오로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동행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근심에 가득한 그들에게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며,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유대인들처럼 자신의 유익에만 급급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결과로 예수님을 귀하게 여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실망과 좌절이 찾아왔으며 낙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도 외적인 욕구충족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 출세를 하고 싶어서, 예수 믿으면 잘 된다고 해서, 건강을 얻고 싶어서 등등.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으면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자신의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20-22절입니다.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따르는 목적이 잘 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와 제물보다도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0절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실 것”을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버는 일보다도 더 많이, 자녀들을 키우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출세하고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원하는 것보다도 더 먼저 예수님을 깊이 알기를 힘쓰십시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세상에는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길이시며, 우리가 따를 진리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한 생명이심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있음’(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 육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당연히 귀하게 여기게 되며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 행복이 되기를 원하고 복이 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본문4-6절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왜 이렇게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 앞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가슴이 뭉클하고 감격이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내 손이 닿지 않도록 멀어집니다. 얼마 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예수님을 새롭게 알았다.’, ‘신앙의 도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느꼈겠습니까?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예수님의 고난이 표현하기조차 힘든 고난이며, 그 고난을 나를 위하여 당하셨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는 모습, 깊숙이 눌러 씌어진 가시면류관으로부터 흐르는 피, 십자가의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지시는 모습,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망치소리, 저주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의 소리들. 예수님이 당하신 멸시와 천대, 고난과 죽음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유명한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Handel)은 본문이 들어 있는 이사야 53장을 기초로 ‘수난의 어린양’을 작곡하던 중 펜을 놓고 울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때 헨델은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내가 당해야 할 고난이며,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내가 져야할 십자가이며,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죽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생각하면서 복음송 ‘세 개의 못’을 함께 불러봅시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내가 받아야 할 징벌이며,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음을 확신하며 감사할 때에 나에게 ‘복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세상의 어느 종교에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아들을 제물로 내 놓았다는 교주가 있습니까? 불교의 석가모니는 신분으로나 환경으로 보아도 가난한 자나 어려운 자를 이해할 만한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교만스러운 망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유교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성으로 의를 얻고자 하지만 인간의 윤리와 도덕으로는 결단코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수양을 쌓아 의로워지거나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일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길, 즉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한 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우리가 다 알 수도 없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십자가에는 나를 살리시고 영원한 삶을 주시며 본향을 찾게 하시는 예수님의 속죄의 큰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알고 감격하며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복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내 생애에 복된 예수가 되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귀하게 여기십시오.
예수님이 당하신 멸시와 천대, 고난과 죽음은 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임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내 삶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내 삶에서 복된 예수가 될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이사야 53:1-6,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시온 성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흔들며,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면서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로마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들떠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국가를 이루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소원을 예수님이 이루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들어서신 예수님은 이미 성전의 무너짐과 예수살렘의 멸망을 보셨습니다. 지금은 ‘호산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몇 날이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될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라고 선명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정작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히려 멸시하며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면서도 행복과 자유뿐만 아니라 부귀영화와 생명까지 주시는 예수님을 푸대접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고 환영하며 맞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9-12절을 봅시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진짜 복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옛 말에 “등 시린 절 받기 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푸대접한 사람에게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이 계면쩍다.’는 뜻입니다.
영국 여왕이 별장을 나와 부근을 산책하다가 졸지에 비를 만났습니다. 가까운 오두막집으로 가서 ‘우산을 좀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여왕인줄 모르고 살이 부러진 헌 우산을 내주었습니다. 그 후 여왕의 시관이 그 집을 찾아와서 여왕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금일봉과 헌 우산을 돌려주었습니다. 오두막집 주인은 너무나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마 오두막집 주인이 우산을 빌리는 분이 자기 나라의 여왕임을 알았다면 그렇게 대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조차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받고 살지만, 주님을 푸대접하기는 유대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푸대접과 멸시와 버림에도 불구하고 독생자 예수님을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요한일서 4:10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내 생명과 내 유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모른척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주님은 ‘나와 함께 하면 형통하고 행복이 있고, 평안과 기쁨이 있다.’고 하시며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내 마음문 밖에 서서 ‘문 좀 열어 달라.’고 두드리시지만 피곤하다고, 귀찮다고, 감수해야 할 손해와 희생이 너무 크다고 못들은 척 외면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모든 일이 잘 되고 복 받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내 생애에 복된 예수가 되기 원한다면 꼭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2-3절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출신과 겉모습을 보며, 나약한 죽음을 보고서 외면하고 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따르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자신들의 꿈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두 제자의 기록이 누가복음 24:13-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꿈을 잃은 두 제자가 실망감에 싸여 고향인 엠마오로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동행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근심에 가득한 그들에게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며,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유대인들처럼 자신의 유익에만 급급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결과로 예수님을 귀하게 여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실망과 좌절이 찾아왔으며 낙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도 외적인 욕구충족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 출세를 하고 싶어서, 예수 믿으면 잘 된다고 해서, 건강을 얻고 싶어서 등등.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으면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자신의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20-22절입니다.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따르는 목적이 잘 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와 제물보다도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0절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실 것”을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버는 일보다도 더 많이, 자녀들을 키우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출세하고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원하는 것보다도 더 먼저 예수님을 깊이 알기를 힘쓰십시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세상에는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길이시며, 우리가 따를 진리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한 생명이심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있음’(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 육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당연히 귀하게 여기게 되며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에 행복이 되기를 원하고 복이 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본문4-6절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왜 이렇게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 앞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가슴이 뭉클하고 감격이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내 손이 닿지 않도록 멀어집니다. 얼마 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예수님을 새롭게 알았다.’, ‘신앙의 도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느꼈겠습니까?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예수님의 고난이 표현하기조차 힘든 고난이며, 그 고난을 나를 위하여 당하셨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는 모습, 깊숙이 눌러 씌어진 가시면류관으로부터 흐르는 피, 십자가의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지시는 모습,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망치소리, 저주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의 소리들. 예수님이 당하신 멸시와 천대, 고난과 죽음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유명한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Handel)은 본문이 들어 있는 이사야 53장을 기초로 ‘수난의 어린양’을 작곡하던 중 펜을 놓고 울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때 헨델은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내가 당해야 할 고난이며,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내가 져야할 십자가이며,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죽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생각하면서 복음송 ‘세 개의 못’을 함께 불러봅시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내가 받아야 할 징벌이며,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음을 확신하며 감사할 때에 나에게 ‘복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세상의 어느 종교에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아들을 제물로 내 놓았다는 교주가 있습니까? 불교의 석가모니는 신분으로나 환경으로 보아도 가난한 자나 어려운 자를 이해할 만한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교만스러운 망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유교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성으로 의를 얻고자 하지만 인간의 윤리와 도덕으로는 결단코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수양을 쌓아 의로워지거나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일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길, 즉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한 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우리가 다 알 수도 없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십자가에는 나를 살리시고 영원한 삶을 주시며 본향을 찾게 하시는 예수님의 속죄의 큰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알고 감격하며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복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내 생애에 복된 예수가 되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귀하게 여기십시오.
예수님이 당하신 멸시와 천대, 고난과 죽음은 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임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내 삶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내 삶에서 복된 예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