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소원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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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10-12 22:37
*** 하나님의 소원 / 베드로후서 3:8-9
** 들어가는 말
베드로후서 3:8-9,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말하겠습니까?
마음이 복잡해지지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아마 소원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크고 작거나, 현실적이거나 추상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간절한 바램은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사람의 소원을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무슨 소원이 있겠느냐고 묻고 싶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향하신 소원이 있다고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당신의 위대성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며, 또한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의 외침을 들으시며,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심을 알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9:24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세아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요한복음 17: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를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는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우리가 ‘사단’ 혹은 ‘마귀’라고 부르는 영적인 존재들은 바로 이 의무를 거부하고 스스로 높여서 영광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4절에서 사단에 대하여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했으며, 이들의 결말을 계시록 20:10절에서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며, 그 소원을 저버린 자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 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사람에게 구원과 소망 주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원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강렬한 열망으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을 택하시고 계약을 맺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26:12) 신약의 백성들에게도 계시록21:7절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 내지는 이득이 생기겠습니까?
미국의 시인인 ‘롱펠러’가 얼른 떠오른 시상을 휴지에 급하게 적은 메모지가 7백만 원에 팔렸습니다. 보잘것없는 휴지에 위대한 문학성이 더해진 값이었습니다. 롱펠러는 보통 메모 용지에 사인해서 1백만 불 정도도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값없는 종이 조각에 배후가 든든한 서명이 더해진 값어치였습니다.
‘미국 정부’가 종이 조각에 사인한 100불은 백 불짜리 지폐가 되어 전 세계에서 통용됩니다. 종이 조각에 정부보증이 더해진 가치입니다.
‘피카소’가 종이쪽지에 그린 데생이 집 한 채 값이 됩니다. 별로 가치 없는 종이에 천재의 솜씨와 이름이 붙어 엄청난 가치로 변한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무가치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질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가치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며 그에 상응하는 영광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게 될 영광을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녀들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구원과 소망입니다. 본문 9절에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으며, 디모데전서 2:4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11절에서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복’이라고 하면, 우리 민족이 일가견(一家見)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이지 너무나 좋아합니다. 이부자리에도, 베개에도, 수저에도, 그릇에도, 옷감 무늬에도, 대문에도, 심지어는 과일 껍질에까지 ‘복(福)’자를 새겨놓았습니다. 일반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또는 생의 의미를 찾아 고행을 자초하면서 신의 경지에 이르기를 사모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각국의 민담들을 보면, 반드시 신선에 대한 이야기이나 신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대를 따라서 어떤 획기적인 일이나 고행, 크고 위대한 일을 통하여 ‘달인(達人)’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습니다.(참조 ; 헬라철학의 이원론(육신은 악하고, 영은 신령한 것으로 여겨서 고행이나 금욕을 통하여 Idea의 세계, 즉 이상의 세계를 꿈꾸었다./ 영혼불멸설 등장 - 이들의 영향을 받은 초대 기독교의 이단인 ‘영지주의’, 중세의 ‘수도원 운동’ 등이 있다. 불교의 사상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신의 경지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조차도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인간의 행동은 인간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중심을 이루는 인본주의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맞추어 우상을 만들고 유토피아의 세계, 인간의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생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자상한 배려와 징계를 동반한 교훈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신명기10:12-13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으며, 신명기15:4-5절에서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크고 위대한 일이나, 고통스러운 자학 행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성경에는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1) 사르밧 과부의 떡 한 조각과 물 한잔(왕상17:7-24) 2) 기적을 일으킨 어린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요6:5-14) 3) 가장 많이 바친 것으로 인정 된 과부의 두 렙돈(막12:41-44) 4) 적은 능력으로 충성하여 주님께 인정받은 빌라델비아 교회(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5) ‘미련한 자, 약한 자, 가난한 자,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씀(고전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모두는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무시할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능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능력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29절의 말씀처럼,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인생의 행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주기를 원하십니다.
자유, 정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매력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했던가봅니다.
옛날 미국 남부에 살던 흑인 노예 한명이 백인 주인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예 제도가 없는 북부의 시카고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인권 변호를 의뢰하기 위하여 한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변호사는 흑인 의뢰자가 도망친 경위를 물었습니다.
“자네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도망쳤나?” “아닙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는 곳이 누추해서인가?” “아니요. 살고 있는 집은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그럼 주인의 학대가 심했던 모양이군.” “천만에요. 주인의 학대는 없었습니다.” “그럼 일이 몹시 고되었군.” “그것도 아닙니다. 일의 양은 많지 않았어요.”
변호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흑인의뢰자를 바라보며, “그럼 자넨 왜 그 좋은 환경을 버리고 도망을 쳤는가?” 그러자 흑인은 변호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그 환경이 그렇게 좋아 보이시거든 선생님이 제 대신 노예로 들어가시죠.”
이 흑인 도망자에게는 살기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는 좋은 여건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자유라는 미명아래 갖은 범죄와 포악과 혁명을 일삼았던 일이 너무도 많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러시아 혁명이 그랬으며, 볼세비즘의 혁명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이런 파괴적인 자유에 싫증이 나서 ‘나는 이 세계에 들어온 입장권을 조물주께 도로 갖다 바치고, 이 세상에서 하차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원한다.’는 독백을 하는 그런 장면도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요지경입니다. 자유를 빌미로 전쟁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자유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돈, 권력, 명예, 쾌락, 자식 등. 수없이 많은 것에 얽매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진정으로 자유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모든 얽어매는 것들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얽어매기 위함이 아니라, 자녀의 신분으로서 기쁨과 평안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고기의 자유는 ‘물’이라는 제한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이 답답하여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물을 벗어난다면, 물을 벗어나는 그 순간이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더 많은 자유를 꿈꾸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 곧 죽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진정한 자유는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자유 합니까? 얽매인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신 소원은 사람들의 소망과 행복과 자유를 위한 배려입니다. 결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려고 하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의 소원만 하나님께 아뢰지 말고, 하나님의 소원도 깨닫고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구원과 행복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베드로후서 3:8-9,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말하겠습니까?
마음이 복잡해지지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아마 소원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크고 작거나, 현실적이거나 추상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간절한 바램은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사람의 소원을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무슨 소원이 있겠느냐고 묻고 싶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향하신 소원이 있다고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당신의 위대성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며, 또한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의 외침을 들으시며,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심을 알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9:24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세아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요한복음 17: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를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는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우리가 ‘사단’ 혹은 ‘마귀’라고 부르는 영적인 존재들은 바로 이 의무를 거부하고 스스로 높여서 영광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4절에서 사단에 대하여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했으며, 이들의 결말을 계시록 20:10절에서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며, 그 소원을 저버린 자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 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사람에게 구원과 소망 주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원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강렬한 열망으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을 택하시고 계약을 맺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26:12) 신약의 백성들에게도 계시록21:7절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 내지는 이득이 생기겠습니까?
미국의 시인인 ‘롱펠러’가 얼른 떠오른 시상을 휴지에 급하게 적은 메모지가 7백만 원에 팔렸습니다. 보잘것없는 휴지에 위대한 문학성이 더해진 값이었습니다. 롱펠러는 보통 메모 용지에 사인해서 1백만 불 정도도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값없는 종이 조각에 배후가 든든한 서명이 더해진 값어치였습니다.
‘미국 정부’가 종이 조각에 사인한 100불은 백 불짜리 지폐가 되어 전 세계에서 통용됩니다. 종이 조각에 정부보증이 더해진 가치입니다.
‘피카소’가 종이쪽지에 그린 데생이 집 한 채 값이 됩니다. 별로 가치 없는 종이에 천재의 솜씨와 이름이 붙어 엄청난 가치로 변한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무가치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질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가치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며 그에 상응하는 영광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게 될 영광을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녀들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구원과 소망입니다. 본문 9절에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으며, 디모데전서 2:4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11절에서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복’이라고 하면, 우리 민족이 일가견(一家見)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이지 너무나 좋아합니다. 이부자리에도, 베개에도, 수저에도, 그릇에도, 옷감 무늬에도, 대문에도, 심지어는 과일 껍질에까지 ‘복(福)’자를 새겨놓았습니다. 일반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또는 생의 의미를 찾아 고행을 자초하면서 신의 경지에 이르기를 사모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각국의 민담들을 보면, 반드시 신선에 대한 이야기이나 신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대를 따라서 어떤 획기적인 일이나 고행, 크고 위대한 일을 통하여 ‘달인(達人)’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습니다.(참조 ; 헬라철학의 이원론(육신은 악하고, 영은 신령한 것으로 여겨서 고행이나 금욕을 통하여 Idea의 세계, 즉 이상의 세계를 꿈꾸었다./ 영혼불멸설 등장 - 이들의 영향을 받은 초대 기독교의 이단인 ‘영지주의’, 중세의 ‘수도원 운동’ 등이 있다. 불교의 사상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신의 경지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조차도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인간의 행동은 인간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중심을 이루는 인본주의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맞추어 우상을 만들고 유토피아의 세계, 인간의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생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자상한 배려와 징계를 동반한 교훈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신명기10:12-13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으며, 신명기15:4-5절에서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크고 위대한 일이나, 고통스러운 자학 행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성경에는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1) 사르밧 과부의 떡 한 조각과 물 한잔(왕상17:7-24) 2) 기적을 일으킨 어린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요6:5-14) 3) 가장 많이 바친 것으로 인정 된 과부의 두 렙돈(막12:41-44) 4) 적은 능력으로 충성하여 주님께 인정받은 빌라델비아 교회(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5) ‘미련한 자, 약한 자, 가난한 자,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씀(고전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모두는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무시할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능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능력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29절의 말씀처럼,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인생의 행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주기를 원하십니다.
자유, 정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매력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했던가봅니다.
옛날 미국 남부에 살던 흑인 노예 한명이 백인 주인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예 제도가 없는 북부의 시카고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인권 변호를 의뢰하기 위하여 한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변호사는 흑인 의뢰자가 도망친 경위를 물었습니다.
“자네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도망쳤나?” “아닙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는 곳이 누추해서인가?” “아니요. 살고 있는 집은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그럼 주인의 학대가 심했던 모양이군.” “천만에요. 주인의 학대는 없었습니다.” “그럼 일이 몹시 고되었군.” “그것도 아닙니다. 일의 양은 많지 않았어요.”
변호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흑인의뢰자를 바라보며, “그럼 자넨 왜 그 좋은 환경을 버리고 도망을 쳤는가?” 그러자 흑인은 변호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그 환경이 그렇게 좋아 보이시거든 선생님이 제 대신 노예로 들어가시죠.”
이 흑인 도망자에게는 살기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는 좋은 여건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자유라는 미명아래 갖은 범죄와 포악과 혁명을 일삼았던 일이 너무도 많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러시아 혁명이 그랬으며, 볼세비즘의 혁명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이런 파괴적인 자유에 싫증이 나서 ‘나는 이 세계에 들어온 입장권을 조물주께 도로 갖다 바치고, 이 세상에서 하차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원한다.’는 독백을 하는 그런 장면도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요지경입니다. 자유를 빌미로 전쟁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자유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돈, 권력, 명예, 쾌락, 자식 등. 수없이 많은 것에 얽매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진정으로 자유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모든 얽어매는 것들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얽어매기 위함이 아니라, 자녀의 신분으로서 기쁨과 평안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고기의 자유는 ‘물’이라는 제한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이 답답하여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물을 벗어난다면, 물을 벗어나는 그 순간이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더 많은 자유를 꿈꾸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 곧 죽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진정한 자유는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자유 합니까? 얽매인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신 소원은 사람들의 소망과 행복과 자유를 위한 배려입니다. 결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려고 하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의 소원만 하나님께 아뢰지 말고, 하나님의 소원도 깨닫고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구원과 행복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