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아름다운 사귐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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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9-25 22:23
*** 성도의 아름다운 사귐 / 요일 1:1-10
** 들어가는 말
요한일서 1:1-10,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 생명이 있는 생명체의 공통된 특징은 ‘사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지만,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식물들까지 나름대로의 ‘사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귐’이란 각각의 개체간의 ‘교제’, ‘교통’을 의미합니다.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교제를 통하여 번식을 합니다. 꽃을 피우고, 꿀을 만들고, 냄새를 풍기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사소통이며 교제의 수단입니다. 미물인 개미의 사회에도 엄격한 규율과 철저한 사명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냄새와 몸의 동작, 소리로 의사를 표현하며 서로 교통합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사귐’은 모든 생명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여러 통로로 표현하며, 서로를 나누는 사귐을 통하여 사회를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들과 전혀 다른 특별한 교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생명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은 ‘영의 교제’입니다. 육적인 교제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교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입니다. 이 영적인 교제가 없다면 인간의 특별성은 부각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 과학이 주장하는 대로 단지 조금 더 진보된 생명체일 뿐이겠지요.
이처럼 영적인 교제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의 육적인 사귐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하여 새로운 사귐을 전하십니다. 본 서신은 서기 90-95년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60여년이 지난 때이며, 다른 사도들은 이미 모두 죽고, 요한만 살아남았을 때입니다. 이 시기는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핍박이 거세게 몰아닥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회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위기는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내부에 침투한 이단사상이 성도들의 정통 신앙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사상은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이 기독교와 전혀 달랐으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아닌 전혀 다른 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정통신앙을 지키고, 이 신앙의 외적 표현인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실천적인 사귐’입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위하여 주신 생명의 길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인데, 이것은 동화나 전설이 아닌 실제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다른 짐승들처럼 영의 생명이 끊어진 육체적인 존재인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심을 증거합니다. 곧 하나님이 제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실천적인 사귐의 길입니다.
본문 1절을 봅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고 하십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으며’, ‘눈으로 보았으며’, ‘손으로 만졌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실체로서 오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1세대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복음 증거, 십자가 사건과 죽음, 부활까지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신앙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실체적 사귐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는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가능합니다. 즉 육적인 감각으로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마치 직접 경험한 것과 같은 일들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감의 작용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인 사귐은 성령님의 주도 하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인 삶에서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지만 육적인 사귐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영적인 사귐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6-1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현대어성경 / 그러므로 세상적인 생각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평가하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나 역시 과거에는 그런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단순히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실천적 사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사귐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가지도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제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교제가 본문 3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하십니다. 첫 번째 사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 상호간의 교제입니다. 두 번째 사귐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이 두 사귐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그 근본은 하나입니다.
실천적 사귐은 무엇이며 어떻게 회복합니까?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함께 거닐기도 하는 등 아름답고 친밀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삶은 ‘완전함’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을 몰랐으며, 고통도 괴로움도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기쁨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죄의 대가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버렸습니다.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에게는 수고로움과 고통과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서로를 탓하며 죄를 전가하는 불신의 벽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되기까지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즉 기쁨의 동산인 에덴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어떻게 회복합니까?
본문 3-4절을 봅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고, 16:33절에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귐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사귐의 회복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 서로 간의 사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말미암아 끊어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 서로간의 관계가 모두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단절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죄가 하나님과 단절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움이고, 빛 가운데 행하지 못하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9:1-2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의 비극을 끝내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통로를 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제한된 관계를 완전하게 개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날마다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만일, 아무 죄도 없는 것처럼 매일의 삶을 주님 없이 덤덤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통로를 통하여 에덴동산의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보혈의 능력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 그리고 성도들과의 사귐을 맘껏 누리십시오. 이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이며, 말씀 묵상과 실천, 기도와 찬양, 화해와 용서와 위로를 삶 속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만의 특권입니다.
1773년 영국 ‘웨인스게이트(Wainsgate)’라는 시골 소도시에서 저술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게 목회하던 ‘존 퍼셋(John Fawcett)’이라는 침례교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런던의 큰 교회의 초청을 받아 44년 넘게 목회하던 시골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사를 도우러 온 마차에 얼마간의 이삿짐을 실은 다음 목사관을 막 떠나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마중 나온 성도들이 더 좋은 여건의 목회지로 떠나는 목사님 내외를 차마 붙잡지는 못하고 눈물만 훔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모님 ‘메리 퍼셋(Mary Fawcett)’이 갑자기 땅에 주저앉으면서 남편 목사님에게
“여보, 난 여기 못 떠나요. 이 형제 자매들을 다 두고 난 떠날 수 없어요”
하고 통곡 했습니다. 그러자 삽시간에 교회 마당은 눈물마당이 되었습니다. 잠시 후 퍼셋 목사님은
“여보, 짐을 다시 들여놓읍시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곳, 이보다 더 좋은 교회가 어디 있겠소.”
하며 이삿짐을 다시 목사관으로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지은 시가 525장 찬송입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름다운 사귐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이신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매일의 삶에서 이 기쁨과 행복의 아름다운 사귐이 가득하도록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와 사랑으로 성도들 서로를 생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일서 1:1-10,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 생명이 있는 생명체의 공통된 특징은 ‘사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지만,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식물들까지 나름대로의 ‘사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귐’이란 각각의 개체간의 ‘교제’, ‘교통’을 의미합니다.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교제를 통하여 번식을 합니다. 꽃을 피우고, 꿀을 만들고, 냄새를 풍기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사소통이며 교제의 수단입니다. 미물인 개미의 사회에도 엄격한 규율과 철저한 사명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냄새와 몸의 동작, 소리로 의사를 표현하며 서로 교통합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사귐’은 모든 생명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여러 통로로 표현하며, 서로를 나누는 사귐을 통하여 사회를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들과 전혀 다른 특별한 교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생명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은 ‘영의 교제’입니다. 육적인 교제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교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입니다. 이 영적인 교제가 없다면 인간의 특별성은 부각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 과학이 주장하는 대로 단지 조금 더 진보된 생명체일 뿐이겠지요.
이처럼 영적인 교제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의 육적인 사귐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하여 새로운 사귐을 전하십니다. 본 서신은 서기 90-95년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60여년이 지난 때이며, 다른 사도들은 이미 모두 죽고, 요한만 살아남았을 때입니다. 이 시기는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핍박이 거세게 몰아닥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회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위기는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내부에 침투한 이단사상이 성도들의 정통 신앙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사상은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이 기독교와 전혀 달랐으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아닌 전혀 다른 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정통신앙을 지키고, 이 신앙의 외적 표현인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실천적인 사귐’입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위하여 주신 생명의 길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인데, 이것은 동화나 전설이 아닌 실제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다른 짐승들처럼 영의 생명이 끊어진 육체적인 존재인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심을 증거합니다. 곧 하나님이 제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실천적인 사귐의 길입니다.
본문 1절을 봅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고 하십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으며’, ‘눈으로 보았으며’, ‘손으로 만졌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실체로서 오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1세대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복음 증거, 십자가 사건과 죽음, 부활까지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신앙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실체적 사귐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는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가능합니다. 즉 육적인 감각으로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마치 직접 경험한 것과 같은 일들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감의 작용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인 사귐은 성령님의 주도 하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인 삶에서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지만 육적인 사귐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영적인 사귐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6-1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현대어성경 / 그러므로 세상적인 생각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평가하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나 역시 과거에는 그런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단순히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실천적 사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사귐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가지도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제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교제가 본문 3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하십니다. 첫 번째 사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 상호간의 교제입니다. 두 번째 사귐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이 두 사귐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그 근본은 하나입니다.
실천적 사귐은 무엇이며 어떻게 회복합니까?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함께 거닐기도 하는 등 아름답고 친밀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삶은 ‘완전함’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을 몰랐으며, 고통도 괴로움도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기쁨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죄의 대가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버렸습니다.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에게는 수고로움과 고통과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서로를 탓하며 죄를 전가하는 불신의 벽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되기까지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즉 기쁨의 동산인 에덴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어떻게 회복합니까?
본문 3-4절을 봅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고, 16:33절에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귐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사귐의 회복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 서로 간의 사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말미암아 끊어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 서로간의 관계가 모두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단절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죄가 하나님과 단절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움이고, 빛 가운데 행하지 못하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9:1-2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의 비극을 끝내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통로를 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제한된 관계를 완전하게 개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날마다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만일, 아무 죄도 없는 것처럼 매일의 삶을 주님 없이 덤덤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통로를 통하여 에덴동산의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보혈의 능력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 그리고 성도들과의 사귐을 맘껏 누리십시오. 이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이며, 말씀 묵상과 실천, 기도와 찬양, 화해와 용서와 위로를 삶 속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만의 특권입니다.
1773년 영국 ‘웨인스게이트(Wainsgate)’라는 시골 소도시에서 저술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게 목회하던 ‘존 퍼셋(John Fawcett)’이라는 침례교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런던의 큰 교회의 초청을 받아 44년 넘게 목회하던 시골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사를 도우러 온 마차에 얼마간의 이삿짐을 실은 다음 목사관을 막 떠나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마중 나온 성도들이 더 좋은 여건의 목회지로 떠나는 목사님 내외를 차마 붙잡지는 못하고 눈물만 훔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모님 ‘메리 퍼셋(Mary Fawcett)’이 갑자기 땅에 주저앉으면서 남편 목사님에게
“여보, 난 여기 못 떠나요. 이 형제 자매들을 다 두고 난 떠날 수 없어요”
하고 통곡 했습니다. 그러자 삽시간에 교회 마당은 눈물마당이 되었습니다. 잠시 후 퍼셋 목사님은
“여보, 짐을 다시 들여놓읍시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곳, 이보다 더 좋은 교회가 어디 있겠소.”
하며 이삿짐을 다시 목사관으로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지은 시가 525장 찬송입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름다운 사귐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이신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매일의 삶에서 이 기쁨과 행복의 아름다운 사귐이 가득하도록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와 사랑으로 성도들 서로를 생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