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잡는 용기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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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8-27 18:15
*** 기회를 잡는 용기 / 마가복음 10:46-52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0:46-52절,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현대인의 정신질환 중에 점점 노이로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뿐만 아니라 젊은 청년들 가운데서도 노이로제 현상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노이로제를 가리켜서 심리학에서는 ‘정신분열의 초기 현상’이라고 합니다. 정신분열의 초기 단계인 노이로제의 초기 단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집에서 나올 때에 문을 꼭 잠그고 나왔습니다. 골목을 나오다가 ‘내가 정말 문을 잠갔는가?’ 의심이 생깁니다. 다시 되돌아가서 문을 한번 열어봅니다. 확인해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엌일을 하다가 가스 불을 잠그고 시장에 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정말 가스 불을 잠그고 나왔는가?’ 의심이 생깁니다. 집에 전화를 해서 확인해보면 잠겨져 있습니다.
이는 자기가 한 일이나 행동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건망증의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엔 심리적인 큰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확신한 것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지 못한 사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이러한 반대 현상을 겪게 됩니다. 즉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신뢰조차 잃어버리고 불안한 삶을 지탱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함을 잊어 보려고 온갖 것에 빠져들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술에 취하고 마약에 취하고 쾌락에 빠져 괴로운 세상을 잊어보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에 미쳐서 번민을 잊어보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취감을 통하여 불안을 떨쳐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많은 정신분열 환자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 2:1절 이하에서 자신을 즐겁게 해보려고 세상의 온갖 것을 다 해보았지만 헛된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1절입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 27:20절에서 “음부(지옥)와 유명(저승)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욕심)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했으며, 전도서 5:10절에서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 복음 송에서도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땐 나는 만족 하였네. … 나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 하겠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함께 불러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먼저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기 전에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 이웃들을 신뢰하고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신뢰가 쌓여져 가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 또한 깊어갈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이는 하나님의 어떤 능력도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자신의 생활 속에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큰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이 시간에 읽었던 본문 말씀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는 여리고 사람으로 소경이었습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며 생활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 도시는 종려나무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발삼 숲과 장미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향기가 진동하는 낙원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최후의 일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중에 여리고에 들리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는 구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절기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순례자들은 이 때 만큼은 마음이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귀에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망설임도 없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소경 거지의 갑작스런 등장이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그를 제지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호소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드디어 바디매오는 일생 최대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알렸습니다. 바디매오는 그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던져버리고 뛰어 일어났습니다. 기회를 잃어버릴세라 보이지 않는 걸음을 겅중거리며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고, 바디매오는 즉시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간단한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소경 바디매오의 결연한 의지입니다. 그의 예수님께로 향하는 신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거지였고, 소경이었지만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이며, 대단한 의지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그들의 방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눈을 뜰 수 있는 최대의 기회라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또 하나, 바디매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겉옷을 던져버리고 예수님께로 간 것입니다. 당시의 보통 사람들의 겉옷은 두터운 외투로서 잠자리에서는 이불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이웃의 옷을 저당 잡을 경우에는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도록’(출22:26)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지인 바디매오는 노천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겉옷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그 외투를 벗어던져버렸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바디매오가 왜 그처럼 중요한 겉옷을 던져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예수님께 재빨리 나아가는데 치렁치렁한 옷이 거추장스럽기도 했겠지만, 그는 자신이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 것입니다. 다시는 거지를 상징하는 이 옷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확신 말입니다.
그의 결연한 의지는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보기를”이라는 단어는 ‘잃었던 시력을 회복하다.’, ‘다시 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바디매오는 선천성 맹인이 아니라 후천적인 어떤 이유로 시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 자신의 잃었던 시력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원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고백했습니다. 마치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만을 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자신의 가장 요긴한 필요를 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바디매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박함이 있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주시면 좋고 안 주셔도 그만이고’라는 형식의 신앙으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성공으로 만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아직 세상의 환경을 생각하고 이것저것 주변의 여건을 생각하면서 영적인 일에 관심 갖기를 게을리 한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9:13절에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하셨고, 33: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주변에서 신앙의 조력자와 훼방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삶을 훼방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자꾸만 세상을 보도록 부추기는 부류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이제부터 기도에 힘써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일들이 자꾸만 생깁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내일부터’라고 사단의 꾐에 쉽사리 넘어가는 것입니다.
호수 근처에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혼자서는 결코 수영하러 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는 혼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아들을 붙잡았습니다.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빠 내가 수영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호수 근처에 놀러가면서 왜 수영복을 가지고 갔지?” “수영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갔어요.”라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소년과 같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 미리 계획을 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친구하여 지내면 그들을 닮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러 들어가면 함께 가서 음료수만 마시고 있겠다고 결심해 보십시오. 사단은 ‘입에만 데었다만 떼라.’, ‘한 잔만’ 이라고 권유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며 능력이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과 모든 삶을 맡겨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겉옷을 던져버렸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신뢰했던 것입니다. 다시는 거지의 신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가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보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껏 구하는 것이 세상의 육신적인 것들만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줄꼬!’라고 물으셨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3:11-13절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시며 부귀영화로 넘치도록 체우셨습니다. 바디매오도 역시 부귀영화보다 자신의 보기를 구했으며, 눈을 뜬 즉시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무엇이 더 귀한 것이지를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평소에 믿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거지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을 성실하게 살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게 합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며 살 때에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깨어 있을 때에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생애 최고의 기회는 지금입니다. 어제는 지나가버렸으니 이미 쓸모가 없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지금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바로 오늘, 이 날을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며, 오직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과 바디매오와 같은 열정과 용기로 소망을 이루는 복된 삶이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0:46-52절,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현대인의 정신질환 중에 점점 노이로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뿐만 아니라 젊은 청년들 가운데서도 노이로제 현상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노이로제를 가리켜서 심리학에서는 ‘정신분열의 초기 현상’이라고 합니다. 정신분열의 초기 단계인 노이로제의 초기 단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집에서 나올 때에 문을 꼭 잠그고 나왔습니다. 골목을 나오다가 ‘내가 정말 문을 잠갔는가?’ 의심이 생깁니다. 다시 되돌아가서 문을 한번 열어봅니다. 확인해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엌일을 하다가 가스 불을 잠그고 시장에 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정말 가스 불을 잠그고 나왔는가?’ 의심이 생깁니다. 집에 전화를 해서 확인해보면 잠겨져 있습니다.
이는 자기가 한 일이나 행동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건망증의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엔 심리적인 큰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확신한 것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지 못한 사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이러한 반대 현상을 겪게 됩니다. 즉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신뢰조차 잃어버리고 불안한 삶을 지탱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함을 잊어 보려고 온갖 것에 빠져들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술에 취하고 마약에 취하고 쾌락에 빠져 괴로운 세상을 잊어보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에 미쳐서 번민을 잊어보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취감을 통하여 불안을 떨쳐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많은 정신분열 환자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 2:1절 이하에서 자신을 즐겁게 해보려고 세상의 온갖 것을 다 해보았지만 헛된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1절입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 27:20절에서 “음부(지옥)와 유명(저승)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욕심)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했으며, 전도서 5:10절에서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 복음 송에서도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땐 나는 만족 하였네. … 나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 하겠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함께 불러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먼저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기 전에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 이웃들을 신뢰하고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신뢰가 쌓여져 가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 또한 깊어갈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이는 하나님의 어떤 능력도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자신의 생활 속에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큰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이 시간에 읽었던 본문 말씀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는 여리고 사람으로 소경이었습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며 생활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 도시는 종려나무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발삼 숲과 장미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향기가 진동하는 낙원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최후의 일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중에 여리고에 들리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는 구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절기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순례자들은 이 때 만큼은 마음이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귀에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망설임도 없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소경 거지의 갑작스런 등장이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그를 제지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호소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드디어 바디매오는 일생 최대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알렸습니다. 바디매오는 그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던져버리고 뛰어 일어났습니다. 기회를 잃어버릴세라 보이지 않는 걸음을 겅중거리며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고, 바디매오는 즉시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간단한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소경 바디매오의 결연한 의지입니다. 그의 예수님께로 향하는 신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거지였고, 소경이었지만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이며, 대단한 의지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그들의 방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눈을 뜰 수 있는 최대의 기회라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또 하나, 바디매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겉옷을 던져버리고 예수님께로 간 것입니다. 당시의 보통 사람들의 겉옷은 두터운 외투로서 잠자리에서는 이불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이웃의 옷을 저당 잡을 경우에는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도록’(출22:26)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지인 바디매오는 노천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겉옷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그 외투를 벗어던져버렸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바디매오가 왜 그처럼 중요한 겉옷을 던져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예수님께 재빨리 나아가는데 치렁치렁한 옷이 거추장스럽기도 했겠지만, 그는 자신이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 것입니다. 다시는 거지를 상징하는 이 옷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확신 말입니다.
그의 결연한 의지는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보기를”이라는 단어는 ‘잃었던 시력을 회복하다.’, ‘다시 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바디매오는 선천성 맹인이 아니라 후천적인 어떤 이유로 시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 자신의 잃었던 시력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원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고백했습니다. 마치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만을 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자신의 가장 요긴한 필요를 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바디매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박함이 있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주시면 좋고 안 주셔도 그만이고’라는 형식의 신앙으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성공으로 만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아직 세상의 환경을 생각하고 이것저것 주변의 여건을 생각하면서 영적인 일에 관심 갖기를 게을리 한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9:13절에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하셨고, 33: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주변에서 신앙의 조력자와 훼방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삶을 훼방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자꾸만 세상을 보도록 부추기는 부류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이제부터 기도에 힘써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일들이 자꾸만 생깁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내일부터’라고 사단의 꾐에 쉽사리 넘어가는 것입니다.
호수 근처에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혼자서는 결코 수영하러 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는 혼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아들을 붙잡았습니다.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빠 내가 수영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호수 근처에 놀러가면서 왜 수영복을 가지고 갔지?” “수영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갔어요.”라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소년과 같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 미리 계획을 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친구하여 지내면 그들을 닮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러 들어가면 함께 가서 음료수만 마시고 있겠다고 결심해 보십시오. 사단은 ‘입에만 데었다만 떼라.’, ‘한 잔만’ 이라고 권유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며 능력이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과 모든 삶을 맡겨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겉옷을 던져버렸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신뢰했던 것입니다. 다시는 거지의 신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가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보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껏 구하는 것이 세상의 육신적인 것들만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줄꼬!’라고 물으셨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3:11-13절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시며 부귀영화로 넘치도록 체우셨습니다. 바디매오도 역시 부귀영화보다 자신의 보기를 구했으며, 눈을 뜬 즉시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무엇이 더 귀한 것이지를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평소에 믿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거지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을 성실하게 살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게 합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며 살 때에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깨어 있을 때에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생애 최고의 기회는 지금입니다. 어제는 지나가버렸으니 이미 쓸모가 없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지금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바로 오늘, 이 날을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며, 오직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과 바디매오와 같은 열정과 용기로 소망을 이루는 복된 삶이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