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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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8-27 18:13
***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 / 마태복음 5:43-48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5:43-48절,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인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이란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드미뜨리’가 죄수가 되어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검사가 드미뜨리에 대하여 고발하면서
“후레자식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그런 패륜의 자식을 러시아의 모든 아버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고발한다.”
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방청객들은 주먹을 쥐고, 마치 성경 속의 간음한 현장에 붙잡혀 온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던 군중과도 같이 분노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유명한 노변호사가 러시아의 아버지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하나밖에 없는 애인을 아버지가 빼앗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 러시아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돌을 던지지 말기를 바란다.”
고 선처를 호소할 때 드미뜨리는 생전 처음으로 울어 버렸고, 방청객들도 동정심에 눈물을 훔쳤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변호사가 말할 때는 모든 사람이 울고 동정했지만, 검사가 말할 때는 돌로 쳐 죽이려는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동정적이며 애정이 깊을 수도 있지만, 사악하고 증오에 가득 차고 흉악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온갖 악기가 연주되는 오케스트라도 지휘자에 따라서 음악이 연주되는 것처럼, 우리 사람들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우스만’(K.M. Usman)목사는 한 때 회교 사제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회교 경전인 ‘코란’에 계시된 ‘모하메드’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모하메드는 성장기에 숙부와 숙모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그의 숙부는 그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고 숙모는 그가 맨발로 걸어 다니는 곳에 가시를 놓아두는가 하면, 아침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가고 있는 그에게 쓰레기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후에 모하메드는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부 라합(Abu Lahab)의 두 손이 저주를 받아 멸망하리라. 그의 재물과 그가 번 것이 그에게 쓸모없게 되리라. 그는 곧 이글거리는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중상(中傷)하며 돌아다니는 그의 아내도 그렇게 되리라. 그녀의 목에 종려 섬유를 꼬아서 만든 밧줄이 감기게 되리라.”
우스만은 코란에 기록된 모하메드의 그 기도를, 十字架 위에서 그 큰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에게 저주를 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라고 용서하셨습니다. 우스만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핍박에 대한 모하메드의 반응은 평범한 인간의 반응인 반면, 원수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신적인 존재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결국 ‘우스만’은 기독교 부흥사가 되어, 타지마할(Taj Mahal)묘가 있는 아그라(Agra)시 근교에서 사역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면 거듭나게 되고 삶이 변화하게 됩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본문 43-44절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인이 마지막까지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삶으로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관용과 이해와 사랑이 결집된 인간 최고의 품성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성도가 이런 품성을 가져야 할 이유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말씀하십니다. 즉 아버지가 그런 품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자녀는 당연히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방식이기도 함을 가르치십니다. 본문 46-47절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그 시간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켜갈 수가 있겠습니까?
1. 생활 속에서 나타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고, 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기본법으로 제정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잘 알듯이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오늘날 교회공동체나 사회공동체에서 사랑이 식어간다는 것은 관심의 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에 바빠서 남의 생활에 관심을 가질 마음적인 여유가 없으며, 더욱이 사생활 보호라는 묘한 법 때문에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옆집에서 몇 주일씩 시신이 썩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앞장서서 회복해야 할 것은 관심의 회복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모아놓고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에 율법사가 물었습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라고요? 물론 그래야지요.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사람이 이웃입니까?” 예수님은 비유로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10:25-3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다분히 그 시대를 비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존경받는 인물들이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선한 주인공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선한 주인공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도록 맞았으며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 길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강도만난 자를 모르는 척 지나갔습니다. 다음으로 레위인도 역시 모르는 척 지나쳤습니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는 즉시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타고 가던 나귀에 그 사람을 싣고는 가까운 주막으로 가서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물론 치료비를 미리 지불했으면, 혹시 더 들더라도 돌아오는 길에 지불 할 테니 충분히 치료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어야 할 대상은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이나, 다시 만나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 또는 외국인, 낯선 사람까지도 포함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사랑을 행하여야 하는 일은 특별한 어떤 것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의 일입니다. 그러나 찬물도 순서가 있듯이 관심과 사랑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9-10절입니다. (현대어성경)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실망도 포기도 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면 복을 거두어들일 날이 올 것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십시오.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가장 먼저는 하나님 사랑이요, 다음은 천국의 지체들인 성도들 간의 사랑이요, 그 다음은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동심원 적인 성경적 사랑의 법칙입니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내 가족부터 시작해서 일가친척으로 점점 퍼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디모데전서 5: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지체들인 성도들과 자신의 가족과 일가친척과 주변의 이웃들에게 생활 속에서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돕고, 베풀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일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또는 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때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2.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즉 가치관의 혼란입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어느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혼란스럽습니다. 우리의 대적 사단은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조차 구약의 동형보복법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가치관을 세우게 만듭니다. 이유인 즉,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고, 좋게 대해줘도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손해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벌써 아시고 미리 본문의 말씀을 준비하셨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6:32-36절을 봅시다.
(현대어성경) “32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해서 너희가 상을 받을 줄 아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33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그것이 그렇게 장한 일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하고 있다. 34 만일 너희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돈을 꾸어 준다면 그게 무슨 선한 일이겠느냐? 악한 사람들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꾸어 준다. 35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보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적을 사랑하지 않고 적당하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대안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을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적에 대한 이러한 혁신적인 태도는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이해하기 어렵기는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원수에 대하여 친구를 대하듯 동일한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종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셨으며, 십자가로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일서 4:11-1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랑 외에 대안이 없습니다.
계단식 논을 아래위로 소유한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계단식 논이어서 비가 제때 오지 않으면 아래 웅덩이에서 물을 져다 날라야 하는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가뭄이 들어서 위쪽의 논을 가진 농부가 매일같이 가파른 비탈 아래의 웅덩이로부터 양동이로 물을 퍼 올려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의 논을 가진 농부는 위쪽의 논에 물이 고여 있을 때 논두렁에 구멍을 내어 자신의 논으로 물이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위쪽 논의 농부가 화가 났습니다. 싸우러 가는 길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전처럼 계속 물을 끌어 올리고 아무 알도 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농부는 목사님의 권면대로 꾹 참으며 매일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농부는 여전히 물꼬를 빼돌렸습니다. 참다못한 농부는 며칠이 지난 뒤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다음 단계를 일러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 농부는 아래 논에 먼저 물을 대어 준 다음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삼일이 지났지만 두 농부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삼일이 지났을 때 저녁 무렵에 아래쪽 논의 농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의 힘은 오늘도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불법까지도 사랑으로 용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깨어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법은 손을 대거나 맛을 보지 않도록 철저히 막아야 합니다. 사랑과 관용과 이해 그리고 분별,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교회가 이렇게 이 시대에 깨어 있어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바꾸어가도록 힘씁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시는 날, 내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날에 자랑스럽게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삶을 다듬어 갑시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5:43-48절,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인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이란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드미뜨리’가 죄수가 되어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검사가 드미뜨리에 대하여 고발하면서
“후레자식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그런 패륜의 자식을 러시아의 모든 아버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고발한다.”
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방청객들은 주먹을 쥐고, 마치 성경 속의 간음한 현장에 붙잡혀 온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던 군중과도 같이 분노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유명한 노변호사가 러시아의 아버지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하나밖에 없는 애인을 아버지가 빼앗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 러시아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돌을 던지지 말기를 바란다.”
고 선처를 호소할 때 드미뜨리는 생전 처음으로 울어 버렸고, 방청객들도 동정심에 눈물을 훔쳤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변호사가 말할 때는 모든 사람이 울고 동정했지만, 검사가 말할 때는 돌로 쳐 죽이려는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동정적이며 애정이 깊을 수도 있지만, 사악하고 증오에 가득 차고 흉악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온갖 악기가 연주되는 오케스트라도 지휘자에 따라서 음악이 연주되는 것처럼, 우리 사람들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우스만’(K.M. Usman)목사는 한 때 회교 사제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회교 경전인 ‘코란’에 계시된 ‘모하메드’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모하메드는 성장기에 숙부와 숙모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그의 숙부는 그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고 숙모는 그가 맨발로 걸어 다니는 곳에 가시를 놓아두는가 하면, 아침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가고 있는 그에게 쓰레기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후에 모하메드는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부 라합(Abu Lahab)의 두 손이 저주를 받아 멸망하리라. 그의 재물과 그가 번 것이 그에게 쓸모없게 되리라. 그는 곧 이글거리는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중상(中傷)하며 돌아다니는 그의 아내도 그렇게 되리라. 그녀의 목에 종려 섬유를 꼬아서 만든 밧줄이 감기게 되리라.”
우스만은 코란에 기록된 모하메드의 그 기도를, 十字架 위에서 그 큰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에게 저주를 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라고 용서하셨습니다. 우스만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핍박에 대한 모하메드의 반응은 평범한 인간의 반응인 반면, 원수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신적인 존재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결국 ‘우스만’은 기독교 부흥사가 되어, 타지마할(Taj Mahal)묘가 있는 아그라(Agra)시 근교에서 사역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면 거듭나게 되고 삶이 변화하게 됩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본문 43-44절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인이 마지막까지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삶으로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관용과 이해와 사랑이 결집된 인간 최고의 품성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성도가 이런 품성을 가져야 할 이유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말씀하십니다. 즉 아버지가 그런 품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자녀는 당연히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방식이기도 함을 가르치십니다. 본문 46-47절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그 시간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켜갈 수가 있겠습니까?
1. 생활 속에서 나타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고, 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기본법으로 제정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잘 알듯이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오늘날 교회공동체나 사회공동체에서 사랑이 식어간다는 것은 관심의 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에 바빠서 남의 생활에 관심을 가질 마음적인 여유가 없으며, 더욱이 사생활 보호라는 묘한 법 때문에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옆집에서 몇 주일씩 시신이 썩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앞장서서 회복해야 할 것은 관심의 회복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모아놓고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에 율법사가 물었습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라고요? 물론 그래야지요.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사람이 이웃입니까?” 예수님은 비유로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10:25-3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다분히 그 시대를 비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존경받는 인물들이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선한 주인공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선한 주인공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도록 맞았으며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 길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강도만난 자를 모르는 척 지나갔습니다. 다음으로 레위인도 역시 모르는 척 지나쳤습니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는 즉시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타고 가던 나귀에 그 사람을 싣고는 가까운 주막으로 가서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물론 치료비를 미리 지불했으면, 혹시 더 들더라도 돌아오는 길에 지불 할 테니 충분히 치료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어야 할 대상은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이나, 다시 만나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 또는 외국인, 낯선 사람까지도 포함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사랑을 행하여야 하는 일은 특별한 어떤 것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의 일입니다. 그러나 찬물도 순서가 있듯이 관심과 사랑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9-10절입니다. (현대어성경)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실망도 포기도 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면 복을 거두어들일 날이 올 것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십시오.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가장 먼저는 하나님 사랑이요, 다음은 천국의 지체들인 성도들 간의 사랑이요, 그 다음은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동심원 적인 성경적 사랑의 법칙입니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내 가족부터 시작해서 일가친척으로 점점 퍼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디모데전서 5: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지체들인 성도들과 자신의 가족과 일가친척과 주변의 이웃들에게 생활 속에서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돕고, 베풀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일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또는 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때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2.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즉 가치관의 혼란입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어느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혼란스럽습니다. 우리의 대적 사단은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조차 구약의 동형보복법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가치관을 세우게 만듭니다. 이유인 즉,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고, 좋게 대해줘도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손해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벌써 아시고 미리 본문의 말씀을 준비하셨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6:32-36절을 봅시다.
(현대어성경) “32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해서 너희가 상을 받을 줄 아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33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그것이 그렇게 장한 일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하고 있다. 34 만일 너희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돈을 꾸어 준다면 그게 무슨 선한 일이겠느냐? 악한 사람들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꾸어 준다. 35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보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적을 사랑하지 않고 적당하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대안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을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적에 대한 이러한 혁신적인 태도는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이해하기 어렵기는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원수에 대하여 친구를 대하듯 동일한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종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셨으며, 십자가로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일서 4:11-1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랑 외에 대안이 없습니다.
계단식 논을 아래위로 소유한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계단식 논이어서 비가 제때 오지 않으면 아래 웅덩이에서 물을 져다 날라야 하는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가뭄이 들어서 위쪽의 논을 가진 농부가 매일같이 가파른 비탈 아래의 웅덩이로부터 양동이로 물을 퍼 올려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의 논을 가진 농부는 위쪽의 논에 물이 고여 있을 때 논두렁에 구멍을 내어 자신의 논으로 물이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위쪽 논의 농부가 화가 났습니다. 싸우러 가는 길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전처럼 계속 물을 끌어 올리고 아무 알도 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농부는 목사님의 권면대로 꾹 참으며 매일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농부는 여전히 물꼬를 빼돌렸습니다. 참다못한 농부는 며칠이 지난 뒤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다음 단계를 일러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 농부는 아래 논에 먼저 물을 대어 준 다음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삼일이 지났지만 두 농부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삼일이 지났을 때 저녁 무렵에 아래쪽 논의 농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의 힘은 오늘도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불법까지도 사랑으로 용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깨어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법은 손을 대거나 맛을 보지 않도록 철저히 막아야 합니다. 사랑과 관용과 이해 그리고 분별,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교회가 이렇게 이 시대에 깨어 있어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바꾸어가도록 힘씁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시는 날, 내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날에 자랑스럽게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삶을 다듬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