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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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8-27 18:10
***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 시 39:1-13
** 들어가는 말
시편 39:1-13절, “1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8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10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수족관에 열대어를 키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으면서도 색이 아름답고 예쁜 열대어를 20여 마리 길렀습니다. 어느 날, 방바닥에 열대어 한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또 한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원인을 찾으려고 틈틈이 수족관을 관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열대어 몇 마리가 물위로 톡톡 튀어 오르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서는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 물고기들이 탈출하려 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의 습성이었든지 모르지만 그들은 물을 벗어나서 죽은 것입니다. 내가 물고기가 아니니 그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물고기들은 좁든지 갑갑하든지 물에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가 봅니다.
열대어에게는 수족관이 좁고 답답한 공간이었을지 모르지만 키우는 사람은 최선의 배려를 해서 환경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비록 환경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물을 떠난 열대어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졌다면, 인간의 삶의 영역은 어디이겠습니까? ‘물’이 물고기가 물고기 됨을 발견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이라면, 인간이 인간됨을 발견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은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랑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필요로 하고, 새가 창공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이 사실을 세심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과 자신의 죄로 인한 질병으로 극심한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환경을 탈출하려 안간힘을 써 보지만 오히려 더욱 깊은 구렁으로 빠질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핍박과 어려움을 이겨 보려고 신앙적인 침묵으로 참아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참을 수 없도록 ‘화’만 북받쳐 오를 뿐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인간 스스로는 환경을 탈출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즉, 인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限界)가 있는 유한(有限)한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 두기를 간구합니다( 본문 4-7절).
인생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의 환경을 스스로는 결단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깨달은 대로 사람은 능력이 있든 없든 일정한 선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천재지변(天災地變), 이러한 것은 피조물 된 인간이 아무리 힘써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8:17절에서 지혜자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9:11-12절에서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1) 사람에게는 인내의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동’, 특히 ‘말’을 참으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1절에서 혀로 인한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혀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즉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이를 참고 침묵하기를 애썼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침묵하기를 힘쓴 이유는 9절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침묵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애가서 3:26-28절에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일에는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라면 신앙으로 침묵하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신앙적 침묵으로 인하여 오히려 마음이 불같이 들끓고,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함이 북받쳐 올라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쏟아 놓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감정을 쏟아 놓으면 일시적으로는 마음이 시원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마음의 괴로움은 더욱 커질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의지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46:3-5절에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불같이 끓어오르는 마음과 변명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음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이것이 분을 내어도 범죄 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지만, 에베소서 4:26-27절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처럼 분노가 범죄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인생의 소유(所有)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 사람의 생애가 7-80년이 되어 긴 것처럼 여겨진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 같이 지극히 짧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일생을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90:4절에서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고백했으며, 11-12절에서는, “그 누가 주님의 노여움 그 무서움을 알며, 그 누가 주님의 분노 그 두려움을 알까요! 인생살이가 얼마나 짧은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가게 하소서.”(현대어성경)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짧은 인생을 한 순간의 쾌락과 헛된 일에 소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인생들이 잡으려고 발버둥치는 부귀영화는 ‘그림자’같은 것일 뿐이며, 육신의 쾌락은 잠시 즐거울 따름이어서 허무할 뿐입니다. 본문6절에서 모세는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 6:12절에서 “그림자처럼 덧없는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살아가는 길인 줄을 누가 과연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벌어질 일을 누가 과연 일러줄 수 있겠는가?”(현대어성경)라고 탄식합니다.
‘그림자’라는 말은, ‘헛된 과시’, ‘환영’, ‘착각’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림자처럼 생명도 없고 실체도 없는, 곧 사라져 버릴 허무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부지런히 모으지만 곧 흙으로 사라져 버릴 인간인데, 죽고 나면 그 모아 놓은 재물이 누구 것이 될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8월 10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에 60억대 재산의 갑부 할머니가 가정환경을 비관하여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고 보도했습니다. 77세가 된 이 할머니는 남편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리고, 자식들은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불화가 끊이지 않아서 삶을 비관해 왔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죽은 다음 날에도 큰딸은 어머니의 통장에서 억대의 돈을 인출했습니다.
이것이 부유한 인생의 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지금 당면한 현실을 즐겁게 지내는 것이 지혜로운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 9:9절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고 하십니다. 왜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스스로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근심하고 밤잠을 설치며 걱정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키를 단 1㎝라도 크게 할 수 없고, 환경을 바꿀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2:25-26절에서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자신의 유한성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만 소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의 유한성을 깨닫고, 또한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부귀영화와 쾌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스스로가 유혹 당하고, 괴로움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인간의 욕망이 인간 스스로를 찔렀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나님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사정을 소망의 하나님께 간구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아뢰는 것은,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이 처한 고난과 역경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채찍을 맞아 곤고하고 병들어 있지만, 주님만이 자신의 소망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8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제시한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 하는 첫머리에 자신의 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자신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가 남아 있지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으면 많은, 기도가 있다 할지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 1:15절에서,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시기 전에 반드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울퉁불퉁 제 멋대로 생긴 돌들이 쓰임 받기에 합당한 모양으로 다듬어져야 하나님의 성전에 쓰이게 됩니다. 성도가 준비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성도의 품성의 뾰족한 모서리들을 깎아 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이 일이 성도에게는 고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듬어지지 않으면 결코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쓸데없는 타격도 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작업은 자녀들의 행복을 위하여 사랑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파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성도의 모든 고난까지도 영원한 소망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비록 환경이 고난스럽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고난 중에라도 기뻐하며 감사를 잃지 않는 행복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시편 39:1-13절, “1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8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10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수족관에 열대어를 키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으면서도 색이 아름답고 예쁜 열대어를 20여 마리 길렀습니다. 어느 날, 방바닥에 열대어 한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또 한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원인을 찾으려고 틈틈이 수족관을 관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열대어 몇 마리가 물위로 톡톡 튀어 오르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서는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 물고기들이 탈출하려 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의 습성이었든지 모르지만 그들은 물을 벗어나서 죽은 것입니다. 내가 물고기가 아니니 그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물고기들은 좁든지 갑갑하든지 물에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가 봅니다.
열대어에게는 수족관이 좁고 답답한 공간이었을지 모르지만 키우는 사람은 최선의 배려를 해서 환경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비록 환경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물을 떠난 열대어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졌다면, 인간의 삶의 영역은 어디이겠습니까? ‘물’이 물고기가 물고기 됨을 발견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이라면, 인간이 인간됨을 발견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은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랑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필요로 하고, 새가 창공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이 사실을 세심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과 자신의 죄로 인한 질병으로 극심한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환경을 탈출하려 안간힘을 써 보지만 오히려 더욱 깊은 구렁으로 빠질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핍박과 어려움을 이겨 보려고 신앙적인 침묵으로 참아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참을 수 없도록 ‘화’만 북받쳐 오를 뿐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인간 스스로는 환경을 탈출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즉, 인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限界)가 있는 유한(有限)한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 두기를 간구합니다( 본문 4-7절).
인생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의 환경을 스스로는 결단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깨달은 대로 사람은 능력이 있든 없든 일정한 선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천재지변(天災地變), 이러한 것은 피조물 된 인간이 아무리 힘써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8:17절에서 지혜자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9:11-12절에서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1) 사람에게는 인내의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동’, 특히 ‘말’을 참으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1절에서 혀로 인한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혀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즉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이를 참고 침묵하기를 애썼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침묵하기를 힘쓴 이유는 9절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침묵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애가서 3:26-28절에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일에는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라면 신앙으로 침묵하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신앙적 침묵으로 인하여 오히려 마음이 불같이 들끓고,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함이 북받쳐 올라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쏟아 놓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감정을 쏟아 놓으면 일시적으로는 마음이 시원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마음의 괴로움은 더욱 커질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의지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46:3-5절에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불같이 끓어오르는 마음과 변명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음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이것이 분을 내어도 범죄 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지만, 에베소서 4:26-27절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처럼 분노가 범죄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인생의 소유(所有)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 사람의 생애가 7-80년이 되어 긴 것처럼 여겨진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 같이 지극히 짧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일생을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90:4절에서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고백했으며, 11-12절에서는, “그 누가 주님의 노여움 그 무서움을 알며, 그 누가 주님의 분노 그 두려움을 알까요! 인생살이가 얼마나 짧은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가게 하소서.”(현대어성경)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짧은 인생을 한 순간의 쾌락과 헛된 일에 소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인생들이 잡으려고 발버둥치는 부귀영화는 ‘그림자’같은 것일 뿐이며, 육신의 쾌락은 잠시 즐거울 따름이어서 허무할 뿐입니다. 본문6절에서 모세는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 6:12절에서 “그림자처럼 덧없는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살아가는 길인 줄을 누가 과연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벌어질 일을 누가 과연 일러줄 수 있겠는가?”(현대어성경)라고 탄식합니다.
‘그림자’라는 말은, ‘헛된 과시’, ‘환영’, ‘착각’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림자처럼 생명도 없고 실체도 없는, 곧 사라져 버릴 허무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부지런히 모으지만 곧 흙으로 사라져 버릴 인간인데, 죽고 나면 그 모아 놓은 재물이 누구 것이 될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8월 10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에 60억대 재산의 갑부 할머니가 가정환경을 비관하여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고 보도했습니다. 77세가 된 이 할머니는 남편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리고, 자식들은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불화가 끊이지 않아서 삶을 비관해 왔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죽은 다음 날에도 큰딸은 어머니의 통장에서 억대의 돈을 인출했습니다.
이것이 부유한 인생의 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지금 당면한 현실을 즐겁게 지내는 것이 지혜로운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 9:9절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고 하십니다. 왜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스스로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근심하고 밤잠을 설치며 걱정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키를 단 1㎝라도 크게 할 수 없고, 환경을 바꿀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2:25-26절에서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자신의 유한성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만 소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의 유한성을 깨닫고, 또한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부귀영화와 쾌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스스로가 유혹 당하고, 괴로움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인간의 욕망이 인간 스스로를 찔렀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나님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사정을 소망의 하나님께 간구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아뢰는 것은,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이 처한 고난과 역경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채찍을 맞아 곤고하고 병들어 있지만, 주님만이 자신의 소망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8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제시한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 하는 첫머리에 자신의 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자신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가 남아 있지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으면 많은, 기도가 있다 할지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 1:15절에서,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시기 전에 반드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울퉁불퉁 제 멋대로 생긴 돌들이 쓰임 받기에 합당한 모양으로 다듬어져야 하나님의 성전에 쓰이게 됩니다. 성도가 준비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성도의 품성의 뾰족한 모서리들을 깎아 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이 일이 성도에게는 고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듬어지지 않으면 결코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쓸데없는 타격도 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작업은 자녀들의 행복을 위하여 사랑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파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성도의 모든 고난까지도 영원한 소망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비록 환경이 고난스럽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고난 중에라도 기뻐하며 감사를 잃지 않는 행복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