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가 분명한 인생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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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8-03 13:54
*** 목표가 분명한 인생 / 히브리서 12:1-3
**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 12:1-3(현대어성경) “1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3 만일 여러분이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본문말씀을 읽으면 운동경기장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경기를 보기 위하여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선수들을 응원하는 응원단들과 함성, 최선의 기량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 등.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의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운동 경기에 비유하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격려하십니다.
본문과 그리고 본문과 이어지는 말씀에서 두 가지의 경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육상종목’이며, 또 하나는 4절의 ‘격투기’입니다. 모든 운동 경기가 그러하지만, 경기의 공통점은 ‘끝까지 하는 것’과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경주자의 소망이자 목표’입니다.
인생의 삶 자체가 경주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기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부귀영화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이기는 자가 차지하는 성취감과 기쁨은 모든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로지 정상을 차지하기 위하여 목표를 정하고 바쁘게 살아갑니다. 아이들마저 온갖 배움으로 바쁘게 삽니다. 이 마지막 시대를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4:3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경주의 종목과 경기방법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각기 하나님이 주신 다른 인생을 살지만 모두 일평생을 믿음의 경기를 하는 신앙의 경주자들입니다. 신앙의 경주자는 마지막의 승리를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신앙의 경주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살펴봅시다.
먼저, 경주자는 목표와 목표를 향하는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목표를 세웁니다.
{일반적으로 목적과 목표는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세미한 차이가 있다. 목적(目的)은 내가 어떤 것을 실현하고자 하여 지향하는 일(purpose, objective)을 말하며, 목표(目標)는 어떤 것을 실현하고자 하여 구체적으로 세운 지표 또는 초점(mark)을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목표에 대하여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를 마칠 무렵인 디모데후서 4:7절에서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자신의 목표점에 이르렀음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목표점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염려스러운 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 목표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혹시 말로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그런 의식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군에 있을 때에 상관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흐리멍덩한 병사들에게 “썩은 동태눈깔을 해가지고는 …”이라고 호통을 치곤했습니다. 이는 목적도 목표도 없이 흐느적거리며 산다는 핀잔입니다.
평안도 사람들의 전래 이야기 중에 \"용강의 올꾼이\"라는 익살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평양에 ‘올꾼’이라는 머슴이 있었습니다. 그는 깊이 생각할 줄을 모르고 단순하게 행동할 줄만 아는, 어떻게 보면 선량하고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그를 불러서 \"얘, 내일 아침에 일찍이 ‘용강’에 좀 다녀와야겠다.\"라고 미리 분부해 두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주인이 심부름을 시키려고 ‘올꾼’이를 찾으니,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점심 무렵이 지나서야 올꾼이가 나타났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주인이 \"너 이놈, 오늘 심부름해야 하니 다른 곳에 가지 말라고 어제 미리 일러두었건만 어딜 갔었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올꾼이 퉁명스럽게 하는 말이, \"저, 주인님이 용강갔다 오래서 용강 갔다 왔는 뎁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왜 용강에 갔다 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주인이 갔다 와야 한다기에 그냥 갔다 온 것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올꾼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올꾼이처럼 아무런 목표나 목적도 없이 허우적거리는 인생들 말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즐겁고 편안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얼짱’에, ‘몸짱’에, ‘웰빙’에,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이는 장래가 없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삶의 성격을 운동 경기에 비유하면서 상세하게 교훈합니다. 고린도전서 9:24-27절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강력하게 교훈합니다.
목표는 추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 땅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추상적이면 성도의 생활이 확신 있는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신앙의 경기의 성격은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는 달음질’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이며(요3:16),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급(히11:6)을 얻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 편에서 본 신앙생활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묵상이 절대적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서 읽은 고린도전서 9:26절의 말씀처럼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는.”분명한 경기를 해야 합니다. 즉 목표를 상실한 경기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2절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건너편에 있는 하늘의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이는 목표를 향하는 우리의 자세가 오직 주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다음으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승리하기 위하여 그 경기를 하기에 알맞은 최선의 조건을 준비합니다. 수영 선수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하여 몸에 착 달라붙는 수영모와 수영복을 갖춥니다. 달리기 선수가 치렁거리는 머리를 하거나 펄럭거리는 긴 옷을 입지는 않습니다. 달리기 선수는 영점 일초라도 기록을 앞당기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대한 가볍고 공기 저항을 덜 받는 복장과 자세를 합니다.
믿음의 경주자인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영적으로 경기에 장애가 되는 모든 죄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경기를 막아서는 가장 큰 장애물은 사단의 세력입니다. 사단의 방해를 부르는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신앙의 경주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성도가 지고 있는 인생의 짐입니다. 그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는 습관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즉 날마다 ‘이제는 하지 않아야지’하면서 결심하지만, 곧 다시 범하고 마는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를 말합니다. 이러한 죄는 사단의 방해를 부르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카톨릭의 만연한 죄악의 모습을 보면서 개혁을 단행할 것을 결심했을 때에 사단이 찾아왔습니다. “야, 너 자신을 한 번 봐라. 너 자신도 온통 죄 투성이면서 어떻게 개혁을 하겠다는 말이냐?”라고 루터의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루터는 그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용기를 잃어갔습니다. 그 때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루터는 사단에게 “그래, 나는 온갖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선언하자 사단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죄는 사단에게 우리의 일을 방해하도록 빌미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앞서 보았던 고린도전서 9:25절, 27절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으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홉 가지의 성령의 열매 가운데도 “절제”가 들어있습니다. 이는 성도가 세상에서 자신의 신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경기를 방해하는 어떤 요소가 남아 있습니까?
여러분에게서 죄의 일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응답은 없습니다. 즉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사야 59:2절을 봅시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시편 66:18절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어떤 계획보다도 어떤 기도보다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목표에 이르기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1954년 8월 7일, ‘부리티쉬 콜럼비아’의 ‘벤쿠버’에 있는 경기장에서는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 경기에 참가한 선수 가운데 ‘제임스 헨리 피얼스’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작부터 남들보다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1㎞, 2㎞ 달릴수록 그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습니다. 그는 골 라인이 있는 스타디움이 보이는 코스에서 마침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2위보다 20분이나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중의 갈채를 받으면서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피얼스’의 발걸음은 점점 늦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져 버렸습니다. 동료들은 일어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정신없이 일어나서 몇 발자국 가다가 다시 쓰러졌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또 한번 소리쳐서 격려할 때에 ‘피얼스’는 일어나 다시 몇 걸음 가다가 거꾸러졌습니다. 열두 번 넘어졌다가 열두 번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착각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골 라인’으로 여긴 어떤 줄을 향하여 더듬으면서 쓰러져 결국 자신의 트레이너의 팔에 안기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의 승자는 피얼스보다 20분 후에 운동장으로 들어선 ‘제임스 맥게’라는 ‘스코트랜드’ 청년이 차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발을 잘했고 성장도 꾸준하게 잘 이룹니다. 이제 목표가 거의 눈앞에 보일 무렵에 어떤 시련으로 그만 거꾸러지고 맙니다. 단거리를 달리듯 체력의 안배 없이 너무 달린 것입니다. 즉 성도는 자신의 신앙의 성장에 맞추어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은 아직 어린데 너무 중한 일을 맡으면 시험에 들게 되고 쓰러지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경주자라 할지라도 본성 자체가 약한 인생인지라 마음이 약해지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경기 중에 지칠 때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마치 천문학자가 밤하늘의 별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듯이 ‘깊이 숙고하고 철저히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황제 숭배와 온갖 우상 숭배, 유대주의자들의 핍박까지, 자칫 순수한 신앙을 저버릴 위험성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삶에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깊을 때면, 잠시 머무는 세상의 삶과 영원한 생명의 삶을 깊이 생각하고 손익을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우리 믿음의 경주자들은 관람석을 메운 초만원의 관중들 앞에서 경주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관중들은 본문 앞장에서 믿음으로 삶을 승리한 구름처럼 둘러싼 많은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가 경주를 마친 후에 주님 앞에서 그 경주의 증언자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기장에는 적당주의나 편법이나 요령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열심히 달려서 골라인 앞에서 쓰러졌다할지라도, 골라인을 통과하지 못하면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증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장에는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3절에서 주님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을 읽으면서 결론을 대신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도 인내함으로 끝까지 목표를 향하여 달려서 믿음의 경주장에서 승리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 12:1-3(현대어성경) “1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3 만일 여러분이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본문말씀을 읽으면 운동경기장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경기를 보기 위하여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선수들을 응원하는 응원단들과 함성, 최선의 기량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 등.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의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운동 경기에 비유하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격려하십니다.
본문과 그리고 본문과 이어지는 말씀에서 두 가지의 경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육상종목’이며, 또 하나는 4절의 ‘격투기’입니다. 모든 운동 경기가 그러하지만, 경기의 공통점은 ‘끝까지 하는 것’과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경주자의 소망이자 목표’입니다.
인생의 삶 자체가 경주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기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부귀영화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이기는 자가 차지하는 성취감과 기쁨은 모든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로지 정상을 차지하기 위하여 목표를 정하고 바쁘게 살아갑니다. 아이들마저 온갖 배움으로 바쁘게 삽니다. 이 마지막 시대를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4:3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경주의 종목과 경기방법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각기 하나님이 주신 다른 인생을 살지만 모두 일평생을 믿음의 경기를 하는 신앙의 경주자들입니다. 신앙의 경주자는 마지막의 승리를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신앙의 경주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살펴봅시다.
먼저, 경주자는 목표와 목표를 향하는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목표를 세웁니다.
{일반적으로 목적과 목표는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세미한 차이가 있다. 목적(目的)은 내가 어떤 것을 실현하고자 하여 지향하는 일(purpose, objective)을 말하며, 목표(目標)는 어떤 것을 실현하고자 하여 구체적으로 세운 지표 또는 초점(mark)을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목표에 대하여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를 마칠 무렵인 디모데후서 4:7절에서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자신의 목표점에 이르렀음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목표점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염려스러운 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 목표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혹시 말로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그런 의식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군에 있을 때에 상관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흐리멍덩한 병사들에게 “썩은 동태눈깔을 해가지고는 …”이라고 호통을 치곤했습니다. 이는 목적도 목표도 없이 흐느적거리며 산다는 핀잔입니다.
평안도 사람들의 전래 이야기 중에 \"용강의 올꾼이\"라는 익살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평양에 ‘올꾼’이라는 머슴이 있었습니다. 그는 깊이 생각할 줄을 모르고 단순하게 행동할 줄만 아는, 어떻게 보면 선량하고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그를 불러서 \"얘, 내일 아침에 일찍이 ‘용강’에 좀 다녀와야겠다.\"라고 미리 분부해 두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주인이 심부름을 시키려고 ‘올꾼’이를 찾으니,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점심 무렵이 지나서야 올꾼이가 나타났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주인이 \"너 이놈, 오늘 심부름해야 하니 다른 곳에 가지 말라고 어제 미리 일러두었건만 어딜 갔었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올꾼이 퉁명스럽게 하는 말이, \"저, 주인님이 용강갔다 오래서 용강 갔다 왔는 뎁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왜 용강에 갔다 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주인이 갔다 와야 한다기에 그냥 갔다 온 것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올꾼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올꾼이처럼 아무런 목표나 목적도 없이 허우적거리는 인생들 말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즐겁고 편안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얼짱’에, ‘몸짱’에, ‘웰빙’에,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이는 장래가 없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삶의 성격을 운동 경기에 비유하면서 상세하게 교훈합니다. 고린도전서 9:24-27절을 봅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강력하게 교훈합니다.
목표는 추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 땅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추상적이면 성도의 생활이 확신 있는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신앙의 경기의 성격은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는 달음질’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이며(요3:16),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급(히11:6)을 얻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 편에서 본 신앙생활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묵상이 절대적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서 읽은 고린도전서 9:26절의 말씀처럼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는.”분명한 경기를 해야 합니다. 즉 목표를 상실한 경기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2절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건너편에 있는 하늘의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이는 목표를 향하는 우리의 자세가 오직 주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다음으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승리하기 위하여 그 경기를 하기에 알맞은 최선의 조건을 준비합니다. 수영 선수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하여 몸에 착 달라붙는 수영모와 수영복을 갖춥니다. 달리기 선수가 치렁거리는 머리를 하거나 펄럭거리는 긴 옷을 입지는 않습니다. 달리기 선수는 영점 일초라도 기록을 앞당기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대한 가볍고 공기 저항을 덜 받는 복장과 자세를 합니다.
믿음의 경주자인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영적으로 경기에 장애가 되는 모든 죄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경기를 막아서는 가장 큰 장애물은 사단의 세력입니다. 사단의 방해를 부르는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신앙의 경주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성도가 지고 있는 인생의 짐입니다. 그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는 습관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즉 날마다 ‘이제는 하지 않아야지’하면서 결심하지만, 곧 다시 범하고 마는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를 말합니다. 이러한 죄는 사단의 방해를 부르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카톨릭의 만연한 죄악의 모습을 보면서 개혁을 단행할 것을 결심했을 때에 사단이 찾아왔습니다. “야, 너 자신을 한 번 봐라. 너 자신도 온통 죄 투성이면서 어떻게 개혁을 하겠다는 말이냐?”라고 루터의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루터는 그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용기를 잃어갔습니다. 그 때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루터는 사단에게 “그래, 나는 온갖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선언하자 사단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죄는 사단에게 우리의 일을 방해하도록 빌미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앞서 보았던 고린도전서 9:25절, 27절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으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홉 가지의 성령의 열매 가운데도 “절제”가 들어있습니다. 이는 성도가 세상에서 자신의 신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경기를 방해하는 어떤 요소가 남아 있습니까?
여러분에게서 죄의 일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응답은 없습니다. 즉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이사야 59:2절을 봅시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시편 66:18절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어떤 계획보다도 어떤 기도보다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목표에 이르기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1954년 8월 7일, ‘부리티쉬 콜럼비아’의 ‘벤쿠버’에 있는 경기장에서는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 경기에 참가한 선수 가운데 ‘제임스 헨리 피얼스’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작부터 남들보다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1㎞, 2㎞ 달릴수록 그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습니다. 그는 골 라인이 있는 스타디움이 보이는 코스에서 마침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2위보다 20분이나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중의 갈채를 받으면서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피얼스’의 발걸음은 점점 늦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져 버렸습니다. 동료들은 일어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정신없이 일어나서 몇 발자국 가다가 다시 쓰러졌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또 한번 소리쳐서 격려할 때에 ‘피얼스’는 일어나 다시 몇 걸음 가다가 거꾸러졌습니다. 열두 번 넘어졌다가 열두 번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착각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골 라인’으로 여긴 어떤 줄을 향하여 더듬으면서 쓰러져 결국 자신의 트레이너의 팔에 안기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의 승자는 피얼스보다 20분 후에 운동장으로 들어선 ‘제임스 맥게’라는 ‘스코트랜드’ 청년이 차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발을 잘했고 성장도 꾸준하게 잘 이룹니다. 이제 목표가 거의 눈앞에 보일 무렵에 어떤 시련으로 그만 거꾸러지고 맙니다. 단거리를 달리듯 체력의 안배 없이 너무 달린 것입니다. 즉 성도는 자신의 신앙의 성장에 맞추어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은 아직 어린데 너무 중한 일을 맡으면 시험에 들게 되고 쓰러지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경주자라 할지라도 본성 자체가 약한 인생인지라 마음이 약해지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경기 중에 지칠 때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마치 천문학자가 밤하늘의 별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듯이 ‘깊이 숙고하고 철저히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황제 숭배와 온갖 우상 숭배, 유대주의자들의 핍박까지, 자칫 순수한 신앙을 저버릴 위험성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삶에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깊을 때면, 잠시 머무는 세상의 삶과 영원한 생명의 삶을 깊이 생각하고 손익을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우리 믿음의 경주자들은 관람석을 메운 초만원의 관중들 앞에서 경주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관중들은 본문 앞장에서 믿음으로 삶을 승리한 구름처럼 둘러싼 많은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가 경주를 마친 후에 주님 앞에서 그 경주의 증언자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기장에는 적당주의나 편법이나 요령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열심히 달려서 골라인 앞에서 쓰러졌다할지라도, 골라인을 통과하지 못하면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증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장에는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3절에서 주님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을 읽으면서 결론을 대신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도 인내함으로 끝까지 목표를 향하여 달려서 믿음의 경주장에서 승리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