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복을 주셨음이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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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7-21 17:20
***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음이라. / 역대하 31:1-10
** 들어가는 말
대하 31:1-10, “1 이 모든 일이 마치매 거기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과 단을 제하여 멸하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그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반차를 정하고 각각 그 직임을 행하게 하되 곧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영문에서 섬기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고, 3 또 자기 재산 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 곧 조석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에 쓰게 하고, 4 또 예루살렘에 거한 백성을 명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응식을 주어 저희로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한지라. 5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6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 7 삼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칠월에 마친지라. 8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더미를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니라. 9 히스기야가 그 더미에 대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10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대답하여 가로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보면 무슨 주머니를 불끈 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주머니는 돈주머니이고 쥐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룟 유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패러디(parody)한 그림들을 보면 돈주머니를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앞에 놓인 포도주 잔이 넘어져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잔은 그대로 있는데 가룟 유다의 잔만 넘어져 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돈주머니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돈 때문에 살인강도가 생겨나고, 돈 때문에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가 싸움을 하고 이혼까지 합니다. 돈 때문에 향락에 빠져들고 비리를 저지르게 됩니다. 지금 세상은 사업가도, 정치인도, 공무원도, 법조인도, 교육자도, 모든 서민들도, 마지막 보루인 종교인들까지 온통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사회가 멍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돈이면 다 된다는 듯이 돈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시편 127:1절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만사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돈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 이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있습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29장부터 이어져 오는 히스기야 왕이 단행한 대 개혁의 마지막 부분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하는 장면입니다. 히스기야는 남 유다의 13대 왕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집권한지 6년 만에 하나님께 패역하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당시의 남 유다의 신앙적인 형편도 북이스라엘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집권 초기부터 신앙의 개혁을 시행 했으며, 후에는 전국에 걸친 대대적인 종교개혁으로 단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온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함으로써 유다의 경건성 회복에 힘썼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본장에서 보다 구체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찍어버리고 산당들을 부쉈습니다. 성전 봉사자의 직분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지속적인 유지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신앙의 대 개혁이었습니다. 이 큰 일에 백성들이 기쁨으로 자원하여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으며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역대하30:27절을 봅시다.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높인 결과, 그 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복을 주셨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기쁨으로 드린 예물이 처치 곤란할 정도가 되도록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치 기준은 ‘황금’, 즉 ‘부(富)’이며 부(富)의 척도는 ‘재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절대적인 가치 기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가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는 히스기야 왕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 시대의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미국의 ‘존 록펠러’는 그의 나이 53세에 세계에서 한 사람뿐인 억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탈모’에 몸이 오그라드는 ‘독두병’에 걸려 의사로부터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웃음과 삶의 의미를 잃고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내세에 갖고 갈 것도 못된다는 것을 깨닫고,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여 교회를 세우고 극빈자를 도우며 헌신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웃음을 되찾았고 건강도 회복하여 무려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물질로 영원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반면에 물질 때문에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인간이 결코 살 수 없는 엄청난 영광의 자리를 돈 몇 푼에 팔아버렸습니다. 마치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 부패하지 않은 곳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라의 대통령으로부터 다리 밑의 거지까지 온통 부패했습니다. 한 때 선거철의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시골 노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선거방법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까다로운 선거법 때문에 선거철이 되어도 밥 한 그릇 사겠다고 마을 노인정에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보이는 물질세상이 전부이니 이런 요구도 당연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시대에 신앙의 눈을 뜬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행복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즉, 히스기야는 자신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 기준을 ‘하나님 경외’에 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의 핵심입니다. 종교 개혁과 물질적 풍요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문이 생기십니까? 이제 그 이유를 찾아봅시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은혜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히스기야가 왕권을 잡았을 때에는, 성읍마다 주상이 있었고 아세라 목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산당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리에도 우상의 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우상숭배의 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찾아야 나라가 바로 서며 부강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대하29:6-9절).
인간의 수학은 하나에 하나를 더해야 둘이 되는 것처럼, 재물에 재물을 더해야 부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수학에 있어서는, 재물보다 앞 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3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고, 요한삼서 2절에서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4:17절의 말씀인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선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 때까지 묵인해 두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로마서 1:28절에서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간섭이 따릅니다. 히브리서 12:7절에서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함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예배와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의 회복은 우상을 버리는 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에서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야곱이 형을 피하여 도망하던 시절에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까 20년을 넘도록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35:1-3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합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는 것(관습을 바꾸는 것)은 예배 회복에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우상을 이방 신상이라고 해서 아로새긴 형상을 주로 말했는데, 오늘에 있어서는 정신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행위의 회복은 실제의 삶에서 모든 우상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회복하고는 자신들의 삶의 터로 돌아가기 전에 모든 우상을 제하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삶의 터전에 돌아가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성실하게 예배에 임했습니다. 이들의 순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을 3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7월에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야고보서 1:25절에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바르게 회복된 삶에 하나님께서 재물을 쌓게 하십니다. 잠언 8:20-21절에서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예배를 회복하고 육신적인 의미에서 행위를 회복했다면, 이제는 재물에 대한 인간적인 사용을 정당하게 해야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한 부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웨슬레는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ꡒ여러분! 여러분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버십시오.ꡓ라고 하자 부자는ꡒ아멘ꡓ으로 호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할 수 있는 대로 전부를 저축하십시오.”고 하자 부자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아멘, 아멘”을 연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할 수 있는 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하자 더 이상 부자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땀 흘리고 수고하여 모은 재물을 함부로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것은 아깝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모읍니다. 자신도 호령하면서 편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보아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돈의 흐름을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39:5-6절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전도서 2:26절에서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아시지요? 이 부자는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의 생명이 한없이 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신 근거는 21절에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판결하십니다. 부자의 죄목은 자신의 것도 아닌 재물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재물은 영의 삶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능력대로 잠시 맡겨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청지기들입니다. 각 청지기들이 어떻게 잘 사용했느냐에 대하여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계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재물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주어진다. 하나님의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결코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예배를 회복하고 우리의 행위의 회복합시다. 그리고 주신 재물과 재능과 시간과 생명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당한 사용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 인하여 차고 넘치는 은혜가 평생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대하 31:1-10, “1 이 모든 일이 마치매 거기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과 단을 제하여 멸하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그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반차를 정하고 각각 그 직임을 행하게 하되 곧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영문에서 섬기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고, 3 또 자기 재산 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 곧 조석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에 쓰게 하고, 4 또 예루살렘에 거한 백성을 명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응식을 주어 저희로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한지라. 5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6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 7 삼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칠월에 마친지라. 8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더미를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니라. 9 히스기야가 그 더미에 대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10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대답하여 가로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보면 무슨 주머니를 불끈 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주머니는 돈주머니이고 쥐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룟 유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패러디(parody)한 그림들을 보면 돈주머니를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앞에 놓인 포도주 잔이 넘어져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잔은 그대로 있는데 가룟 유다의 잔만 넘어져 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돈주머니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돈 때문에 살인강도가 생겨나고, 돈 때문에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가 싸움을 하고 이혼까지 합니다. 돈 때문에 향락에 빠져들고 비리를 저지르게 됩니다. 지금 세상은 사업가도, 정치인도, 공무원도, 법조인도, 교육자도, 모든 서민들도, 마지막 보루인 종교인들까지 온통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사회가 멍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돈이면 다 된다는 듯이 돈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시편 127:1절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만사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돈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 이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있습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29장부터 이어져 오는 히스기야 왕이 단행한 대 개혁의 마지막 부분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하는 장면입니다. 히스기야는 남 유다의 13대 왕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집권한지 6년 만에 하나님께 패역하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당시의 남 유다의 신앙적인 형편도 북이스라엘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집권 초기부터 신앙의 개혁을 시행 했으며, 후에는 전국에 걸친 대대적인 종교개혁으로 단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온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함으로써 유다의 경건성 회복에 힘썼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본장에서 보다 구체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찍어버리고 산당들을 부쉈습니다. 성전 봉사자의 직분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책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지속적인 유지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신앙의 대 개혁이었습니다. 이 큰 일에 백성들이 기쁨으로 자원하여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으며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역대하30:27절을 봅시다.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높인 결과, 그 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복을 주셨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기쁨으로 드린 예물이 처치 곤란할 정도가 되도록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치 기준은 ‘황금’, 즉 ‘부(富)’이며 부(富)의 척도는 ‘재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절대적인 가치 기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가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는 히스기야 왕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 시대의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미국의 ‘존 록펠러’는 그의 나이 53세에 세계에서 한 사람뿐인 억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탈모’에 몸이 오그라드는 ‘독두병’에 걸려 의사로부터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웃음과 삶의 의미를 잃고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내세에 갖고 갈 것도 못된다는 것을 깨닫고,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여 교회를 세우고 극빈자를 도우며 헌신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웃음을 되찾았고 건강도 회복하여 무려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물질로 영원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반면에 물질 때문에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인간이 결코 살 수 없는 엄청난 영광의 자리를 돈 몇 푼에 팔아버렸습니다. 마치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 부패하지 않은 곳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라의 대통령으로부터 다리 밑의 거지까지 온통 부패했습니다. 한 때 선거철의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시골 노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선거방법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까다로운 선거법 때문에 선거철이 되어도 밥 한 그릇 사겠다고 마을 노인정에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보이는 물질세상이 전부이니 이런 요구도 당연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시대에 신앙의 눈을 뜬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행복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즉, 히스기야는 자신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 기준을 ‘하나님 경외’에 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의 핵심입니다. 종교 개혁과 물질적 풍요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문이 생기십니까? 이제 그 이유를 찾아봅시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은혜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히스기야가 왕권을 잡았을 때에는, 성읍마다 주상이 있었고 아세라 목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산당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리에도 우상의 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우상숭배의 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찾아야 나라가 바로 서며 부강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대하29:6-9절).
인간의 수학은 하나에 하나를 더해야 둘이 되는 것처럼, 재물에 재물을 더해야 부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수학에 있어서는, 재물보다 앞 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3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고, 요한삼서 2절에서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4:17절의 말씀인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선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 때까지 묵인해 두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로마서 1:28절에서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간섭이 따릅니다. 히브리서 12:7절에서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함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예배와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의 회복은 우상을 버리는 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에서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야곱이 형을 피하여 도망하던 시절에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까 20년을 넘도록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35:1-3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합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는 것(관습을 바꾸는 것)은 예배 회복에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우상을 이방 신상이라고 해서 아로새긴 형상을 주로 말했는데, 오늘에 있어서는 정신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행위의 회복은 실제의 삶에서 모든 우상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회복하고는 자신들의 삶의 터로 돌아가기 전에 모든 우상을 제하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삶의 터전에 돌아가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성실하게 예배에 임했습니다. 이들의 순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을 3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7월에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야고보서 1:25절에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바르게 회복된 삶에 하나님께서 재물을 쌓게 하십니다. 잠언 8:20-21절에서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예배를 회복하고 육신적인 의미에서 행위를 회복했다면, 이제는 재물에 대한 인간적인 사용을 정당하게 해야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한 부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웨슬레는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ꡒ여러분! 여러분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버십시오.ꡓ라고 하자 부자는ꡒ아멘ꡓ으로 호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할 수 있는 대로 전부를 저축하십시오.”고 하자 부자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아멘, 아멘”을 연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할 수 있는 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하자 더 이상 부자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땀 흘리고 수고하여 모은 재물을 함부로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것은 아깝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모읍니다. 자신도 호령하면서 편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보아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돈의 흐름을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39:5-6절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전도서 2:26절에서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아시지요? 이 부자는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의 생명이 한없이 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신 근거는 21절에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판결하십니다. 부자의 죄목은 자신의 것도 아닌 재물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재물은 영의 삶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능력대로 잠시 맡겨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청지기들입니다. 각 청지기들이 어떻게 잘 사용했느냐에 대하여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계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재물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주어진다. 하나님의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결코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예배를 회복하고 우리의 행위의 회복합시다. 그리고 주신 재물과 재능과 시간과 생명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당한 사용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 인하여 차고 넘치는 은혜가 평생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