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있는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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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1-15 23:12
*** 목적 있는 삶 / 요일 2:12-17
** 들어가는 말
요일 2:12-17,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일찍이 역사 속의 철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라는 질문들을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목적에 대한 인간의 고민’들은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아무런 목적 없이 산다면 영혼 없는 짐승들의 생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안드레이 비토프(Andrei Bitov)는 무신론적인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생의 뚜렷한 목적을 느끼지 못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방황하던 어느 날, 생의 큰 변화를 가져올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는 그 날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나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레르부르크)에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너무나도 절망하여 그 순간 삶이 멈춰버릴 것 같았고, 나의 미래는 통째로 없어질 것 같았다. 삶의 의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하나님 없이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Without God life makes no sense).' 나는 그 구절을 계속 되새기며, 그 구절을 계단삼아 절망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되었다.”
삶의 목적은 분명히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분명한 목적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43:21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하여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성도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부모의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습과 환경과 심지어 우리의 모든 신체적인 조건까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하여’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현대어성경) “선생님,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었습니까? 그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전혀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사람은 고귀하고 위대한 본래의 목적을 잃어갔습니다. 목적을 잃어버린 인생은 허무함과 절망감으로 고뇌했으며, 그 허전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육신의 욕망들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쾌락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부귀영화를 추구하고, 자식에 대한 희망을 쫓기도 합니다. 온갖 세상의 것들로 마음의 우상을 삼아 자신의 절망적이고 허무한 삶을 보상받아 보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본문 말씀에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잠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까?
1. 무엇보다 먼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5: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라고 자신의 삶의 목적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15-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라고 자신을 택하신 목적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삶의 목적을 알았겠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 적어도 3-40년을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 살았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십수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교가 자신의 열정을 쏟을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의 목적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지나간 인류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아니면 잘못된 목적을 향해 방황하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육체의 조건, 어떤 이들은 태어난 환경, 어떤 이들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며, 자포자기 하고, 엉뚱한 욕망으로 자신을 채우며 소중한 생명을 무의미하게 보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철저하신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육체적인 조건과 삶의 모든 환경과 여건에 대한 불평과 원망은 그것을 계획하신 하나님께 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139:15-16절을 봅시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공동번역,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이 삶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방금 읽은 시편의 말씀 속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즉 나의 출생과 출생의 환경과 인종과 나라와 지역과 육체적인 조건과 매일의 삶과 죽음까지 알고 계시며, 그 길을 계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답은 하나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들을 동경하며 억지로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과정에서 욕망이 발동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다 잘하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따라서 각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환경을 주십니다. 다윗 왕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억지로 자기 아내로 삼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삼하 12:8) 또한 자신의 고통스러운 고질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최선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환경이 주어져 있습니까? 육체의 생김새나 건강에 대하여 불만입니까?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업장에 대하여 불만이 있습니까? 어려운 생활이 불만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그 환경 속에 있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노아도 욥도 다윗도 다니엘도 바울도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에게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것이 이룰 때까지 온갖 고통과 어려운 시험과 고난의 환경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마침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고난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한다고 우리의 환경이 바뀝니까? 우리는 머리카락 한 올도 희거나 검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며, 빌립보서 4:6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2.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4:20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이 곧 실천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삶의 환경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찾고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삼읍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므로 사랑하지 말고, 목적으로 삼지도 말고,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따라야 할 대상을 본문 12-14절에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라는 호칭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입니다.
오래 전에 교육전도사로 교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입니다. 고3 학생들 때문에 의견이 대립되어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장로님이 아들 중에 고3이 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 해 초에 당회에서 결정하기를
‘고3 학생들은 학생모임에 참석하지 말고 주일 낮 예배만 참석하고 주일에도 공부를 하라.’
고 했습니다. 저는 그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역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해에 학생회에는 고 3 학생들이 11 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주일성수는 인생에서 가장 우선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공부를 통하여 세상에서의 맡겨진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주일에는 학생 예배와 맡겨진 일과 봉사의 일을 성실하게 하고, 평일에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에도 최선을 다하라.”
고 했습니다. 결국 장로님의 아들 둘은 학생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9명은 토요일 성경곰부부터 주일의 학생 예배와 낮 예배, 저녁 예배까지 성실하게 참여했습니다. 그 해에는 9명 모두가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공부하는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에 두고 있다면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고 공부가 따로 있다는 사고방식에 빠져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최선을 다 했지만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준비해 두셨을 것입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장도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뜻에 순종하는 일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 곧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만 하고 하나님의 뜻만 따라가다가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염려가 되십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고 계시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삶의 목적으로만 삼는다면 우리의 길은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자신의 생각대로 산다면 가룟 유다처럼 비참한 결말만 기다릴 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2:13-14절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대복의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대변혁을 이루어봅시다. 내게 주어진 삶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말고,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살지도 말고,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소망하면서 열정을 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그리하여 하루하루의 삶이 주님이 이루시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는 가정과 교회를 이루어 갑시다.
** 들어가는 말
요일 2:12-17,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일찍이 역사 속의 철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라는 질문들을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목적에 대한 인간의 고민’들은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아무런 목적 없이 산다면 영혼 없는 짐승들의 생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안드레이 비토프(Andrei Bitov)는 무신론적인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생의 뚜렷한 목적을 느끼지 못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방황하던 어느 날, 생의 큰 변화를 가져올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는 그 날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나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레르부르크)에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너무나도 절망하여 그 순간 삶이 멈춰버릴 것 같았고, 나의 미래는 통째로 없어질 것 같았다. 삶의 의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하나님 없이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Without God life makes no sense).' 나는 그 구절을 계속 되새기며, 그 구절을 계단삼아 절망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되었다.”
삶의 목적은 분명히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분명한 목적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43:21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하여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성도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부모의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습과 환경과 심지어 우리의 모든 신체적인 조건까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하여’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현대어성경) “선생님,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었습니까? 그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전혀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사람은 고귀하고 위대한 본래의 목적을 잃어갔습니다. 목적을 잃어버린 인생은 허무함과 절망감으로 고뇌했으며, 그 허전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육신의 욕망들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쾌락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부귀영화를 추구하고, 자식에 대한 희망을 쫓기도 합니다. 온갖 세상의 것들로 마음의 우상을 삼아 자신의 절망적이고 허무한 삶을 보상받아 보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본문 말씀에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잠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까?
1. 무엇보다 먼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5: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라고 자신의 삶의 목적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15-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라고 자신을 택하신 목적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삶의 목적을 알았겠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 적어도 3-40년을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 살았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십수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교가 자신의 열정을 쏟을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의 목적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지나간 인류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아니면 잘못된 목적을 향해 방황하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육체의 조건, 어떤 이들은 태어난 환경, 어떤 이들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며, 자포자기 하고, 엉뚱한 욕망으로 자신을 채우며 소중한 생명을 무의미하게 보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철저하신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육체적인 조건과 삶의 모든 환경과 여건에 대한 불평과 원망은 그것을 계획하신 하나님께 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139:15-16절을 봅시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공동번역,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이 삶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방금 읽은 시편의 말씀 속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즉 나의 출생과 출생의 환경과 인종과 나라와 지역과 육체적인 조건과 매일의 삶과 죽음까지 알고 계시며, 그 길을 계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답은 하나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들을 동경하며 억지로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과정에서 욕망이 발동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다 잘하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따라서 각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환경을 주십니다. 다윗 왕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억지로 자기 아내로 삼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삼하 12:8) 또한 자신의 고통스러운 고질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최선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환경이 주어져 있습니까? 육체의 생김새나 건강에 대하여 불만입니까?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업장에 대하여 불만이 있습니까? 어려운 생활이 불만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그 환경 속에 있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노아도 욥도 다윗도 다니엘도 바울도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에게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것이 이룰 때까지 온갖 고통과 어려운 시험과 고난의 환경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마침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고난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한다고 우리의 환경이 바뀝니까? 우리는 머리카락 한 올도 희거나 검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며, 빌립보서 4:6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2.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4:20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이 곧 실천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삶의 환경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찾고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삼읍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므로 사랑하지 말고, 목적으로 삼지도 말고,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따라야 할 대상을 본문 12-14절에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라는 호칭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입니다.
오래 전에 교육전도사로 교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입니다. 고3 학생들 때문에 의견이 대립되어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장로님이 아들 중에 고3이 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 해 초에 당회에서 결정하기를
‘고3 학생들은 학생모임에 참석하지 말고 주일 낮 예배만 참석하고 주일에도 공부를 하라.’
고 했습니다. 저는 그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역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해에 학생회에는 고 3 학생들이 11 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주일성수는 인생에서 가장 우선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공부를 통하여 세상에서의 맡겨진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주일에는 학생 예배와 맡겨진 일과 봉사의 일을 성실하게 하고, 평일에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에도 최선을 다하라.”
고 했습니다. 결국 장로님의 아들 둘은 학생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9명은 토요일 성경곰부부터 주일의 학생 예배와 낮 예배, 저녁 예배까지 성실하게 참여했습니다. 그 해에는 9명 모두가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공부하는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에 두고 있다면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고 공부가 따로 있다는 사고방식에 빠져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최선을 다 했지만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준비해 두셨을 것입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장도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뜻에 순종하는 일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 곧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만 하고 하나님의 뜻만 따라가다가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염려가 되십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고 계시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삶의 목적으로만 삼는다면 우리의 길은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자신의 생각대로 산다면 가룟 유다처럼 비참한 결말만 기다릴 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2:13-14절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대복의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대변혁을 이루어봅시다. 내게 주어진 삶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말고,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살지도 말고,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소망하면서 열정을 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그리하여 하루하루의 삶이 주님이 이루시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는 가정과 교회를 이루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