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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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1-12 21:05
***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 눅 2:25-35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25-35,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대강절 세 번째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대강절의 인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시므온’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사야 시대로부터 예언되어 온 Messiah를 기다린다는 표현입니다. 특히 시므온은 종교적인 암흑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삶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말라기 3:16절을 봅시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높이고 의지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환경과 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시므온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소망하며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인내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신앙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세에 이루어질 현상을 말씀하시면서 “인내로 영혼을 얻을 것이라.”(눅 21:19)고 하셨습니다. 남다른 인내력으로 무엇을 오래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절대로 평범한 인격의 소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한다는 것은 순리대로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는 그의 소설 속에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Roma no fue construida en un dia).’고 했습니다.
위대한 로마제국이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졌겠습니까? 우리에게 큰 문제는 ‘조급함’입니다. 오죽하면 우리의 속담에서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다.’고 했겠습니까? 구, 소련의 경제 공황 때, ‘100세가 된 노파가 우유 한 병을 사기 위하여 두 주일을 나와서 줄을 섰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바보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취해야 할 본연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조급한 성도들은 아침에 기도하고 저녁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조급증은 항상 문제를 악화시키는 최대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참고 기다리지 못한 잘못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아왔는지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을 봅시다. 사무엘상 13:8-9절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 이어서 13-14절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하나님께 성품을 인정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왕이 된지 불과 2년이 되었을 때에 이와 같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지 못한 불신앙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다리지 못한 조급함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엄청났습니다. 왕위를 빼앗긴 것입니다. 물론 40년이 통치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을 떠난 고통스럽고 두려움에 싸인 통치였으며, 결국에는 온 가정이 멸망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은 대단한 인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함으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의 신분이나 출신에 대한 이야기는 본문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그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사람의 신분이나 출신,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있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관심사는 업적이나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주님과의 바른 관계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므온의 간절한 기다림에 응답하셨습니다.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에게 성령은 항상 머물러 계시고, 또 그 약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지금도 이 약속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약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6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본문 26-27절을 봅시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율법이 정한대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때,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는 시므온의 삶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의 당시에는 아직 400년을 이어오는 영적인 암흑으로 가득한 때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고, 환상이나 이상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항상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신앙은 시대적인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숨어 계셨겠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혀 표현도 않으시고 나타내지도 않으셨습니까? 이사야 59:1-3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졌던 것입니다.
사람의 죄악이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말씀 두 곳을 보겠습니다. 시편 121: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시며 이사야 30:18-19절에서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오늘도 말입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본문 28-35절을 봅시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은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루어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므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님께서 하실 사역과 마리아의 아픔까지도 예언했습니다. 즉 시므온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헌신된 자들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있는 낡은 교회 마당에 두 손을 활짝 편 예수님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폭탄이 그 마을 가까이에 떨어져서 그 조각상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적군이 물러가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아끼던 그 조각상의 조각들을 찾아서 다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 조각상은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몹시도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붙여 만든 상처투성이의 몸체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각상의 양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이 없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렇게 한탄했습니다. \"상처투성이 손이라도 괜찮다. 하지만 손이 없어서야 어떻게 주님이라고 하겠는가? 결국 새로 조각상을 세우는 도리밖에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 제안이 기꺼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제안은 조각상의 받침대에 \"나에겐 손이 없지만 당신들에게는 손이 있도다.\"라고 쓴 놋쇠 판을 붙인 것이었습니다.
수년 후, 어떤 사람이 놋 비문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짧은 시가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내겐 손이 없으나 오늘 내 일을 행할 너희의 손이 있도다. 내겐 발이 없으나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너희의 발이 있도다. 내겐 입이 없으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 너희의 입이 있도다. 내겐 아무런 도움이 없으나 사람들을 하나님 편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너희의 도움이 있도다.’
오늘 우리를 부르심도 도구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진정한 믿음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하나님의 위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신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의 위로로써 오늘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며 복된 생명의 소식을 전합시다.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환경이 여의치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헌신된 삶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복된 삶을 이 성탄의 계절에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25-35,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대강절 세 번째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대강절의 인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시므온’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사야 시대로부터 예언되어 온 Messiah를 기다린다는 표현입니다. 특히 시므온은 종교적인 암흑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삶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말라기 3:16절을 봅시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높이고 의지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환경과 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시므온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소망하며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인내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신앙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세에 이루어질 현상을 말씀하시면서 “인내로 영혼을 얻을 것이라.”(눅 21:19)고 하셨습니다. 남다른 인내력으로 무엇을 오래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절대로 평범한 인격의 소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한다는 것은 순리대로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는 그의 소설 속에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Roma no fue construida en un dia).’고 했습니다.
위대한 로마제국이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졌겠습니까? 우리에게 큰 문제는 ‘조급함’입니다. 오죽하면 우리의 속담에서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다.’고 했겠습니까? 구, 소련의 경제 공황 때, ‘100세가 된 노파가 우유 한 병을 사기 위하여 두 주일을 나와서 줄을 섰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바보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취해야 할 본연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조급한 성도들은 아침에 기도하고 저녁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조급증은 항상 문제를 악화시키는 최대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참고 기다리지 못한 잘못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아왔는지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을 봅시다. 사무엘상 13:8-9절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 이어서 13-14절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하나님께 성품을 인정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왕이 된지 불과 2년이 되었을 때에 이와 같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지 못한 불신앙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다리지 못한 조급함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엄청났습니다. 왕위를 빼앗긴 것입니다. 물론 40년이 통치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을 떠난 고통스럽고 두려움에 싸인 통치였으며, 결국에는 온 가정이 멸망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은 대단한 인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함으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의 신분이나 출신에 대한 이야기는 본문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그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사람의 신분이나 출신,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있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관심사는 업적이나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주님과의 바른 관계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므온의 간절한 기다림에 응답하셨습니다.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에게 성령은 항상 머물러 계시고, 또 그 약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지금도 이 약속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약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6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본문 26-27절을 봅시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율법이 정한대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때,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는 시므온의 삶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의 당시에는 아직 400년을 이어오는 영적인 암흑으로 가득한 때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고, 환상이나 이상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항상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신앙은 시대적인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숨어 계셨겠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혀 표현도 않으시고 나타내지도 않으셨습니까? 이사야 59:1-3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졌던 것입니다.
사람의 죄악이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말씀 두 곳을 보겠습니다. 시편 121: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시며 이사야 30:18-19절에서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오늘도 말입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본문 28-35절을 봅시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은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루어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므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님께서 하실 사역과 마리아의 아픔까지도 예언했습니다. 즉 시므온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헌신된 자들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있는 낡은 교회 마당에 두 손을 활짝 편 예수님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폭탄이 그 마을 가까이에 떨어져서 그 조각상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적군이 물러가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아끼던 그 조각상의 조각들을 찾아서 다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 조각상은 마을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몹시도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붙여 만든 상처투성이의 몸체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각상의 양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이 없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렇게 한탄했습니다. \"상처투성이 손이라도 괜찮다. 하지만 손이 없어서야 어떻게 주님이라고 하겠는가? 결국 새로 조각상을 세우는 도리밖에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 제안이 기꺼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제안은 조각상의 받침대에 \"나에겐 손이 없지만 당신들에게는 손이 있도다.\"라고 쓴 놋쇠 판을 붙인 것이었습니다.
수년 후, 어떤 사람이 놋 비문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짧은 시가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내겐 손이 없으나 오늘 내 일을 행할 너희의 손이 있도다. 내겐 발이 없으나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너희의 발이 있도다. 내겐 입이 없으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 너희의 입이 있도다. 내겐 아무런 도움이 없으나 사람들을 하나님 편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너희의 도움이 있도다.’
오늘 우리를 부르심도 도구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진정한 믿음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하나님의 위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신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의 위로로써 오늘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며 복된 생명의 소식을 전합시다.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환경이 여의치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헌신된 삶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복된 삶을 이 성탄의 계절에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