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예수님을 통하는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201회 작성일 2005-12-05 09:53
*** 예수님을 통하는 길 / 요한복음 14:6-14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4:6-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처럼, 어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길이 여러 갈래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목적지는 오직 한 길을 통하여서만 이를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콩고에서 사역한 ‘스티븐슨’ 선교사의 수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티븐슨 선교사는 콩고의 정글 한복판에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짓고 살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뜻밖에도 백인 청년 두 사람이 선교사의 오두막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비바람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면서,
“저희들은 진스 강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강으로 가는 길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는,
“유감스럽게도 이 정글에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놀란 청년들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라고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당신들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인도하여 온갖 식물들로 뒤덮여 있는 정글을 헤쳐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길을 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 대강절 두 번째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길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중에 도마로부터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빌립이 요청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 되심을 설명하시면서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곧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는 더욱 까마득히 먼 상상의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거의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자세로 지내곤 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다가가려는 시도조차 잘 하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길에 대하여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습관적으로 성탄절의 분위기를 즐길 뿐입니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숲 지방에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사람들에게 입에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뵈러 베들레헴으로 간 네 목동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목동은 달걀을, 한 목동은 빵과 치즈를, 세 번째 목동은 포도주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목동은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네 번째 목동을 ‘앙샹떼(매혹 당했다.)’라고 불렀습니다.
세 목동은 마리아와 요셉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을 축하하고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런데 앙샹떼는 어디 간 거지?” 그들은 이리 저리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바람막이로 쳐놓은 담요를 슬쩍 젖히고 구유가 있는 곳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 구유 앞에 앙샹떼가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내내 그렇게 경배하며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예수, 예수, 예수 … 예수, 예수, 예수”
앙샹떼는 예수님께 매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생각하는 진정한 성탄절을 맞이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매혹당하는 진정한 성탄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 매혹당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 예수님처럼 되는 길을 ‘기도’라고 가르치십니다. 본문 13-14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여러분은 하루에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아마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는 가운데 부담스러운 것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기도와 성경 읽는 것 등 몇 가지가 될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또는 ‘기도를 쉬는 것은 죄다’ 등등.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성경말씀을 통하여 끊임없이 강조하시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연중에 ‘기도’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새벽에 일어나기가 너무 피곤하여 새벽 기도를 빠진다거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서 피곤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기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반면에 제 시간에 기도를 했을 때는 의무를 수행했다는 안도감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부담스럽지 않는 기도로 신선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신선하게 주님과 동행하려면 마음의 생각과 생활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의 율법적인 의식에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게 제물을 드려서 예배를 하고, 길도 분명히 보여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법, 이럴 때는 이렇게 해라 등, 율법적 형식의 감각에 의존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자신들이 만든 종교의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9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도다.”라고 하시며 이어 13절에서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율법적인 신앙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형식적인 신앙의 틀을 고집합니다. 별로 마음에도 없는 수식어들을 사용하는 기도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상투적인 찬양, 기쁨도 감격도 없는 의식적인 예배 등. 오죽하셨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고 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로 이르는 통로가 되심을 믿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나 말씀을 읽는 것이나 봉사하고 섬기는 것, 예배하는 것,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나 말씀, 예배, 섬김, 봉사, 어떤 것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장엄하고 화려하고 잘 준비된 예배의 요소를 갖추었다고 해도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 형식이 갖추어지지 못한 예배, 유창하지 못한 기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향하는 진실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섬김이 됩니다.

오늘 이 나라에 유행처럼 번지는 크고 화려한 예배당, 잘 짜여진 멀티미디어 예배, 교양이 넘쳐흐르는 듯한 성도들, 수많은 프로그램들, 세상과의 조화된 교회. 이러한 것이 마치 하나님을 잘 섬기는 듯이 생각되는 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문둥병자, 소경, 창녀, 가난한 자, 노예들 등. 이들은 하나님의 전에 얼씬거리지도 못했습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던 사람들은 이들을 향하여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형식에 매여 외식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내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신앙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큰일을 행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능력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복하는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성경이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으며, 본문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진정한 관심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더 많은 관심을 두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에서 주님과의 공유면적을 넓혀가야 합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구체적인 생활의 일들이 많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배들의 항로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내륙에 뱃길을 열어놓은 것이 ‘운하’입니다. 운하 중에는 바다와 수면의 높이가 다른 곳이 있습니다. 수면의 높이가 다르면 배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운하와 바다의 수면을 맞추기 위하여 바다와 운하 사이에 큰 도크를 만들고 수문을 만듭니다. 수면이 낮은 쪽에서 배가 도크로 들어옵니다. 배가 완전히 들어오면 낮은 쪽의 수문을 닫고 수면이 높은 쪽의 수문을 조금씩 열어서 도크와 수면이 같아지게 합니다. 수면이 같아지면 수문을 완전히 열고 배가 운하로 전진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영적인 수면(관심)의 차이가 생기면 제자로서의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먹고, 자고, 일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 능력을 행하는 것 등 모든 체험을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과 제자들과의 영적인 공유면적을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더디 깨닫는 제자들의 영적인 공유면적을 넓히기 위하여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까지 본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신과 더불어 영의 생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영의 생활이 육신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영의 생활은 결코 나 홀로는 해 나갈 수 없습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영의 생활이 가능해집니다. 즉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어떤 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되면 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의 일들이 기쁨이 있고 감격이 넘쳐서 자원하는 섬김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가집시다. 그리하여 본문의 말씀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복된 삶을 이 대강절에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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