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맞이하는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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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12-02 22:42
***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 / 눅 10:38-42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0:38-42 (현대어성경) “38 예수께서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길에 한 마을에 들어갔는데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들였다. 39 그 여자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는데 마리아는 마루에 앉아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자 식사를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던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 41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 너는 여러 가지 일에 너무 얽매여 걱정하고 있구나. 42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다.”
오늘부터 2005년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대강절(待降節, Advent)은 성탄 전 4주간으로, 그 의미는 ‘오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오심’에는 ‘오셨음’, ‘오심’, ‘오실 것’ 이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셨음’은 첫 번 성탄절에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말하며, ‘오심’은 현재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우리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며, ‘오실 것’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옛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던, 지금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즉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던 삶의 자리를 기꺼이 예수님께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삶의 방식이 예수님의 방식으로 바뀌게 됨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대강절을 통하여 내 삶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인지를 돌아보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에 소홀함이 없도록 삶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대강절의 의미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아프리카’가 떠오르고, ‘희생’, ‘평화’라는 말들이 떠오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누가복음 16장을 읽다가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에서, '부자는 백인이요, 나사로는 흑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하여, 흑인들에게 온갖 못할 짓을 한 백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90평생 흑인들의 고름주머니를 만지며 봉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행가 ‘김찬삼’ 씨가 아프리카에서 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일주일 동안 사랑의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김찬삼 씨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더니,
\"바지가 몹시 낡았구려! 괜찮으시다면 제 바지를 드릴 테니 갈아입으시지요.\"
하며 자신의 바지를 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찬삼 씨는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찬삼 씨가 그곳을 떠날 때 슈바이처 박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시오!\"
그리고 떠나는 김찬삼 씨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류에게 평화를! 인류에게 사랑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내적인 평화는 자기희생으로 이어집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미개지인 아프리카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희생을 통하여 그 땅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참된 평화는 내적인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때에 이루어집니다. 이 평화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평화를 소유한 사람과 전혀 평화롭지 못한 마음의 소유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작은 마을 베다니를 방문하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의 영접을 받으셨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음식 준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여러 가지 일에 너무 얽매여 걱정하고 있구나.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그렇겠지요. 또한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교회나 사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소홀하게 여기고, 오로지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일에만 열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중요성의 우선순위’입니다. 개역성경에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라고 번역한 대로 예수님은 육신적인 일보다는 영적인 일이 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특히 이 시점에서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우선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42절에서 “택하였으니(ejxelevxato)”라는 단어는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그녀 자신을 위하여 선택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르다처럼 우선순위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 하면서 행하는 구제, 사회봉사, 전도, 심지어 예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닌, 교회의 만족 혹은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의 이름이나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가정의 일이나, 자녀양육의 일, 직장에서의 일이나, 사업장에서의 일이나, 모든 일의 경영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모든 목적이 주님의 뜻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의 뜻이 이것입니다. 만일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는 진정한 기쁨과 헌신이 있었다면 결코 불평하거나 동생을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의 말씀도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러므로 내가 주님의 백성이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식을 들어봅시다.
먼저 마가복음 7:10-13절입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7:21-23절에서는 (현대어성경)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위대한 일들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마음으로 의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미가서 6:8절을 봅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을 ‘구약의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또는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고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을 읽고 듣는 것과 전도하고 봉사하고 예배하는 이런 일을 열심히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때로는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여 죄책감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는 인정을 받으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혼자 분주하며 힘들어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을 믿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환경이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따른다할지라도 영혼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기쁨과 평안이 억지로 만들어 내거나 돈으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주님을 내 영혼의 주인으로 맞이할 때 주어지는 복입니다.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책을 쓴 ‘후안까를로스 오르띠즈’목사는 그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수년 전에 내 아들 녀석이 돈이 많이 드는 사립대학에 가려고 조르던 때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학교는 아주 좋은 기독교 학교였지만 등록금이 무척이나 비쌌습니다. 나의 아내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습니다.
“네가 그런 학교에 다닐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 돼.”
우리에게는 아들을 그 학교에 보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그 문제로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못해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이가 그 학교에 갈 수 없다는 거요.”
“하지만 여보, 저 애는 그 학교에 무척이나 가고 싶어 한단 말이에요.”
“그럼 둘째로, 우리의 피아노를 파는 방법이 있소.”
“안돼요, 그것은 우리 가족의 공동 소유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내가 제안한 모든 것을 아내는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염려하는 것일까요? 아내는 계속해서 걱정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대출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그 빚을 갚을거냐?’고 근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출을 받았고, 4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빚을 갚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빚을 갚느라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우리 가정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카를로스 목사님은 덧붙였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계속 염려에 빠져들게 되면 아무것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도가 근심한다는 것은 아무런 유익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염려와 근심과 불평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결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다는 것은 매일 매일을 최선을 다하여 선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서 미래를 주님께 맡기고 주어지는 환경과 생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에서부터 찾아내시고, 품에 안으시며 우리의 약점까지도 모두 떠맡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 주님을 맞이했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기쁨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후회 없이 맞이하도록 영의 일에 우선권을 두어 주님의 일에 열심을 다합시다. 더 이상 잘할 수 없는 최선의 삶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며 예수님을 따르는 복된 대강절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0:38-42 (현대어성경) “38 예수께서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길에 한 마을에 들어갔는데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들였다. 39 그 여자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는데 마리아는 마루에 앉아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자 식사를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던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 41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 너는 여러 가지 일에 너무 얽매여 걱정하고 있구나. 42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다.”
오늘부터 2005년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대강절(待降節, Advent)은 성탄 전 4주간으로, 그 의미는 ‘오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오심’에는 ‘오셨음’, ‘오심’, ‘오실 것’ 이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셨음’은 첫 번 성탄절에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말하며, ‘오심’은 현재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우리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며, ‘오실 것’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옛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던, 지금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즉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던 삶의 자리를 기꺼이 예수님께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삶의 방식이 예수님의 방식으로 바뀌게 됨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대강절을 통하여 내 삶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인지를 돌아보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에 소홀함이 없도록 삶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대강절의 의미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아프리카’가 떠오르고, ‘희생’, ‘평화’라는 말들이 떠오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누가복음 16장을 읽다가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에서, '부자는 백인이요, 나사로는 흑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하여, 흑인들에게 온갖 못할 짓을 한 백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90평생 흑인들의 고름주머니를 만지며 봉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행가 ‘김찬삼’ 씨가 아프리카에서 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일주일 동안 사랑의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김찬삼 씨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더니,
\"바지가 몹시 낡았구려! 괜찮으시다면 제 바지를 드릴 테니 갈아입으시지요.\"
하며 자신의 바지를 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찬삼 씨는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찬삼 씨가 그곳을 떠날 때 슈바이처 박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시오!\"
그리고 떠나는 김찬삼 씨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류에게 평화를! 인류에게 사랑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내적인 평화는 자기희생으로 이어집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미개지인 아프리카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희생을 통하여 그 땅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참된 평화는 내적인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때에 이루어집니다. 이 평화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평화를 소유한 사람과 전혀 평화롭지 못한 마음의 소유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작은 마을 베다니를 방문하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의 영접을 받으셨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음식 준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여러 가지 일에 너무 얽매여 걱정하고 있구나.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그렇겠지요. 또한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교회나 사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소홀하게 여기고, 오로지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일에만 열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중요성의 우선순위’입니다. 개역성경에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라고 번역한 대로 예수님은 육신적인 일보다는 영적인 일이 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특히 이 시점에서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우선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42절에서 “택하였으니(ejxelevxato)”라는 단어는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그녀 자신을 위하여 선택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르다처럼 우선순위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 하면서 행하는 구제, 사회봉사, 전도, 심지어 예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닌, 교회의 만족 혹은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의 이름이나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가정의 일이나, 자녀양육의 일, 직장에서의 일이나, 사업장에서의 일이나, 모든 일의 경영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모든 목적이 주님의 뜻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의 뜻이 이것입니다. 만일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는 진정한 기쁨과 헌신이 있었다면 결코 불평하거나 동생을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의 말씀도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러므로 내가 주님의 백성이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식을 들어봅시다.
먼저 마가복음 7:10-13절입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7:21-23절에서는 (현대어성경)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위대한 일들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마음으로 의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미가서 6:8절을 봅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을 ‘구약의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또는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고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을 읽고 듣는 것과 전도하고 봉사하고 예배하는 이런 일을 열심히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때로는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여 죄책감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는 인정을 받으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혼자 분주하며 힘들어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을 믿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환경이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따른다할지라도 영혼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기쁨과 평안이 억지로 만들어 내거나 돈으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주님을 내 영혼의 주인으로 맞이할 때 주어지는 복입니다.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책을 쓴 ‘후안까를로스 오르띠즈’목사는 그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수년 전에 내 아들 녀석이 돈이 많이 드는 사립대학에 가려고 조르던 때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학교는 아주 좋은 기독교 학교였지만 등록금이 무척이나 비쌌습니다. 나의 아내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습니다.
“네가 그런 학교에 다닐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 돼.”
우리에게는 아들을 그 학교에 보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그 문제로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못해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이가 그 학교에 갈 수 없다는 거요.”
“하지만 여보, 저 애는 그 학교에 무척이나 가고 싶어 한단 말이에요.”
“그럼 둘째로, 우리의 피아노를 파는 방법이 있소.”
“안돼요, 그것은 우리 가족의 공동 소유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내가 제안한 모든 것을 아내는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염려하는 것일까요? 아내는 계속해서 걱정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대출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그 빚을 갚을거냐?’고 근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출을 받았고, 4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빚을 갚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빚을 갚느라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우리 가정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카를로스 목사님은 덧붙였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계속 염려에 빠져들게 되면 아무것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도가 근심한다는 것은 아무런 유익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염려와 근심과 불평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결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다는 것은 매일 매일을 최선을 다하여 선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서 미래를 주님께 맡기고 주어지는 환경과 생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에서부터 찾아내시고, 품에 안으시며 우리의 약점까지도 모두 떠맡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 주님을 맞이했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기쁨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후회 없이 맞이하도록 영의 일에 우선권을 두어 주님의 일에 열심을 다합시다. 더 이상 잘할 수 없는 최선의 삶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며 예수님을 따르는 복된 대강절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