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향기로 드리는 감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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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12-02 22:39
*** 사랑의 향기로 드리는 감사 / 눅7:30-50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부잣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난초를 무척 아꼈습니다. 어느 날 그 난초 사이에 두꺼비가 한 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주인이 나와서 난초에 물을 주면서 잎을 닦아주고 쓰다듬기도 하며, ‘아름답다.’ ‘잘 자라라.’ 등. 애지중지 하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두꺼비는 너무 부러운 나머지 난초에게 말합니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먹으려고 쫓아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꾸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이 그렇게 곱게 길러 주고 사랑해 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
그 말을 들은 난초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발이 없으니 목이 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소가 와서 나를 뜯어 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잖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가서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는 도망도 갈 수 있지 않니?”
그 말을 들은 두꺼비는 비로소 자기에게는 난초에게는 없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 옛 말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을 표현한 말이겠지요.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보다 못한 것에는 질투를 느끼고 욕심을 내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욕망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 가치를 알지 못하면 활용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만족하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종말의 세대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디모데후서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사람이 자기중심적이 되면 사물을 보는 눈과 깨닫는 마음이 좁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각자가 개성이 있고, 자신만의 가치와 재능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즉 내게는 없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없는 것이 내게는 있음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부자가 되고, 모두가 천재가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가도, 비천함 사람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사무엘상 2:7절에서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지금의 나 자신으로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지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은 어떠합니까? 지금까지 나와 가정을 인도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입니까? 비록 삶이 고달프고 힘겹고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지금의 이 삶의 자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믿고 감사합니까?
오늘 본문에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식사로 초대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며, 다른 사람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한 여인’입니다. 바리새인은 비록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입장이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마땅히 해야 하는 대접마저 소홀했습니다. 그러나 죄인 취급을 받은 그 여인은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그 위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행동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진정한 감사와 헌신이 어떤 것임을 보게 됩니다.
제도와 형식에 매인 감사와 헌신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는 석연찮은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예절은 손님을 초대하면 가장 먼저 입맞춤으로 환영을 표시하며, 다음으로 초대한 주인이나 그 집의 종을 통하여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예법이었습니다. 씻어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물이라도 떠 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역 환경과 기후관계로 샌들을 신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먼지투성이의 발로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배려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감람유를 바르는 행위 또한 당연한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초대자로서 손님에게 입맞춤도 하지 않았으며, 발 씻을 물을 주는 최소한의 배려조차 행하지 않았으며, 그 흔한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는 한 여인의 등장을 불쾌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음까지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시몬에게는 감사든지, 헌신이든지, 심지어 존경하는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단지 형식에 매인 식사 대접뿐이었습니다. 아마도 유명한 선생을 자기 집에 모셨다는 그런 자랑거리를 위해서인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예수님의 흠을 잡을 기회를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시몬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는 전혀 무감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의 감사절이 지극히 형식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도 없이 단순히 하나의 절기로 지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부족한 재정을 충족시키는 기회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도들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며,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섭리하심에 감사함 보다, 형식적이거나 헌금에 대한 부담감으로 감사절을 맞이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와 같이 형식적인 섬김과 예배로 일관하자 이사야 1:12절에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시며, 시편 50:14-15절에서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향기로 드리는 감사와 헌신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여인은 당시 사람들에 의하여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도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하신 말씀으로 보아 큰 죄를 지은 사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예수님이 시몬의 집으로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예수님께 시선이 고정되었으며,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다했습니다. 본문 45-46절에서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는 여인이 머리를 풀고 우는 것은 장례식 때만 허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의 뒤편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 때문에 감히 예수님의 앞에 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그 머리털로 발을 닦고,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구원의 크신 은총을 입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죄인인 이 여인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여인은 눈물의 회개와 함께 감격어린 헌신을 했습니다. 여인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너무나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감사와 헌신을 했습니다. 그 여인의 감사와 헌신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감사와 헌신의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시몬이 죄인인 여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물었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인의 감사와 헌신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여인은 하나님께 많은 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과의 만남에 의하여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함 받은 것에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시며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여인처럼 우리의 감사와 헌신의 진정한 이유도 우리를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보장하신 그 은혜와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우리의 육신의 생활만 살피지 말고 보다 더 중요한 영의 생명을 봅시다. 우리 육신의 생활만 보게 되면 감사할 일도 없고, 더더욱 헌신할 마음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감사하며 헌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일 말씀대로 우리가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합시다.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으로 헌신했습니다. 곧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향기로운 제물을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 감사와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온전한 마음과 삶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감사를 이룹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복된 생애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부잣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난초를 무척 아꼈습니다. 어느 날 그 난초 사이에 두꺼비가 한 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주인이 나와서 난초에 물을 주면서 잎을 닦아주고 쓰다듬기도 하며, ‘아름답다.’ ‘잘 자라라.’ 등. 애지중지 하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두꺼비는 너무 부러운 나머지 난초에게 말합니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먹으려고 쫓아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꾸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이 그렇게 곱게 길러 주고 사랑해 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
그 말을 들은 난초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발이 없으니 목이 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소가 와서 나를 뜯어 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잖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가서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는 도망도 갈 수 있지 않니?”
그 말을 들은 두꺼비는 비로소 자기에게는 난초에게는 없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 옛 말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을 표현한 말이겠지요.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보다 못한 것에는 질투를 느끼고 욕심을 내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욕망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 가치를 알지 못하면 활용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만족하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종말의 세대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디모데후서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사람이 자기중심적이 되면 사물을 보는 눈과 깨닫는 마음이 좁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각자가 개성이 있고, 자신만의 가치와 재능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즉 내게는 없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없는 것이 내게는 있음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부자가 되고, 모두가 천재가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가도, 비천함 사람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사무엘상 2:7절에서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지금의 나 자신으로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지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은 어떠합니까? 지금까지 나와 가정을 인도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입니까? 비록 삶이 고달프고 힘겹고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지금의 이 삶의 자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믿고 감사합니까?
오늘 본문에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식사로 초대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며, 다른 사람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한 여인’입니다. 바리새인은 비록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입장이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마땅히 해야 하는 대접마저 소홀했습니다. 그러나 죄인 취급을 받은 그 여인은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그 위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행동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진정한 감사와 헌신이 어떤 것임을 보게 됩니다.
제도와 형식에 매인 감사와 헌신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는 석연찮은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예절은 손님을 초대하면 가장 먼저 입맞춤으로 환영을 표시하며, 다음으로 초대한 주인이나 그 집의 종을 통하여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예법이었습니다. 씻어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물이라도 떠 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역 환경과 기후관계로 샌들을 신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먼지투성이의 발로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배려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감람유를 바르는 행위 또한 당연한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초대자로서 손님에게 입맞춤도 하지 않았으며, 발 씻을 물을 주는 최소한의 배려조차 행하지 않았으며, 그 흔한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는 한 여인의 등장을 불쾌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음까지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시몬에게는 감사든지, 헌신이든지, 심지어 존경하는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단지 형식에 매인 식사 대접뿐이었습니다. 아마도 유명한 선생을 자기 집에 모셨다는 그런 자랑거리를 위해서인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예수님의 흠을 잡을 기회를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시몬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는 전혀 무감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의 감사절이 지극히 형식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도 없이 단순히 하나의 절기로 지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부족한 재정을 충족시키는 기회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도들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며,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섭리하심에 감사함 보다, 형식적이거나 헌금에 대한 부담감으로 감사절을 맞이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와 같이 형식적인 섬김과 예배로 일관하자 이사야 1:12절에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시며, 시편 50:14-15절에서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향기로 드리는 감사와 헌신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여인은 당시 사람들에 의하여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도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하신 말씀으로 보아 큰 죄를 지은 사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예수님이 시몬의 집으로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예수님께 시선이 고정되었으며,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다했습니다. 본문 45-46절에서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는 여인이 머리를 풀고 우는 것은 장례식 때만 허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의 뒤편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 때문에 감히 예수님의 앞에 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그 머리털로 발을 닦고,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구원의 크신 은총을 입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죄인인 이 여인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여인은 눈물의 회개와 함께 감격어린 헌신을 했습니다. 여인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너무나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감사와 헌신을 했습니다. 그 여인의 감사와 헌신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감사와 헌신의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시몬이 죄인인 여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물었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인의 감사와 헌신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여인은 하나님께 많은 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과의 만남에 의하여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함 받은 것에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시며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여인처럼 우리의 감사와 헌신의 진정한 이유도 우리를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보장하신 그 은혜와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우리의 육신의 생활만 살피지 말고 보다 더 중요한 영의 생명을 봅시다. 우리 육신의 생활만 보게 되면 감사할 일도 없고, 더더욱 헌신할 마음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감사하며 헌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일 말씀대로 우리가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합시다.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으로 헌신했습니다. 곧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향기로운 제물을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 감사와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온전한 마음과 삶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감사를 이룹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복된 생애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