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된 내 마음의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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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11-12 15:12
*** 확증된 내 마음의 길 / 요한복음 10:19-30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0:19-30, “19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켜 프랑크 왕국을 일으킨 ‘카롤루스(샤를마뉴) 대제’가 있습니다. 그는 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서유럽의 정치적인 통일을 이루며, 동시에 기독교로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한 위대한 황제입니다. 그의 묘지가 200여 년 전에 발견되었습니다. 황제의 의복을 입고 황제의 홀을 쥔 채로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었고 그의 손가락이 마가복음 8장 36절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8:36-38절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후손들이 위대한 황제의 죽음 앞에서 그의 위대한 업적을 생각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회고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도 이런 업적과 교훈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왕인 솔로몬입니다.
솔로몬 왕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는 모두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다 누려본 자신은 이 모든 부귀영화가 영원하지 않으며 헛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누린 부귀영화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탄식했으며,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라고 경고하며 결론으로 12:13,14절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삶의 방향을 결정하도록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M.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505년 어거스틴과 수도원에 들어가서 견습 수도사 기간을 거친 후, 1507년에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날로 세속화 되어가며 부패해가는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의 개혁 조항을 내걸었습니다. 이것이 결국에는 세계적인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교회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바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오늘 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우리는 먼저 우리가 향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길을 살펴보고 바른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즉 세상의 개혁에 앞서 우리 자신을 먼저 개혁해야 합니다.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확정해야 할 마음의 길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앞서 예수님의 선언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양에게 생명을 주려고 목숨을 버리기 위하여 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귀신들려 미쳤다.’고 하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과 예수님의 이적을 믿고 인정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논쟁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가 유대인의 명절인 수전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절기를 지키려고 모인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에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지만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시며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신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거칠었습니다.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습니다. 이유는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정되지 못하여 방향을 잃고 있습니다. 밖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인 것 같은데, 생활에서는 모두가 세상적인 계획과 방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확증하라”는 말씀은 스스로 시험해서 입증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나의 생활에서 나 자신이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확증합니까?
1. 내가 예수님의 양 우리에 들어 있는지를 확증해야 합니다.
양 우리에 들어있다 함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의 양 우리에 들어 있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본문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고, 10장 4절에서도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하십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서 정말 신비로웠던 것은 지능이라고는 거의 없는 동물들의 본능입니다. 동굴 박쥐들은 수백만 마리가 한 동굴에서 살고 있습니다. 새끼를 낳을 때도 거의 동시에 모두가 새끼를 놓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새끼들 중에서 어떻게 자신의 새끼를 찾는 것일까요? 물개들이나, 펭귄들, 무리지어 사는 갈매기들 등. 또한 회귀본능을 가지고 있는 연어나 많은 새들은 어떻게 그 먼 여행과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났던 곳을 알고 찾아올까요? 한갓 미물들의 생활을 보면서 신비로움을 느낍니다.
양과 주인의 특별한 유대관계 때문에 양은 주인을 알고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양은 어떤 환경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주인도 똑같이 생긴 수많은 양들 속에서도 자신의 양을 알고, 양의 음성을 알뿐만 아니라 각자의 이름을 아십니다. 요한복음 10:3절에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하시며, 이사야 40:26절에서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고 하셨습니다. 한갓 미물들도 주인을 알아보고 자신이 머물 자리를 아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인도 모르며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통하여, 또는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말씀을 통하여, 성경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습니까?
수전절에 모인 수많은 무리들이 두 분류로 나뉘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귀신이 들려 미쳤다.”고 했습니다. 즉 모인 사람의 절대다수가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 우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21절에서 ‘혹은’이라고 표현 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양 우리에 들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시대의 사람들은 말씀대로 가르치지도 않았고, 인간의 욕망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당은 거대하고 화려해지고 성직자들은 생활이 화려하고 쾌락적이었습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당의 건축비와 성직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으며 결국 면죄부와 연옥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도들은 무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패역한 지도자들의 욕망에 이끌려서 비참하고 고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표제를 걸고 개혁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점점 더 거대해지고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거대함이나 화려함이나 많은 사업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시키지 못하면 사회와 함께 몰락하게 됩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신명기 11:16-17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따르게 되면 몰락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 나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확증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인 수전절이 있습니다.
수전절은 기원전 170년경에 시리아의 왕이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10만여 명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성전에는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단에는 돼지의 피로 제사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을 더럽히려는 고의적인 행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 책을 숨겨놓거나 읽거나 자식에게 할례를 행한 자는 사형에 처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그 자녀를 죽여서 목에 매달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마카비’ 가문의 사람이 주동이 되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는 승리하게 됩니다. 이 해방의 날을 기념하여 12월의 한 주간을 명절로 정하고, 각 가정에서는 깨끗한 기름을 준비하여 등불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이 명절을 ‘빛의 축제’라고 하며, 지금까지도 하누카(Hanukkah)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절기는 억압된 것에서 해방됨과 하나님께 다시 예배할 수 있게 된 기쁨을 나누는 명절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절기를 나타내신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의 삶으로 개혁되기를 바라시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변화시키고 개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분, 가장 첫 번째 자리에 계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 삶에서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도 많은 준비를 하며 정성을 쏟을 것입니다. 하물며 나의 생명이시며, 주인이시며,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결단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요4:24)고 하시며, 로마서 12;1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십시오. 주일은 나를 위한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이 예배가 되도록 매일의 삶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송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면 더 이상 내 것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함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됩니다. 즉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내 생활이 주님의 다스림 속에 있게 되려면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이란 나의 모든 생활에서 성령께서 주도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3:37절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시며 골로새서 4:2절에서는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을 성실하게 살고,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오늘을 성실하게 살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시온의 대로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삶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음의 길을 확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0:19-30, “19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켜 프랑크 왕국을 일으킨 ‘카롤루스(샤를마뉴) 대제’가 있습니다. 그는 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서유럽의 정치적인 통일을 이루며, 동시에 기독교로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한 위대한 황제입니다. 그의 묘지가 200여 년 전에 발견되었습니다. 황제의 의복을 입고 황제의 홀을 쥔 채로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었고 그의 손가락이 마가복음 8장 36절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8:36-38절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후손들이 위대한 황제의 죽음 앞에서 그의 위대한 업적을 생각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회고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도 이런 업적과 교훈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왕인 솔로몬입니다.
솔로몬 왕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는 모두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다 누려본 자신은 이 모든 부귀영화가 영원하지 않으며 헛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누린 부귀영화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탄식했으며,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라고 경고하며 결론으로 12:13,14절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삶의 방향을 결정하도록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M.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505년 어거스틴과 수도원에 들어가서 견습 수도사 기간을 거친 후, 1507년에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날로 세속화 되어가며 부패해가는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의 개혁 조항을 내걸었습니다. 이것이 결국에는 세계적인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교회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바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오늘 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우리는 먼저 우리가 향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길을 살펴보고 바른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즉 세상의 개혁에 앞서 우리 자신을 먼저 개혁해야 합니다.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확정해야 할 마음의 길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앞서 예수님의 선언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양에게 생명을 주려고 목숨을 버리기 위하여 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귀신들려 미쳤다.’고 하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과 예수님의 이적을 믿고 인정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논쟁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가 유대인의 명절인 수전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절기를 지키려고 모인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에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지만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시며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신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거칠었습니다.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습니다. 이유는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정되지 못하여 방향을 잃고 있습니다. 밖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인 것 같은데, 생활에서는 모두가 세상적인 계획과 방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확증하라”는 말씀은 스스로 시험해서 입증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나의 생활에서 나 자신이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확증합니까?
1. 내가 예수님의 양 우리에 들어 있는지를 확증해야 합니다.
양 우리에 들어있다 함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의 양 우리에 들어 있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본문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고, 10장 4절에서도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하십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서 정말 신비로웠던 것은 지능이라고는 거의 없는 동물들의 본능입니다. 동굴 박쥐들은 수백만 마리가 한 동굴에서 살고 있습니다. 새끼를 낳을 때도 거의 동시에 모두가 새끼를 놓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새끼들 중에서 어떻게 자신의 새끼를 찾는 것일까요? 물개들이나, 펭귄들, 무리지어 사는 갈매기들 등. 또한 회귀본능을 가지고 있는 연어나 많은 새들은 어떻게 그 먼 여행과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났던 곳을 알고 찾아올까요? 한갓 미물들의 생활을 보면서 신비로움을 느낍니다.
양과 주인의 특별한 유대관계 때문에 양은 주인을 알고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양은 어떤 환경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주인도 똑같이 생긴 수많은 양들 속에서도 자신의 양을 알고, 양의 음성을 알뿐만 아니라 각자의 이름을 아십니다. 요한복음 10:3절에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하시며, 이사야 40:26절에서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고 하셨습니다. 한갓 미물들도 주인을 알아보고 자신이 머물 자리를 아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인도 모르며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통하여, 또는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말씀을 통하여, 성경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습니까?
수전절에 모인 수많은 무리들이 두 분류로 나뉘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귀신이 들려 미쳤다.”고 했습니다. 즉 모인 사람의 절대다수가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 우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21절에서 ‘혹은’이라고 표현 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양 우리에 들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시대의 사람들은 말씀대로 가르치지도 않았고, 인간의 욕망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당은 거대하고 화려해지고 성직자들은 생활이 화려하고 쾌락적이었습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당의 건축비와 성직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으며 결국 면죄부와 연옥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도들은 무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패역한 지도자들의 욕망에 이끌려서 비참하고 고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표제를 걸고 개혁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점점 더 거대해지고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거대함이나 화려함이나 많은 사업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시키지 못하면 사회와 함께 몰락하게 됩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신명기 11:16-17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따르게 되면 몰락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 나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확증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인 수전절이 있습니다.
수전절은 기원전 170년경에 시리아의 왕이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10만여 명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성전에는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단에는 돼지의 피로 제사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을 더럽히려는 고의적인 행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 책을 숨겨놓거나 읽거나 자식에게 할례를 행한 자는 사형에 처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그 자녀를 죽여서 목에 매달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마카비’ 가문의 사람이 주동이 되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는 승리하게 됩니다. 이 해방의 날을 기념하여 12월의 한 주간을 명절로 정하고, 각 가정에서는 깨끗한 기름을 준비하여 등불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이 명절을 ‘빛의 축제’라고 하며, 지금까지도 하누카(Hanukkah)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절기는 억압된 것에서 해방됨과 하나님께 다시 예배할 수 있게 된 기쁨을 나누는 명절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절기를 나타내신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의 삶으로 개혁되기를 바라시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변화시키고 개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분, 가장 첫 번째 자리에 계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 삶에서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도 많은 준비를 하며 정성을 쏟을 것입니다. 하물며 나의 생명이시며, 주인이시며,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결단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요4:24)고 하시며, 로마서 12;1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십시오. 주일은 나를 위한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이 예배가 되도록 매일의 삶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송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면 더 이상 내 것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함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됩니다. 즉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내 생활이 주님의 다스림 속에 있게 되려면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이란 나의 모든 생활에서 성령께서 주도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3:37절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시며 골로새서 4:2절에서는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을 성실하게 살고,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오늘을 성실하게 살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시온의 대로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삶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음의 길을 확증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