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 있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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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10-20 18:00
*** 근심 있는 사람 / 누가복음 1:5-13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5-13,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어떤 젊은 여자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자녀 여섯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젊은 과부는 너무 기가 막혀서 얼마 동안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울다가 울다가 몇 달 후에 결정했습니다. 자기는 남자들처럼 노동은 못하겠고, 교육을 많이 받지도 못했으니 취직도 못하겠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 없는 어린이들을 맡아 기르는 양어머니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이 과부는 자기 집을 양육소로 만들고 부모 없는 어린이들을 맡아 길렀습니다. 미국 정부에서는 양육하는 아이를 위하여 한 아이에게 매달 40만원 정도를 지급합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6남매 이외에 1백여 명의 어린이들을 맡아 잘 길렀습니다. 어느 날, 신문기자가 양육소를 찾아와서 그 부인과 인터뷰했습니다.
“당신은 무슨 비결로 그 많은 아이들을 맡아서 훌륭하게 길렀습니까?” “함께 일한 것입니다.” “함께 일하다니요? 누구와 함께 일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일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저는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 근심과 염려들을 맡아주십시오. 그러시면 저는 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약속한 대로 저는 근심걱정은 하나님께 맡겨두고 일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제 부탁을 받으시고 근심걱정을 맡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제 비결입니다.”
이 과부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고 있는 짐이 근심, 염려, 걱정들입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걱정에 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며, 시편 55:22절에서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권고하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도 염려거리들이 있지요? 그 근심거리들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던 대로 계속 걱정만 하고 있으시렵니까? 잠언 17:22절에서는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으며, 고린도후서 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육신의 삶에 대한 근심들은 분명히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근심에 싸인 부부가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근심과 염려거리들도 같이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시대를 여는 과도기의 인물인 ‘사가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가랴는 아론의 후손으로 제사장이었으며, 역시 아론의 후손인 엘리사벳과 결혼했습니다. 이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흠이 없이 행하는 의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이었지만 이 둘 사이에는 오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큰 근심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 부부의 근심이 깊은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마음에 인간적인 소망이 사라지게 될 때 근심에 싸이게 됩니다. 사가랴는 제사장 가문으로써 대가 끊어지는 가문의 단절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마 사가랴보다도 엘리사벳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근심이 깊었을 것입니다. 후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2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제사장들은 24반열로 나뉘어져서 돌아가며 성전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도록 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제사장으로써의 직무를 수행할 순서가 되었는데, 제비에 뽑혀서 성소에서 분향하게 되었습니다.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할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자신과 아내가 모두 수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의심했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근심에 싸이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의 “엘리사벳이 수태하지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는 말씀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근심에 싸여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심에 잠기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자하고, 나이 많더라.” 이 말씀은 그들이 직면한 환경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근심에 싸이게 되는 이유는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급해질수록 시각은 더욱 좁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마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한 여자가 사고를 당해 눈 주위의 피부가 몹시 흉하게 오그라들었습니다. 혼기가 꽉 차 있던 그녀는 그 후 계속 선을 봤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녀는 생각다 못해 이름난 메이크업 학원에 다니며 그 상처를 감추는 화장법을 배웠습니다. 화장으로 흉터를 숨기고 한 남자와 선을 봐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장사를 나가기 때문에 그녀도 늘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 화장을 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감추어진 모습이 드러날까 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리어카를 밀면서 함께 장사를 다녔습니다. 문제는 땀이 날 때였습니다. 남편이 닦아주겠다고 해도 행여 들킬까봐 늘 사양하며 눈 주위를 피해 조심스레 닦아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고 그날도 남편이 얼굴을 닦아주려고 했습니다. 잠시 멈칫거리던 여인은 ‘어차피 언젠가는 들킬 걸’ 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손수건을 꺼내 든 남편은 눈 주위만 빼고, 빗물을 정성스레 닦아주었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약점을 가리고 싶었지만, 남편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약점까지도 함께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그때까지 쓸데없는 염려에 빠져서 괜히 피곤하고 부자유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근심에 싸이고 부자유스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말씀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고,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통로가 막혀버립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조금 웅얼거리다가 무엇이 막힌 듯 답답하기만 하고 엉뚱한 생각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환경에 집착하게 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마음과 영혼이 마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각이 점점 더 좁아져서 자기 앞만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근심과 걱정은 더욱 심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악순환입니다.
사가랴가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들었지만 육신의 환경에 집착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다음으로 넘어가서 18-20절을 봅시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사가랴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아내도 모두 아이를 잉태할 만한 나이를 지났다는 것이 불신의 원인이었습니다.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근심과 걱정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을 사가랴의 불신에서 찾아봅시다.
하나는, 우리가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인데 어떻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까? 믿음을 정의하는 히브리서 11:1절을 아시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이 말씀은 보이는 것을 신뢰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비록 내 앞에 닥친 일들은 불가능해 보이고 탈출할 길도 보이지 않지만 나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환경을 넘어서서 인간적인 이해의 차원을 초월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20:29절에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하십니다. 근심을 벗어나는 길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불신의 대가로 한시적인 벙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하여 늘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거듭되는 죄악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처럼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변화무쌍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세상의 육신적인 환경을 초월하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심령이 돌밭이나 가시덤불 밭과 같이 되어서 자랄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열매가 없으면 버림받게 되고 불에 살라지겠지요.
이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비록 불가능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넘어지고 유혹되는 우리 인생을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붙드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의심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사가랴는 ‘요한’이라는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깨닫지 못할 때에는 의심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에는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지금 세상의 바람이 심상찮게 불고 있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근심에 싸이지 않도록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세상의 극심한 파도에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5-13,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어떤 젊은 여자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자녀 여섯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젊은 과부는 너무 기가 막혀서 얼마 동안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울다가 울다가 몇 달 후에 결정했습니다. 자기는 남자들처럼 노동은 못하겠고, 교육을 많이 받지도 못했으니 취직도 못하겠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 없는 어린이들을 맡아 기르는 양어머니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이 과부는 자기 집을 양육소로 만들고 부모 없는 어린이들을 맡아 길렀습니다. 미국 정부에서는 양육하는 아이를 위하여 한 아이에게 매달 40만원 정도를 지급합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6남매 이외에 1백여 명의 어린이들을 맡아 잘 길렀습니다. 어느 날, 신문기자가 양육소를 찾아와서 그 부인과 인터뷰했습니다.
“당신은 무슨 비결로 그 많은 아이들을 맡아서 훌륭하게 길렀습니까?” “함께 일한 것입니다.” “함께 일하다니요? 누구와 함께 일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일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저는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 근심과 염려들을 맡아주십시오. 그러시면 저는 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약속한 대로 저는 근심걱정은 하나님께 맡겨두고 일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제 부탁을 받으시고 근심걱정을 맡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제 비결입니다.”
이 과부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고 있는 짐이 근심, 염려, 걱정들입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걱정에 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며, 시편 55:22절에서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권고하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도 염려거리들이 있지요? 그 근심거리들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던 대로 계속 걱정만 하고 있으시렵니까? 잠언 17:22절에서는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으며, 고린도후서 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육신의 삶에 대한 근심들은 분명히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근심에 싸인 부부가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근심과 염려거리들도 같이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시대를 여는 과도기의 인물인 ‘사가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가랴는 아론의 후손으로 제사장이었으며, 역시 아론의 후손인 엘리사벳과 결혼했습니다. 이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흠이 없이 행하는 의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이었지만 이 둘 사이에는 오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큰 근심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 부부의 근심이 깊은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마음에 인간적인 소망이 사라지게 될 때 근심에 싸이게 됩니다. 사가랴는 제사장 가문으로써 대가 끊어지는 가문의 단절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마 사가랴보다도 엘리사벳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근심이 깊었을 것입니다. 후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2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제사장들은 24반열로 나뉘어져서 돌아가며 성전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도록 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제사장으로써의 직무를 수행할 순서가 되었는데, 제비에 뽑혀서 성소에서 분향하게 되었습니다.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할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자신과 아내가 모두 수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의심했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근심에 싸이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의 “엘리사벳이 수태하지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는 말씀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근심에 싸여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심에 잠기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자하고, 나이 많더라.” 이 말씀은 그들이 직면한 환경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근심에 싸이게 되는 이유는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급해질수록 시각은 더욱 좁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마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한 여자가 사고를 당해 눈 주위의 피부가 몹시 흉하게 오그라들었습니다. 혼기가 꽉 차 있던 그녀는 그 후 계속 선을 봤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녀는 생각다 못해 이름난 메이크업 학원에 다니며 그 상처를 감추는 화장법을 배웠습니다. 화장으로 흉터를 숨기고 한 남자와 선을 봐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장사를 나가기 때문에 그녀도 늘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 화장을 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감추어진 모습이 드러날까 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리어카를 밀면서 함께 장사를 다녔습니다. 문제는 땀이 날 때였습니다. 남편이 닦아주겠다고 해도 행여 들킬까봐 늘 사양하며 눈 주위를 피해 조심스레 닦아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고 그날도 남편이 얼굴을 닦아주려고 했습니다. 잠시 멈칫거리던 여인은 ‘어차피 언젠가는 들킬 걸’ 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손수건을 꺼내 든 남편은 눈 주위만 빼고, 빗물을 정성스레 닦아주었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약점을 가리고 싶었지만, 남편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약점까지도 함께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그때까지 쓸데없는 염려에 빠져서 괜히 피곤하고 부자유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근심에 싸이고 부자유스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말씀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고,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통로가 막혀버립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조금 웅얼거리다가 무엇이 막힌 듯 답답하기만 하고 엉뚱한 생각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환경에 집착하게 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마음과 영혼이 마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각이 점점 더 좁아져서 자기 앞만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근심과 걱정은 더욱 심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악순환입니다.
사가랴가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들었지만 육신의 환경에 집착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다음으로 넘어가서 18-20절을 봅시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사가랴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아내도 모두 아이를 잉태할 만한 나이를 지났다는 것이 불신의 원인이었습니다.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근심과 걱정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을 사가랴의 불신에서 찾아봅시다.
하나는, 우리가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인데 어떻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까? 믿음을 정의하는 히브리서 11:1절을 아시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이 말씀은 보이는 것을 신뢰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비록 내 앞에 닥친 일들은 불가능해 보이고 탈출할 길도 보이지 않지만 나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환경을 넘어서서 인간적인 이해의 차원을 초월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20:29절에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하십니다. 근심을 벗어나는 길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불신의 대가로 한시적인 벙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하여 늘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거듭되는 죄악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처럼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변화무쌍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세상의 육신적인 환경을 초월하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심령이 돌밭이나 가시덤불 밭과 같이 되어서 자랄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열매가 없으면 버림받게 되고 불에 살라지겠지요.
이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비록 불가능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넘어지고 유혹되는 우리 인생을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붙드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의심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사가랴는 ‘요한’이라는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깨닫지 못할 때에는 의심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에는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지금 세상의 바람이 심상찮게 불고 있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근심에 싸이지 않도록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세상의 극심한 파도에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