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머물러야 할 자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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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5-28 21:37
*** 성도가 머물러야 할 자리 / 대하 25:5-9
** 들어가는 말
대하 25:5-9, “5 아마샤가 유다 사람을 모으고 그 여러 족속을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되 유다와 베냐민을 함께 그리하고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여 창과 방패를 잡고 능히 전장에 나갈만한 자 삼십만을 얻고 6 또 은 일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을 삯내었더니 7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이스라엘 군대로 왕과 함께 가게 마옵소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곧 온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나니 8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대적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9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일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꼬? 하나님의 사람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고려 말기, 이씨 조선이 태동하기 전,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갈 때에 포은 정몽주는 쓰러져가는 고려의 운명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애썼습니다. 한편 이성계는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그래서 이성계의 ‘하여가’(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더렁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가 나오고 그에 대한 답으로 정몽주의 ‘단심가’(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줄이 있으랴.)가 나왔습니다.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몽주가 문병을 가기 위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 팔순 가까운 정몽주의 노모가 ‘간밤의 꿈이 흉하니 가지 말라.’고 문밖까지 따라 나와서 만류한 글이 시조로 남아 있습니다. ‘경계가’라고 하는 그 시조는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까마귀들이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말아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새하얀 빛을 시샘할까 두렵구나.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이 더러워질까 걱정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선 정몽주는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옛 말에도 “누울 자리를 봐가면서 발을 뻗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머물 자리가 어디인지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며,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그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머무는 삶의 자리가 자신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 요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행진할 때에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반발하여 고라, 다단, 아비람, 온 이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고 족장 250명이 동조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진노하셔서 주동자들을 생매장 되게 하셨으며, 동조자들을 불로 태워버리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셔서 ‘백성들로 반역자들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반역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으며, 그 자리를 떠난 사람들은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라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들과 함께 입방아를 찧고 그들과 함께 행동한다면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찬송가 269장 2,3절에 “웬 일인가 내 형제여 마귀만 쫓다가 저 마귀들 지옥 갈 때 너도 가겠구나. 웬 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고 노래합니다. 이 가사처럼 마귀를 따르는 자리에 머물면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성도들과 함께 하면 거룩한 일을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는 생명과 영생의 자리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당연히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면 세상살이 걱정을 하게 되고, 성도들과 함께 하면 신앙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까? 주님을 잊고 사는 세상의 자리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에 주신 말씀을 통하여 성도가 머무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남 유다의 아홉 번째 왕이었던 아마샤의 통치 중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샤는 25세 때에 왕위에 올라 29년간을 통치했습니다. 아마샤의 통치는 본문 앞쪽의 1절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였으나 \"완전한 마음\"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병행구절인 역대하 25:3-4절에서 그는 자신의 원수에게까지 공의를 행할 정도로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통치 초기를 기록하고 있는 본문에서, 아마샤는 에돔 족속을 멸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 30만과 일백 달란트를 주고 북 이스라엘의 큰 용사 10만을 전쟁 용역으로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아마샤 왕에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곧 온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나니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대적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라며 북 이스라엘 병사를 고용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전하셨습니다. 그 때 아마샤는 선지자에게 내가 일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꼬? 라고 이미 지불한 용역비를 아까워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고 아까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권했습니다. 결국 아마샤는 용역비를 포기하고 북 이스라엘 군사를 돌려보냈습니다.
전쟁에서 아마샤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덕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면서도 그는 돌아오는 길에 에돔 족속들이 섬기던 우상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그 우상을 자신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서 분향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어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 왕 요아스를 일으키셔서 아마샤를 징계하셨으며, 결국 모반자들에 의하여 아마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성도가 머무는 자리,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야 합니다.
1. 성도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과 함께 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5:19절을 봅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일이든지 세상의 방식대로, 혹은 세상 사람들과 의논하여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물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 5-6절에서 아마샤가 행한 것이 바로 세상의 방식이며, 세상을 의지하는 행동입니다.
남 유다의 13대 왕인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세상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온 군대를 모으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역대하 32:7-8절을 봅시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 이 전쟁의 결말을 아시지요?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송장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의지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다급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무엇을 의지합니까? 도와 줄 사람을 찾거나, 돈을 구하지 않습니까? 좋은 약을 찾거나, 용한 의사를 구하지 않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먼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거나 경험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는 세상적인 방법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결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세상일을 의지하지도 않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는 도무지 사귀지도 않아야 합니까?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10절에서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취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내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시고 당연히 경영하는 일이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경영하는 일들이 형통하게 됩니다.
2. 성도는 세상적인 손익(損益)계산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아마샤의 세상적인 방식을 포기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즉 북 이스라엘에서 거금을 들여 삯 낸 용병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마샤가 걱정스럽게 “이미 은 일백달란트를 용병의 삯으로 지불해버렸는데 그 돈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방식이며 세상에 머무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많은 무리가 굶주린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빌립이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빌립의 생각에는 오천 여명의 사람들에게 먹일 떡을 어림잡아 계산해서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도 부족하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서기관들 제사장 그룹들 등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구원 사역보다는 자신들의 손익계산에 바빴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보다는 손익계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도들이 많은 일들을 하지만 참으로 그 일들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으로 하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넣은 기념교회를 크게 짓고 싶어 하던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아무에게도 건축헌금을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명령했습니다. 그래야 후대에 이 거대한 교회는 자기가 지은 교회로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건축이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머릿돌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더니 머릿돌에서 자기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어떤 다른 이름을 새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꿈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왕은 너무나 이상하여 아침이 되어 그 이름을 찾으라고 대신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불려온 사람은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왕은 그 가난한 과부에게 “교회를 지을 때에 도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물었습니다. 과부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왕이시여! 나는 아무 일도 한 일이 없습니다. 왕께서 헌금 못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헌금을 하겠습니까? 교회 건축 현장에는 접근도 못하게 되어 있는데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다만 너무나 교회건축에 동참하고 싶어서 벽돌을 나르는 말들에게 건초먹이를 주었을 뿐입니다.” 왕은 건축자를 시켜서 그 교회의 머릿돌에서 자기 이름을 긁어내고 이 과부의 이름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왕은 손익을 계산했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몸부림치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은 일백 데나리온을 손해 보겠다고 염려하는 왕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잠언 19:17절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0:42절에서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손익을 계산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삶의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성도의 삶은 봉사와 섬김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헌신과 봉사, 헌물과 헌금들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억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상급으로 보상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삶의 자리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사는 매일의 생활에서 머무는 자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과 함께 한다든지, 세상적인 방식대로 사는 삶의 자리라면 결코 성공적인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손익을 계산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는 전적인 헌신과 봉사와 드림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자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길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형통을 보장 받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자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대하 25:5-9, “5 아마샤가 유다 사람을 모으고 그 여러 족속을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되 유다와 베냐민을 함께 그리하고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여 창과 방패를 잡고 능히 전장에 나갈만한 자 삼십만을 얻고 6 또 은 일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을 삯내었더니 7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이스라엘 군대로 왕과 함께 가게 마옵소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곧 온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나니 8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대적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9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일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꼬? 하나님의 사람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고려 말기, 이씨 조선이 태동하기 전,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갈 때에 포은 정몽주는 쓰러져가는 고려의 운명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애썼습니다. 한편 이성계는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그래서 이성계의 ‘하여가’(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더렁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가 나오고 그에 대한 답으로 정몽주의 ‘단심가’(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줄이 있으랴.)가 나왔습니다.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몽주가 문병을 가기 위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 팔순 가까운 정몽주의 노모가 ‘간밤의 꿈이 흉하니 가지 말라.’고 문밖까지 따라 나와서 만류한 글이 시조로 남아 있습니다. ‘경계가’라고 하는 그 시조는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까마귀들이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말아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새하얀 빛을 시샘할까 두렵구나.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이 더러워질까 걱정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선 정몽주는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옛 말에도 “누울 자리를 봐가면서 발을 뻗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머물 자리가 어디인지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며,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그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머무는 삶의 자리가 자신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 요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행진할 때에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반발하여 고라, 다단, 아비람, 온 이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고 족장 250명이 동조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진노하셔서 주동자들을 생매장 되게 하셨으며, 동조자들을 불로 태워버리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셔서 ‘백성들로 반역자들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반역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으며, 그 자리를 떠난 사람들은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라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들과 함께 입방아를 찧고 그들과 함께 행동한다면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찬송가 269장 2,3절에 “웬 일인가 내 형제여 마귀만 쫓다가 저 마귀들 지옥 갈 때 너도 가겠구나. 웬 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고 노래합니다. 이 가사처럼 마귀를 따르는 자리에 머물면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성도들과 함께 하면 거룩한 일을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는 생명과 영생의 자리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당연히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면 세상살이 걱정을 하게 되고, 성도들과 함께 하면 신앙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까? 주님을 잊고 사는 세상의 자리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에 주신 말씀을 통하여 성도가 머무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남 유다의 아홉 번째 왕이었던 아마샤의 통치 중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샤는 25세 때에 왕위에 올라 29년간을 통치했습니다. 아마샤의 통치는 본문 앞쪽의 1절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였으나 \"완전한 마음\"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병행구절인 역대하 25:3-4절에서 그는 자신의 원수에게까지 공의를 행할 정도로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통치 초기를 기록하고 있는 본문에서, 아마샤는 에돔 족속을 멸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 30만과 일백 달란트를 주고 북 이스라엘의 큰 용사 10만을 전쟁 용역으로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아마샤 왕에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곧 온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나니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대적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라며 북 이스라엘 병사를 고용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전하셨습니다. 그 때 아마샤는 선지자에게 내가 일백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꼬? 라고 이미 지불한 용역비를 아까워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고 아까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권했습니다. 결국 아마샤는 용역비를 포기하고 북 이스라엘 군사를 돌려보냈습니다.
전쟁에서 아마샤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덕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면서도 그는 돌아오는 길에 에돔 족속들이 섬기던 우상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그 우상을 자신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서 분향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어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 왕 요아스를 일으키셔서 아마샤를 징계하셨으며, 결국 모반자들에 의하여 아마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성도가 머무는 자리,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야 합니다.
1. 성도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과 함께 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5:19절을 봅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일이든지 세상의 방식대로, 혹은 세상 사람들과 의논하여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물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 5-6절에서 아마샤가 행한 것이 바로 세상의 방식이며, 세상을 의지하는 행동입니다.
남 유다의 13대 왕인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세상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온 군대를 모으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역대하 32:7-8절을 봅시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 이 전쟁의 결말을 아시지요?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송장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의지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다급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무엇을 의지합니까? 도와 줄 사람을 찾거나, 돈을 구하지 않습니까? 좋은 약을 찾거나, 용한 의사를 구하지 않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먼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거나 경험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는 세상적인 방법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결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세상일을 의지하지도 않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는 도무지 사귀지도 않아야 합니까?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10절에서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취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내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시고 당연히 경영하는 일이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경영하는 일들이 형통하게 됩니다.
2. 성도는 세상적인 손익(損益)계산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아마샤의 세상적인 방식을 포기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즉 북 이스라엘에서 거금을 들여 삯 낸 용병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마샤가 걱정스럽게 “이미 은 일백달란트를 용병의 삯으로 지불해버렸는데 그 돈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방식이며 세상에 머무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많은 무리가 굶주린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빌립이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빌립의 생각에는 오천 여명의 사람들에게 먹일 떡을 어림잡아 계산해서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도 부족하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서기관들 제사장 그룹들 등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구원 사역보다는 자신들의 손익계산에 바빴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보다는 손익계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도들이 많은 일들을 하지만 참으로 그 일들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으로 하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넣은 기념교회를 크게 짓고 싶어 하던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아무에게도 건축헌금을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명령했습니다. 그래야 후대에 이 거대한 교회는 자기가 지은 교회로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건축이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머릿돌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더니 머릿돌에서 자기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어떤 다른 이름을 새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꿈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왕은 너무나 이상하여 아침이 되어 그 이름을 찾으라고 대신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불려온 사람은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왕은 그 가난한 과부에게 “교회를 지을 때에 도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물었습니다. 과부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왕이시여! 나는 아무 일도 한 일이 없습니다. 왕께서 헌금 못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헌금을 하겠습니까? 교회 건축 현장에는 접근도 못하게 되어 있는데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다만 너무나 교회건축에 동참하고 싶어서 벽돌을 나르는 말들에게 건초먹이를 주었을 뿐입니다.” 왕은 건축자를 시켜서 그 교회의 머릿돌에서 자기 이름을 긁어내고 이 과부의 이름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왕은 손익을 계산했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몸부림치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은 일백 데나리온을 손해 보겠다고 염려하는 왕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으로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잠언 19:17절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0:42절에서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손익을 계산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삶의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성도의 삶은 봉사와 섬김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헌신과 봉사, 헌물과 헌금들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억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상급으로 보상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삶의 자리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사는 매일의 생활에서 머무는 자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과 함께 한다든지, 세상적인 방식대로 사는 삶의 자리라면 결코 성공적인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손익을 계산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는 전적인 헌신과 봉사와 드림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자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길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형통을 보장 받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자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