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127회
작성일
2006-05-24 12:48
***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 요 16:20-24
** 들어가는 말
요 16:20-24,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세상의 즐거움과 흥분, 모험을 찾아 한 평생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해보지 않은 일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온갖 일을 다 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에서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 전쟁에서는 종군기자로 일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사냥꾼이 되어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했습니다. 쿠바에서는 군수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며, 틈틈이 바다낚시를 즐겼습니다. 파리에서는 특파원으로 일했으며, 파리와 스페인을 무대로 한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탄 비행기가 두 번씩이나 추락했지만 살아남았으며, 세 번 이혼하고 네 번 결혼했습니다. 그가 쓴 한 소설 작품의 첫 머리에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하나가 나둥그러져 있다. 과연 표범은 그 높은 산봉우리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마침내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인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스스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는 정상의 산봉우리에서 쓰러져 피 흘리는 표범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등의 수많은 명작을 남긴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평생 인생의 기쁨, 곧 스릴을 찾아 도전했고 또 어느 정도 그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더 이상 도전 할 것도, 찾아낼 기쁨도 고갈되자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헤밍웨이처럼 다양한 삶과 다양한 기쁨을 누려보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보다 더하여 온 세상을 다 헤집고 다닌다 해도 세상에서는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만일 우리의 삶에서 기쁨을 빼앗아 버린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온통 인생이 회색빛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위하여 온갖 것을 다하지 않습니까?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쾌락을 찾아다니고, 레저 스포츠 등등. 전도서 9:9절에서는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이 땅에서 가족을 이루어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기쁨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능력이 있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1.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근심을 녹입니다.
본문 20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사람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가장 무서운 것은 마음의 근심입니다. 잠언 17:22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근심, 걱정, 불안, 염려, 의심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세상의 나쁜 바이러스들은 사람의 육체를 파괴하지만, 근심은 마음을 병들게 하고 영혼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안개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근심을 잘 다루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심과 염려들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염려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해도 근심거리들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근심, 걱정, 염려를 다 떨쳐버리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닥쳐올 환난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짐을 덜어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여인이 아이를 해산 할 때가 되면 그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그 고통은 잊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 앞에 당면한 근심거리들은 보다 더 큰 기쁨이 오면 모든 근심거리들이 녹아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근심을 녹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근심은 마치 태양을 가리는 구름과도 같습니다. 구름이 짙으면 짙을수록 전달되는 태양의 빛은 더욱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구름이 짙다고 태양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요. 태양은 여전히 구름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의 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가려서 우리 영혼으로 어둡게 만듭니다. 당연히 하나님과의 교통마저 두절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염려와 근심은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근심을 녹이는 유일한 능력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 속에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함께 거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아침 안개를 녹이는 태양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어떻게 내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으며,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도록 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의 기쁨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11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2.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되는 것을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모든 것이 형통할 때에 사단은 여지없이 틈을 탑니다. 넘어뜨리기 위해서지요. 사도행전에서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하심으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번 설교에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이 때에 사단은 대대적인 핍박을 가합니다. 분봉왕 헤롯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그것을 유대인들이 좋아하자, 베드로 사도마저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형 집행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교회는 사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두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군사 사이에서 양 팔과 양 발에 착고가 채인 채로 전혀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잠든 베드로를 깨워 데리고 감옥을 벗어납니다. 착고가 풀리고 감옥의 문들이 저절로 열리면서 밖으로 나오게 된 베드로는 그제야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곧장 자신을 위하여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향합니다. 사단은 세상의 권력을 통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아보려 했지만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서 8:38-39절을 봅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의 권세도, 위협도, 사단도, 악의 모든 권세도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의 근원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기쁨을 주는 조건이 없어지면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금방 기쁘다가도 금방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기쁨의 조건이 얼마든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주님의 기쁨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기쁨을 없이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병자들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자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마음에 시기가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들였습니다. 감옥에 가두었지만 천사가 그 밤에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튿날 그들은 다시 사도들을 잡아들여서 심문하고는 예수를 전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면서 채찍질하고 놓았습니다. 사도행전 5:41절을 봅시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의 핍박조차도 사도들의 기쁨을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때로는 힘들고 피곤하고 지치게 하지만 그것으로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없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소유해야 합니다.
3.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충만합니다.
본문 24절을 봅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늘 함께 생활해왔기 때문에 특별히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야 하는 시점에서 제자들이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구하고 얻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런데 무엇을 구한 결과가 ‘기쁨 충만’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빌립보서 4:6-7절을 봅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안정되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의 응답은 ‘기쁨 충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응답하신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의 삶에서 이룰 것입니다. 그 보장이 ‘기쁨 충만’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기쁨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근심을 녹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하며,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기쁨이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요 16:20-24,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세상의 즐거움과 흥분, 모험을 찾아 한 평생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해보지 않은 일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온갖 일을 다 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에서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 전쟁에서는 종군기자로 일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사냥꾼이 되어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했습니다. 쿠바에서는 군수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며, 틈틈이 바다낚시를 즐겼습니다. 파리에서는 특파원으로 일했으며, 파리와 스페인을 무대로 한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탄 비행기가 두 번씩이나 추락했지만 살아남았으며, 세 번 이혼하고 네 번 결혼했습니다. 그가 쓴 한 소설 작품의 첫 머리에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하나가 나둥그러져 있다. 과연 표범은 그 높은 산봉우리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마침내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인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스스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는 정상의 산봉우리에서 쓰러져 피 흘리는 표범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등의 수많은 명작을 남긴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평생 인생의 기쁨, 곧 스릴을 찾아 도전했고 또 어느 정도 그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더 이상 도전 할 것도, 찾아낼 기쁨도 고갈되자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헤밍웨이처럼 다양한 삶과 다양한 기쁨을 누려보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보다 더하여 온 세상을 다 헤집고 다닌다 해도 세상에서는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만일 우리의 삶에서 기쁨을 빼앗아 버린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온통 인생이 회색빛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위하여 온갖 것을 다하지 않습니까?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쾌락을 찾아다니고, 레저 스포츠 등등. 전도서 9:9절에서는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이 땅에서 가족을 이루어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기쁨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능력이 있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1.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근심을 녹입니다.
본문 20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사람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가장 무서운 것은 마음의 근심입니다. 잠언 17:22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근심, 걱정, 불안, 염려, 의심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세상의 나쁜 바이러스들은 사람의 육체를 파괴하지만, 근심은 마음을 병들게 하고 영혼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안개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근심을 잘 다루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심과 염려들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염려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해도 근심거리들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근심, 걱정, 염려를 다 떨쳐버리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닥쳐올 환난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짐을 덜어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여인이 아이를 해산 할 때가 되면 그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그 고통은 잊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 앞에 당면한 근심거리들은 보다 더 큰 기쁨이 오면 모든 근심거리들이 녹아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근심을 녹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근심은 마치 태양을 가리는 구름과도 같습니다. 구름이 짙으면 짙을수록 전달되는 태양의 빛은 더욱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구름이 짙다고 태양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요. 태양은 여전히 구름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의 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가려서 우리 영혼으로 어둡게 만듭니다. 당연히 하나님과의 교통마저 두절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염려와 근심은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근심을 녹이는 유일한 능력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 속에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함께 거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아침 안개를 녹이는 태양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어떻게 내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으며,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도록 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의 기쁨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11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2.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되는 것을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모든 것이 형통할 때에 사단은 여지없이 틈을 탑니다. 넘어뜨리기 위해서지요. 사도행전에서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하심으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번 설교에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이 때에 사단은 대대적인 핍박을 가합니다. 분봉왕 헤롯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그것을 유대인들이 좋아하자, 베드로 사도마저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형 집행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교회는 사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두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군사 사이에서 양 팔과 양 발에 착고가 채인 채로 전혀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잠든 베드로를 깨워 데리고 감옥을 벗어납니다. 착고가 풀리고 감옥의 문들이 저절로 열리면서 밖으로 나오게 된 베드로는 그제야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곧장 자신을 위하여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향합니다. 사단은 세상의 권력을 통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아보려 했지만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서 8:38-39절을 봅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의 권세도, 위협도, 사단도, 악의 모든 권세도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의 근원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기쁨을 주는 조건이 없어지면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금방 기쁘다가도 금방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기쁨의 조건이 얼마든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주님의 기쁨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기쁨을 없이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병자들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자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마음에 시기가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들였습니다. 감옥에 가두었지만 천사가 그 밤에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튿날 그들은 다시 사도들을 잡아들여서 심문하고는 예수를 전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면서 채찍질하고 놓았습니다. 사도행전 5:41절을 봅시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의 핍박조차도 사도들의 기쁨을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때로는 힘들고 피곤하고 지치게 하지만 그것으로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없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소유해야 합니다.
3.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충만합니다.
본문 24절을 봅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늘 함께 생활해왔기 때문에 특별히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야 하는 시점에서 제자들이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구하고 얻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런데 무엇을 구한 결과가 ‘기쁨 충만’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빌립보서 4:6-7절을 봅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안정되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의 응답은 ‘기쁨 충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응답하신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의 삶에서 이룰 것입니다. 그 보장이 ‘기쁨 충만’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기쁨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근심을 녹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하며,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기쁨이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