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의 기쁨이 있는 가정과 교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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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5-06 23:15
*** 잔치의 기쁨이 있는 가정과 교회 / 눅 14:15-24
** 들어가는 말
눅 14:15-24,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로리 베스 존스’가 쓴 ‘C.E.O 예수’(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글 속에서 저자는 “예수님은 항상 축제상태에 계셨다.”라고 합니다. 한번은 열 살 바기 어린아이가 존스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세요?” 존스가 “모르겠는데”라고 하자, 어린아이가 장난기 어린 얼굴을 하고는 “앞으로 뛰어 오르면서 두 팔을 벌리고는 ‘짠-!’하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풍자적인 이야기지만 예수님은 항상 축제적인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최초의 기적도 가나의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잔칫집에 비유하기도 하셨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의 끝 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있을 큰 행사가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도 늘 기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21절에서는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 ”라고 표현하시며, 요한복음 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는 항상 기쁨이 충만한 축제의 삶이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하는 아버지의 기쁨 같은 그런 기쁨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기뻐했으며, 방탕하다가 돌아온 탕자는 다시 아들이 된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는 죽음의 자리에서 돌아온 자녀로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스바냐 3:17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돌아온 탕자들은 하나님의 자녀 됨과 더불어 영원한 기쁨의 삶을 얻은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충만한 곳이 곧 성도의 가정이며 교회입니다.
이번 5월은 가정의 달이자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가정과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본문의 배경과 전체 의미를 봅시다.
본문의 앞쪽에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손님들을 초청할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시도록 초청자를 잘 선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을 초청하여 대접하면 ‘의인들의 부활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사람은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본문의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잔치 시간이 되어 주인은 초청한 사람들의 집으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바쁜 일이 있어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종들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대단히 화가 나서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종들이 “명하신 대로 데려왔지만 아직도 빈 자리가 있습니다.”라고 다시 주인에게 보고합니다. 주인은 시골로 가서 “방랑자들, 또는 일터에서 이제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 사람들을 찾아오라. 그리고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이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이며,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총을 말씀하십니다.
2.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교회는 잔치하는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세상 삶에 찌들어 살라고 하심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듯이 택함 받은 성도는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세상의 찌든 삶에서 구원받은 하늘의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미 영혼의 생명을 얻었으며 영원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해야 함을 말합니다.
비록 아직은 세상에서 육신의 삶을 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환경으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며 좌절하거나 낙심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성대하게 열린 잔칫집의 기쁨이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에 가득해야 합니다. 잔칫집은 당연히 ‘웃음’이 넘치고 ‘기쁨’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며, 느헤미야 8:10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하십니다.
잔칫집의 당연한 요소가 ‘기쁨’이라면, 또 다른 요소는 ‘손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잔칫집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지지리도 못살 때에는 어느 한 집의 잔치는 온 마을의 잔치였습니다. 그날만큼은 지나가는 나그네뿐만 아니라 이웃 동네의 거지들까지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잔칫집에는 넉넉한 인심과 기쁨의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나 교회는 너무나 적막합니다. 눈앞의 삶에 찌들어서 구원받은 삶의 감격도 기쁨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까지도 대접하여 기쁨을 나누다가 하나님을 대접하게 되었는데, 오늘의 우리는 점점 높은 담을 쌓아가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뜻이 맞고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모이며, 그것도 주일에 잠시뿐입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6:32-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현대어성경)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해서 너희가 상을 받을 줄 아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그것이 그렇게 장한 일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하고 있다.”
이제 우리 가정이 잔칫집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잔칫집의 기쁨과 북적거림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하는 교회로 회복해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계시록 2:4-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현대어성경)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3. 성도는 잔칫집의 일군입니다.
잔칫집 주인이 처음에 초대했던 자들이 모두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여기에서 잔치를 연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처음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선민인 유대인들이며, 잔칫집의 일군들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인은 처음 초청자들이 초대를 거절하자 두 번에 걸쳐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한 번은 도시의 거리와 골목으로, 또 한 번은 시골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는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초청입니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배려가 돋보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일군들의 신속하고 열심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들의 보고는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상황을 속이거나 인원수를 부풀려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주인의 명령에 철저하고 성실하게 순종하며 정직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은 일군인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미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서의 사명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에 그리스도의 일군을 “소금” “빛” “향기”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녹아야 맛을 내며, 빛은 자신을 희생해야 빛을 낼 수 있으며, 향기도 자신을 녹여 내어야 향기를 발산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헌신하고 희생하고 섬기고 봉사해야 함을 말합니다.
어린이들의 복음 송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손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나 나의 이익을 따로 남기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나 우리의 사랑은 따지는 게 없어요 아까운게 있다면 사랑 않는 거야 …” 그렇습니다. 오늘에 있어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주님께로 데려오는 일에는 자신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도 투자해야 하고, 시간도 투자해야 합니다. 이러한 투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본업이고 세상의 일은 부업입니다. 본업에는 많이 투자할수록 많이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20절에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또는 사업에서 성공을 하고 싶다면 여러분의 사명에 투자하십시오. 주인이 반드시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본문 21절의 “빨리 … 나가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음의 잔치에 초대하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십니다. 이제 안일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진노의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님의 잔칫집을 채웁시다.
한 여행자가 미국 북부지방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농장을 지나가는데 한 농부의 뒤를 수십 마리의 돼지들이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가 따르는 것이 아니고 양들이 목자를 따르듯 돼지들이 농부의 뒤를 졸졸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자는 하도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뒤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도살장이었습니다. 돼지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농부를 따라 서슴없이 도살장으로 들어가서 차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행가는 하도 이상해서 그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돼지들이 도살장까지 저항 없이 따라 왔습니까?”
그때 농부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보이면서 말합니다. “이 바구니 안에는 콩이 들어있습니다. 걸어가면서 이 콩을 한줌씩 떨어뜨리면 미련한 돼지는 떨어진 콩을 주워 먹으러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따라왔으니 미련한 놈들이지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집은 내가 아니라도 누구를 통해서라도 자리를 채우십니다. 누가복음 19:4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은 누구를 통해서든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내가 맡은 사명에 대하여 문책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내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역사가 끝나는 날 하늘에서 여실 큰 잔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잔치를 위하여 우리는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군 된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기쁨이 넘치는 잔칫집을 이루어야 하며, 우리 교회가 잔칫집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잔칫집에 사람들로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잔치는 준비 되었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므로 기회를 아껴서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본향의 잔칫집에 이를 때에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다.”라고 칭찬받을 수 있는 삶으로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눅 14:15-24,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로리 베스 존스’가 쓴 ‘C.E.O 예수’(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글 속에서 저자는 “예수님은 항상 축제상태에 계셨다.”라고 합니다. 한번은 열 살 바기 어린아이가 존스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세요?” 존스가 “모르겠는데”라고 하자, 어린아이가 장난기 어린 얼굴을 하고는 “앞으로 뛰어 오르면서 두 팔을 벌리고는 ‘짠-!’하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풍자적인 이야기지만 예수님은 항상 축제적인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최초의 기적도 가나의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잔칫집에 비유하기도 하셨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의 끝 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있을 큰 행사가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도 늘 기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21절에서는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 ”라고 표현하시며, 요한복음 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는 항상 기쁨이 충만한 축제의 삶이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하는 아버지의 기쁨 같은 그런 기쁨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기뻐했으며, 방탕하다가 돌아온 탕자는 다시 아들이 된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는 죽음의 자리에서 돌아온 자녀로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스바냐 3:17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돌아온 탕자들은 하나님의 자녀 됨과 더불어 영원한 기쁨의 삶을 얻은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충만한 곳이 곧 성도의 가정이며 교회입니다.
이번 5월은 가정의 달이자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가정과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본문의 배경과 전체 의미를 봅시다.
본문의 앞쪽에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손님들을 초청할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시도록 초청자를 잘 선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을 초청하여 대접하면 ‘의인들의 부활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사람은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본문의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잔치 시간이 되어 주인은 초청한 사람들의 집으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바쁜 일이 있어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종들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대단히 화가 나서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종들이 “명하신 대로 데려왔지만 아직도 빈 자리가 있습니다.”라고 다시 주인에게 보고합니다. 주인은 시골로 가서 “방랑자들, 또는 일터에서 이제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 사람들을 찾아오라. 그리고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이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이며,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총을 말씀하십니다.
2.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교회는 잔치하는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세상 삶에 찌들어 살라고 하심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듯이 택함 받은 성도는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세상의 찌든 삶에서 구원받은 하늘의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미 영혼의 생명을 얻었으며 영원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해야 함을 말합니다.
비록 아직은 세상에서 육신의 삶을 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환경으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며 좌절하거나 낙심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성대하게 열린 잔칫집의 기쁨이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에 가득해야 합니다. 잔칫집은 당연히 ‘웃음’이 넘치고 ‘기쁨’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며, 느헤미야 8:10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하십니다.
잔칫집의 당연한 요소가 ‘기쁨’이라면, 또 다른 요소는 ‘손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잔칫집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지지리도 못살 때에는 어느 한 집의 잔치는 온 마을의 잔치였습니다. 그날만큼은 지나가는 나그네뿐만 아니라 이웃 동네의 거지들까지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잔칫집에는 넉넉한 인심과 기쁨의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나 교회는 너무나 적막합니다. 눈앞의 삶에 찌들어서 구원받은 삶의 감격도 기쁨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까지도 대접하여 기쁨을 나누다가 하나님을 대접하게 되었는데, 오늘의 우리는 점점 높은 담을 쌓아가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뜻이 맞고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모이며, 그것도 주일에 잠시뿐입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6:32-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현대어성경)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해서 너희가 상을 받을 줄 아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그것이 그렇게 장한 일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하고 있다.”
이제 우리 가정이 잔칫집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잔칫집의 기쁨과 북적거림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하는 교회로 회복해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계시록 2:4-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현대어성경)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3. 성도는 잔칫집의 일군입니다.
잔칫집 주인이 처음에 초대했던 자들이 모두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여기에서 잔치를 연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처음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선민인 유대인들이며, 잔칫집의 일군들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인은 처음 초청자들이 초대를 거절하자 두 번에 걸쳐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한 번은 도시의 거리와 골목으로, 또 한 번은 시골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는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초청입니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배려가 돋보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일군들의 신속하고 열심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들의 보고는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상황을 속이거나 인원수를 부풀려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주인의 명령에 철저하고 성실하게 순종하며 정직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은 일군인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미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서의 사명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에 그리스도의 일군을 “소금” “빛” “향기”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녹아야 맛을 내며, 빛은 자신을 희생해야 빛을 낼 수 있으며, 향기도 자신을 녹여 내어야 향기를 발산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헌신하고 희생하고 섬기고 봉사해야 함을 말합니다.
어린이들의 복음 송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손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나 나의 이익을 따로 남기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나 우리의 사랑은 따지는 게 없어요 아까운게 있다면 사랑 않는 거야 …” 그렇습니다. 오늘에 있어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주님께로 데려오는 일에는 자신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도 투자해야 하고, 시간도 투자해야 합니다. 이러한 투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본업이고 세상의 일은 부업입니다. 본업에는 많이 투자할수록 많이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20절에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또는 사업에서 성공을 하고 싶다면 여러분의 사명에 투자하십시오. 주인이 반드시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본문 21절의 “빨리 … 나가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음의 잔치에 초대하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십니다. 이제 안일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진노의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님의 잔칫집을 채웁시다.
한 여행자가 미국 북부지방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농장을 지나가는데 한 농부의 뒤를 수십 마리의 돼지들이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가 따르는 것이 아니고 양들이 목자를 따르듯 돼지들이 농부의 뒤를 졸졸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자는 하도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뒤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도살장이었습니다. 돼지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농부를 따라 서슴없이 도살장으로 들어가서 차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행가는 하도 이상해서 그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돼지들이 도살장까지 저항 없이 따라 왔습니까?”
그때 농부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보이면서 말합니다. “이 바구니 안에는 콩이 들어있습니다. 걸어가면서 이 콩을 한줌씩 떨어뜨리면 미련한 돼지는 떨어진 콩을 주워 먹으러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따라왔으니 미련한 놈들이지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집은 내가 아니라도 누구를 통해서라도 자리를 채우십니다. 누가복음 19:4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은 누구를 통해서든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내가 맡은 사명에 대하여 문책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내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역사가 끝나는 날 하늘에서 여실 큰 잔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잔치를 위하여 우리는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군 된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기쁨이 넘치는 잔칫집을 이루어야 하며, 우리 교회가 잔칫집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잔칫집에 사람들로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잔치는 준비 되었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므로 기회를 아껴서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본향의 잔칫집에 이를 때에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다.”라고 칭찬받을 수 있는 삶으로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