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교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9,063회
작성일
2006-04-29 14:45
*** 자랑스러운 교회 / 살전 1:2-8
** 들어가는 말
데살로니가전서 1:2-8,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사람들은 이 시대를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신속하게 알아야 지금의 시대를 앞서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종 첨단의 전자기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개발되고 있으며, 앞 다투어 구매를 합니다. 이제는 인터넷도 휴대전화나 다른 휴대 기기들을 통하여 일하면서, 걸어 다니면서도 사용을 합니다. 이처럼 나날이 발전해 가는 과학의 영향을 받아서 모든 자료들이나 소문들이 단 몇 초 만에 전 지구촌을 휩쓸게 됩니다.
강원도 원주 근처에 ‘안흥’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안흥은 찐빵으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사람들은 안흥 찐빵을 맛보려고 보통 두세 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가게가 큰 것이 아닙니다. 작은 가게입니다.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며 북적입니다. 그 이유는 그 빵을 먹어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준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중요합니다. 이런 정보화 시대에는 국가나 사회, 교회, 나 자신에 이르기까지 좋은 이미지, 좋은 소문이 나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소문이 많이 퍼지면 잘되고 번성합니다. 그러나 나쁜 소문이 많이 퍼지면 순식간에 쇠퇴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생기게 되고 교회도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소문이 나는 자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포함하는 편지의 수신자는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으로 본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교회의 본이 되는 자랑할 만한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사랑스러운 교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1. 좋은 일로 기억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을 봅시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의 삶에서 나타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바울 전도단에게 기억된 교회였습니다. 성경에는 좋은 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일로 기억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좋은 일로 기억되는 대표적인 예로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좋은 기억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22절을 봅시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라고 증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후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왕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열왕기하14:3절에서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고, 열왕기하 22:2절에서는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의 별을 국기로 사용하여 다윗을 기억합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일로 기억되는 대표적인 예로 사울 왕을 들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 사무엘에게 눈물과 슬픔의 대상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5:35절입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을 든다면, 빌라도 총독이 있습니다. 그는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대표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가친척이나 이웃, 직장, 학교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소문이 나 있으며,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는 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소문이 나 있으며 어떻게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는 어떻게 기억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좋은 일로 기억되어야 하며,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기도할 때에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2절의 말씀처럼 그 성도만 생각하면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되는 성도가 있습니다. 반면에 좋지 않은 기억과 걱정과 염려로 기도하게 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7절을 봅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목회자에게 즐겁게 기억되고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 성도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일로 기억된다는 것은 믿음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과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행하는 헌신적인 봉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하며 인내의 삶입니다. 이는 성령 안에서 분명한 확신으로 실현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효과적인 신앙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물질을 드리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봉사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주님께 기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처럼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지만,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언을 듣게 된다면 이처럼 불행한 신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냉수 한 잔의 대접도 기억하시며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봉사 하나라도 주님이 기억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작은 봉사와 섬김에도 정성을 다 하십시오. 성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고, 교회당을 청소를 하고, 사회에서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작은 일에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도록 성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갚으시는 효과적인 신앙이 됩니다.
2. 본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6-8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동부의 작은 해안도시입니다. 이 작은 도시의 교회가 마케도니아 전 지역과 마케도니아 남쪽에 위치한 아가야에 까지 믿음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와 알바니아 남부, 유고슬라비아 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아가야도 지금의 그리스에 속합니다. 즉 작은 도시의 교회가 넓은 마케도니아 전 지역에 신뢰 받는 믿음으로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의 여러 지체된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그들의 기쁨과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교회가 아닙니까!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체된 교회들로부터, 더 나아가 믿지 않는 불신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착한 행실과 거룩한 삶으로 사회에서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등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본이 되려면 먼저 앞선 믿음의 사람들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본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3:1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십니다. 또한 빌립보서 3:17절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본을 보인 것은 어려움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은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과감히 우상을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핍박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사회의 환경을 거슬러 역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 온 초기에 유교적인 전통을 거슬러 집안의 제례의식을 중단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불교문화 가운데 집안의 제례의식을 중단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바꾸는 것은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가문과 신앙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문제였으며, 가족관계가 단절되는 것도 감수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믿음의 선조들이 순교의 피를 흘린 대가로 오늘과 같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와 같은 역경을 극복하고 복음으로 승리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였으며 내적으로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은 온 나라에 퍼졌으며 모든 교회의 본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이런 좋은 소문이 나도록 성도 개개인의 삶에서 본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서는 일본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일본 교회들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5만여 교회에 1200만 성도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비율입니다. 반면에 일본은 인구수만큼 우상들이 있다고 할 만큼 우상국가입니다.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성도의 수는 평균적으로 30여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1%의 성도들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정부가 시행하는 사회복지의 거의 전부를 교회가 담당하고 있으며,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신앙으로 삶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일례로, 사기죄, 무고죄, 배임 등의 사회의 물을 흐리는 죄질들이 우리나라의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기독교 인구의 비율이 20배나 많은 우리나라의 사회는 10배나 더 혼탁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정신 차리고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웃이나 직장이나 학교, 가족 공동체에서 믿을 만 하고, 아름다운 생활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이 지역사회에서 믿는 자로서 본이 되고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삶에서 본이 될 때에 본문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속으로 퍼져나가며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교회가 됩니다.
복음 전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며,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길이 사회에 좋은 일로 기억되며,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생활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소문이 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속에 퍼지게 되고,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 가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성도, 자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데살로니가전서 1:2-8,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사람들은 이 시대를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신속하게 알아야 지금의 시대를 앞서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종 첨단의 전자기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개발되고 있으며, 앞 다투어 구매를 합니다. 이제는 인터넷도 휴대전화나 다른 휴대 기기들을 통하여 일하면서, 걸어 다니면서도 사용을 합니다. 이처럼 나날이 발전해 가는 과학의 영향을 받아서 모든 자료들이나 소문들이 단 몇 초 만에 전 지구촌을 휩쓸게 됩니다.
강원도 원주 근처에 ‘안흥’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안흥은 찐빵으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사람들은 안흥 찐빵을 맛보려고 보통 두세 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가게가 큰 것이 아닙니다. 작은 가게입니다.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며 북적입니다. 그 이유는 그 빵을 먹어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준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중요합니다. 이런 정보화 시대에는 국가나 사회, 교회, 나 자신에 이르기까지 좋은 이미지, 좋은 소문이 나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소문이 많이 퍼지면 잘되고 번성합니다. 그러나 나쁜 소문이 많이 퍼지면 순식간에 쇠퇴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생기게 되고 교회도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소문이 나는 자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포함하는 편지의 수신자는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으로 본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교회의 본이 되는 자랑할 만한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사랑스러운 교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1. 좋은 일로 기억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을 봅시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의 삶에서 나타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바울 전도단에게 기억된 교회였습니다. 성경에는 좋은 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일로 기억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좋은 일로 기억되는 대표적인 예로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좋은 기억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22절을 봅시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라고 증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후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왕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열왕기하14:3절에서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고, 열왕기하 22:2절에서는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의 별을 국기로 사용하여 다윗을 기억합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일로 기억되는 대표적인 예로 사울 왕을 들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 사무엘에게 눈물과 슬픔의 대상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5:35절입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을 든다면, 빌라도 총독이 있습니다. 그는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대표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가친척이나 이웃, 직장, 학교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소문이 나 있으며,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는 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소문이 나 있으며 어떻게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는 어떻게 기억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좋은 일로 기억되어야 하며,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기도할 때에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2절의 말씀처럼 그 성도만 생각하면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되는 성도가 있습니다. 반면에 좋지 않은 기억과 걱정과 염려로 기도하게 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7절을 봅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목회자에게 즐겁게 기억되고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 성도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일로 기억된다는 것은 믿음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과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행하는 헌신적인 봉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하며 인내의 삶입니다. 이는 성령 안에서 분명한 확신으로 실현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효과적인 신앙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물질을 드리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봉사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주님께 기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처럼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지만,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언을 듣게 된다면 이처럼 불행한 신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냉수 한 잔의 대접도 기억하시며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봉사 하나라도 주님이 기억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작은 봉사와 섬김에도 정성을 다 하십시오. 성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고, 교회당을 청소를 하고, 사회에서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작은 일에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도록 성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갚으시는 효과적인 신앙이 됩니다.
2. 본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6-8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동부의 작은 해안도시입니다. 이 작은 도시의 교회가 마케도니아 전 지역과 마케도니아 남쪽에 위치한 아가야에 까지 믿음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와 알바니아 남부, 유고슬라비아 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아가야도 지금의 그리스에 속합니다. 즉 작은 도시의 교회가 넓은 마케도니아 전 지역에 신뢰 받는 믿음으로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의 여러 지체된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그들의 기쁨과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교회가 아닙니까!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체된 교회들로부터, 더 나아가 믿지 않는 불신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착한 행실과 거룩한 삶으로 사회에서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등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본이 되려면 먼저 앞선 믿음의 사람들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본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3:1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십니다. 또한 빌립보서 3:17절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본을 보인 것은 어려움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은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과감히 우상을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핍박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사회의 환경을 거슬러 역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 온 초기에 유교적인 전통을 거슬러 집안의 제례의식을 중단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불교문화 가운데 집안의 제례의식을 중단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바꾸는 것은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가문과 신앙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문제였으며, 가족관계가 단절되는 것도 감수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믿음의 선조들이 순교의 피를 흘린 대가로 오늘과 같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와 같은 역경을 극복하고 복음으로 승리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였으며 내적으로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은 온 나라에 퍼졌으며 모든 교회의 본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이런 좋은 소문이 나도록 성도 개개인의 삶에서 본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서는 일본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일본 교회들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5만여 교회에 1200만 성도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비율입니다. 반면에 일본은 인구수만큼 우상들이 있다고 할 만큼 우상국가입니다.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성도의 수는 평균적으로 30여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1%의 성도들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정부가 시행하는 사회복지의 거의 전부를 교회가 담당하고 있으며,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신앙으로 삶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일례로, 사기죄, 무고죄, 배임 등의 사회의 물을 흐리는 죄질들이 우리나라의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기독교 인구의 비율이 20배나 많은 우리나라의 사회는 10배나 더 혼탁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정신 차리고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웃이나 직장이나 학교, 가족 공동체에서 믿을 만 하고, 아름다운 생활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이 지역사회에서 믿는 자로서 본이 되고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삶에서 본이 될 때에 본문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속으로 퍼져나가며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교회가 됩니다.
복음 전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며,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길이 사회에 좋은 일로 기억되며,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생활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소문이 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속에 퍼지게 되고,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 가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성도, 자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