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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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4-29 14:42
***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는 사람 / 예레미야 33:1-9
** 들어가는 말
렘 33:1-9,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화단을 망쳐 버리는 방법을 아십니까? 그 꽃밭에 불을 지른다거나 짓밟아 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를 하지 않아도 쉽게 망칠 수 있는 비결은 그 화단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저절로 망쳐지게 됩니다.
또 어떻게 하면 이웃 간의 우정을 망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돌아다니면서 마구 헐뜯고 비방을 하면 그 이웃과의 우정을 망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우리의 삶을 망쳐 버리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다거나, 방탕하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버려두면 우리의 인생은 저절로 망쳐 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하면 망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세상 쾌락으로 방탕하거나, 진리를 철저히 배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인 아무런 관심도 갖지 말고, 그냥 육신의 욕구대로 버려두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영혼은 무참히 망쳐서 멸망으로 갈 것입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이와 같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남 유다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은 멸망을 한 해 정도 앞둔 위기의 시대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이미 134년 전인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도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남 유다의 멸망당할 것과 그 후의 회복에 대한 말씀까지 미리 보여주십니다.
왜 아직 멸망되지도 않은 남 유다에 대하여 이렇게 멸망과 회복까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경건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경건한 성도들이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소망하며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성도들에게 비록 환난의 날이 이를지라도 기도의 줄을 놓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일을 행하시고, 일을 만들어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이루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효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봅시다.
1. 환난의 시기에도 경건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높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더욱 즐겁고 신나는 일이겠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이름만 들어도 기쁘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행하는 모든 선을 듣게 될 땅의 모든 민족들 앞에서 그 성읍이 내게 기쁨의 이름과 찬양과 영예가 되리라. 또 그들은 내가 이 성읍에 마련하는 모든 복과 모든 번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한글 킹 제임스)라고 하십니다. 정말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시점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징계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게 되며 고통스러운 포로생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5절을 봅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이제 곧 남 유다가 겪게 될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남 유다가 이 무시무시한 징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5절 후반절에서 “그들의 모든 죄악”때문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의 시기에도 하나님께서는 은총 베푸시는 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의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가복음 13:20절을 봅시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기 직전에 일어나게 되는 환난의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엘리야 시대에도 모두가 타락하여 우상을 따라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셔서 경건한 칠천 명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그 환난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환경도 만만찮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위기의 시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지구촌은 위태롭게 버텨가고 있습니다. 국제정세도 그렇지만, 환경적인 재난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구의 자원도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화석 연료가 이제 거의 바닥이 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영적인 환경은 더욱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들이, 아니 세계 교회들이 영적인 갈급함으로 생수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영적인 침체를 벗어나 보려고 길을 찾고 있습니다. 아모스 8:11절을 봅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라면 ‘마음을 여미고 경건의 삶을 이루도록 힘써야’합니다.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며 찬송과 영광이 되기를 원한다면 경건한 마음을 추슬러야 합니다. 이 경건한 삶을 베드로전서 3:10-11절에서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또한 야고보서 1:27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쉬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남 유다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신들의 뜻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자신들의 생각대로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멸망의 길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며 찬송과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4-5절의 환경과 6-9절의 환경은 완전히 다릅니다. 극과 극의 두 환경 사이에 들어가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바로 3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는 변화를 주도하는 촉매제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비밀한 계획들까지도 이루게 합니다.
에스겔 36:35-37절을 봅시다.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이 말씀도 역시 본문의 말씀과 연결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도하시지만 그래도 이 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기도 없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도,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수 있는 길도, 문제가 해결 되는 길도, 구원에 이르는 길도, 성도에게 있어서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도뿐입니다. 기도 없이 세상생활에 뛰어 드는 것은 마치 운항 중인 비행기에서 낙하산 없이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피곤하거나 일이 많아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까?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구두 수선공이 어느 날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나의 아침기도 시간에 대해 상담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나의 고객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서 그들은 모두 구두가 한 켤레씩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의 구두를 저녁 늦게야 받아 가지고 거의 밤새도록 수선하는 일을 합니다.”
“참 귀한 일을 하시는군요.”
“그렇지만 새벽녘이 되어서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때가 많지요. 그 사람들이 일하러 가기 전에 구두를 준비해놓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여쭙는 것인데, 나의 아침기도 시간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요?”
“그동안은 어떻게 하였나요?”
“어떤 때는 기도를 짧게 하고는 다시 일을 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언짢습니다. 또 어떤 때는‘주님, 죄송해요’ 하고는 그냥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뭔가 허전해서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구두에서 망치를 들어올릴 때면 이따금씩 나의 가슴이 이렇게 한숨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나는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다. 아침기도조차 할 수 없으니…’ ”
그는 이 말을 마치고 나서 또 한숨을 지었습니다. 수선공의 말을 듣고 있던 랍비가 말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아침기도보다 그 한숨 소리를 더 값지게 여길 것입니다.”
영의 생명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한숨이라도 크게 내 쉬십시오. 하나님은 그 한숨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영의 삶을 염려하는 한숨 소리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유창한 언어가 아니어도, 논리적이지 않아도, 문학적이지 않아도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한숨과 푸념까지도 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고 찬송과 영광이 되려면 부르짖는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삼상 12:23절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환난이 다가오는 시대에 성도들이 깊이 생각하고 이루어야 할 삶은 경건함과 기도입니다. 외적인 삶에서는 하나를 이루는 화평함과 거룩한 생활을 이루며, 내적인 삶에서는 경건함과 기도의 생활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건한 삶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베드로전서 3:10-11절에서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1:27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 피곤하다.”고 핑계만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자기에게 속한 것에만 온통 마음을 쏟고, 투자하고, 매인다면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는 언제 준비하겠습니까? 누가복음 12:20-21절에서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는 섬김과 세상의 더러움에서 자기를 지키는 거룩함과 환경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촉매제인 부르짖는 기도로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렘 33:1-9,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화단을 망쳐 버리는 방법을 아십니까? 그 꽃밭에 불을 지른다거나 짓밟아 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를 하지 않아도 쉽게 망칠 수 있는 비결은 그 화단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저절로 망쳐지게 됩니다.
또 어떻게 하면 이웃 간의 우정을 망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돌아다니면서 마구 헐뜯고 비방을 하면 그 이웃과의 우정을 망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우리의 삶을 망쳐 버리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다거나, 방탕하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버려두면 우리의 인생은 저절로 망쳐 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하면 망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세상 쾌락으로 방탕하거나, 진리를 철저히 배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인 아무런 관심도 갖지 말고, 그냥 육신의 욕구대로 버려두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영혼은 무참히 망쳐서 멸망으로 갈 것입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이와 같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남 유다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은 멸망을 한 해 정도 앞둔 위기의 시대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이미 134년 전인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도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남 유다의 멸망당할 것과 그 후의 회복에 대한 말씀까지 미리 보여주십니다.
왜 아직 멸망되지도 않은 남 유다에 대하여 이렇게 멸망과 회복까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경건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경건한 성도들이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소망하며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성도들에게 비록 환난의 날이 이를지라도 기도의 줄을 놓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일을 행하시고, 일을 만들어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이루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효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봅시다.
1. 환난의 시기에도 경건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높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더욱 즐겁고 신나는 일이겠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이름만 들어도 기쁘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행하는 모든 선을 듣게 될 땅의 모든 민족들 앞에서 그 성읍이 내게 기쁨의 이름과 찬양과 영예가 되리라. 또 그들은 내가 이 성읍에 마련하는 모든 복과 모든 번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한글 킹 제임스)라고 하십니다. 정말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시점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징계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게 되며 고통스러운 포로생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5절을 봅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이제 곧 남 유다가 겪게 될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남 유다가 이 무시무시한 징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5절 후반절에서 “그들의 모든 죄악”때문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의 시기에도 하나님께서는 은총 베푸시는 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의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가복음 13:20절을 봅시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기 직전에 일어나게 되는 환난의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엘리야 시대에도 모두가 타락하여 우상을 따라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셔서 경건한 칠천 명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그 환난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환경도 만만찮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위기의 시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지구촌은 위태롭게 버텨가고 있습니다. 국제정세도 그렇지만, 환경적인 재난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구의 자원도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화석 연료가 이제 거의 바닥이 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영적인 환경은 더욱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들이, 아니 세계 교회들이 영적인 갈급함으로 생수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영적인 침체를 벗어나 보려고 길을 찾고 있습니다. 아모스 8:11절을 봅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라면 ‘마음을 여미고 경건의 삶을 이루도록 힘써야’합니다.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며 찬송과 영광이 되기를 원한다면 경건한 마음을 추슬러야 합니다. 이 경건한 삶을 베드로전서 3:10-11절에서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또한 야고보서 1:27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쉬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남 유다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신들의 뜻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자신들의 생각대로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멸망의 길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며 찬송과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4-5절의 환경과 6-9절의 환경은 완전히 다릅니다. 극과 극의 두 환경 사이에 들어가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바로 3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는 변화를 주도하는 촉매제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비밀한 계획들까지도 이루게 합니다.
에스겔 36:35-37절을 봅시다.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이 말씀도 역시 본문의 말씀과 연결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도하시지만 그래도 이 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기도 없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도,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수 있는 길도, 문제가 해결 되는 길도, 구원에 이르는 길도, 성도에게 있어서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도뿐입니다. 기도 없이 세상생활에 뛰어 드는 것은 마치 운항 중인 비행기에서 낙하산 없이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피곤하거나 일이 많아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까?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구두 수선공이 어느 날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나의 아침기도 시간에 대해 상담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나의 고객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서 그들은 모두 구두가 한 켤레씩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의 구두를 저녁 늦게야 받아 가지고 거의 밤새도록 수선하는 일을 합니다.”
“참 귀한 일을 하시는군요.”
“그렇지만 새벽녘이 되어서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때가 많지요. 그 사람들이 일하러 가기 전에 구두를 준비해놓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여쭙는 것인데, 나의 아침기도 시간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요?”
“그동안은 어떻게 하였나요?”
“어떤 때는 기도를 짧게 하고는 다시 일을 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언짢습니다. 또 어떤 때는‘주님, 죄송해요’ 하고는 그냥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뭔가 허전해서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구두에서 망치를 들어올릴 때면 이따금씩 나의 가슴이 이렇게 한숨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나는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다. 아침기도조차 할 수 없으니…’ ”
그는 이 말을 마치고 나서 또 한숨을 지었습니다. 수선공의 말을 듣고 있던 랍비가 말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아침기도보다 그 한숨 소리를 더 값지게 여길 것입니다.”
영의 생명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한숨이라도 크게 내 쉬십시오. 하나님은 그 한숨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영의 삶을 염려하는 한숨 소리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유창한 언어가 아니어도, 논리적이지 않아도, 문학적이지 않아도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한숨과 푸념까지도 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고 찬송과 영광이 되려면 부르짖는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삼상 12:23절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환난이 다가오는 시대에 성도들이 깊이 생각하고 이루어야 할 삶은 경건함과 기도입니다. 외적인 삶에서는 하나를 이루는 화평함과 거룩한 생활을 이루며, 내적인 삶에서는 경건함과 기도의 생활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건한 삶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베드로전서 3:10-11절에서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1:27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 피곤하다.”고 핑계만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자기에게 속한 것에만 온통 마음을 쏟고, 투자하고, 매인다면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는 언제 준비하겠습니까? 누가복음 12:20-21절에서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는 섬김과 세상의 더러움에서 자기를 지키는 거룩함과 환경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촉매제인 부르짖는 기도로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