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감동케 하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414회 작성일 2006-04-10 00:07
*** 감동케 하는 사람 / 눅 7:2-10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7:2-10,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관계를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두 마리의 고슴도치는 추위를 이겨보려고 서로 꼭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떨어져야 했습니다. 서로의 가시에 찔려서 아팠기 때문입니다. 떨어지면 춥고 가까이 하면 아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쇼펜하우어는
“떨어져 있을 때의 추위와 붙으면 가시에 찔리는 아픔 사이를 반복하다가 우리는 결국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고 인간관계를 비유했습니다.

한자로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를 지으리라.”(창2:18)고 하시며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삶과 자기 일에만 몰두해서 남들이 보기에는 이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늘 자기를 감추고 상대방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피차 간섭할 일도 없고 부딪칠 일도 없기 때문에 부담이 없습니다. 게다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일도 없게 됩니다. 이렇게 상대방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기를 방어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일컬어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만 만나는 기능적인 만남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광대 같은 말장난과 개그에 몰입하는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피를 나눈 혈육들도 돈과 재물 앞에서는 무너져 내리는 부실한 관계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에는 별로 감동할 일들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동안 감동하는 일들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 일은 얼마나 있었습니까?

이 시간의 본문말씀에는 진한 감동이 잔잔하게 퍼지는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낯선 이방인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까지 감동시켰습니다. 이러한 감동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감동이 있는 인생이 아름답고 복된 인생입니다. 감동은 값비싼 어떤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의 “웰컴 투 동막골”이나 “집으로”, “말아톤”같은 그저 그런 수수한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주인공도 이런 감동을 자아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감동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본문말씀을 통하여 그 길을 배워봅시다.

본문에 등장하는 ‘감동맨’은 가버나움에 주둔하는 로마군의 백부장입니다. 이 사람은 피지배 민족인 유대사회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로마 황제로부터 파송된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역사의 기록에 보면, 이런 주둔군들은 대부분이 돈을 밝혀서 주민들을 협박하여 착취거나 뇌물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전파하는 세례요한에게 군병들이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세례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한글킹제임스, 눅 3:14)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 받는 민족들은 파견군대를 상대로 저항운동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백부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단히 세심한 배려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어떤 부분이 예수님과 사람들을 감동케 했는지 찾아봅시다.

먼저, 그는 자신의 하인에 대한 주밀한 생각과 배려가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에게는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종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종이나 노예의 죽음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종이나 노예는 부리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종을 대단히 아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인의 병이 ‘중풍병’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당시의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어서 백부장이 안타까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백부장에게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백부자의 군대가 치안유지를 위한 군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도시 출입에 대하여 밝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즉시 유대 인의 장로들을 불러서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백부장의 이런 행동은 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도 아닌 다른 민족의 종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 그것도 군인의 신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오늘에 있어서 자기 집에 일하는 가정부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당시의 종은 오늘의 가정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적인 차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백부장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주밀한 생각과 배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감동케 하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직장의 동료들에 대한 주밀한 생각과 배려를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주도면밀한 생각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바쁜 일정으로 잠시 쉴 틈이 없는 제자들을 따로 조용한 곳으로 보내셔서 쉬게 하셨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주리고 있는 백성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비록 배반하고 낙향한 제자들이었지만 추운 새벽에 빈 배로 허탈하게 돌아올 제자들을 생각하시면서 해변에 숯불을 피우시고 따뜻한 음식까지 준비해 두셨습니다. 장남을 잃고 슬픔이 잠겨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기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주밀한 생각과 배려가 사람을 감동케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백부장은 이웃을 감동케 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본문 4-5절을 봅시다.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
백부장은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가버나움의 장로들 몇 명을 청하여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런데 유대 장로들이 흔쾌히 나서서 백부장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소원을 전합니다. 이런 일은 당시의 역사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일반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인 장로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이방인 군대 백부장을 두둔하고 높이겠습니까? 오히려 역사에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을 상대로 저항운동으로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유대 장로들이 백부장을 위하여 나서서 돕는 이유를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다.”고 밝힙니다. 권력을 가진 백부장이 먼저 피지배 민족을 사랑으로 대했으며, 그 박봉을 털어서 회당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회당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당보다 중요성이 더했습니다. 가버나움의 유대인들은 백부장의 사랑에 감동을 먹은 것입니다. 사랑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휴가를 얻어 시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머물고 있는 집의 일을 도우면서 암소를 외양간에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암소는 앞발로 버티면서 도대체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때리고 끌고 아무리 힘을 써도 암소를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어린 소녀가 안돼 보였던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소의 콧잔등을 천천히 몇 번을 쓰다듬더니 자기 뺨을 암소의 뺨에 대고는 비벼댔습니다. 그리고는 암소의 고삐를 잡고 부드럽게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자는 그 일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동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아니면 이웃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감동은 사람을 부드럽게 합니다. 백부장의 이웃사랑은 피지배민족의 응어리진 가슴을 녹였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사람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주밀한 생각과 따뜻한 배려는 사람을 감동케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시듯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두 가지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14절을 봅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화평은 사랑으로 말미암는 사람사이의 평화입니다. 이제 우리 주변을 향하여 관심을 돌립시다.

또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 6-9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장로들의 청을 듣고 백부장의 집으로 향하고 계실 때에, 백부장은 또 다른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친구들은 백부장의 말을 예수님께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즉 ‘너무 신기하고 놀랍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들에게서 조차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대한 믿음을 처음으로 만난 것입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이 예수님을 완전히 감동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하시도록 하는 중요한 길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풍병에게 명령하셔도 그것들이 순종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도마처럼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하는 그런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믿음은 아닙니까? 아니면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영광과 능력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을 거듭 원망하고 불평하고 의심하고 헛된 욕망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지극히 육신적이고 초보적인 믿음의 소유자는 아닌지요?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가까운 가족과 일가친척과 이웃을 향하는 주밀한 생각과 배려와 배품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지속적으로 진실하게 나타나게 될 때에 사람을 감동케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사람과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생활 속에서 늘 체험하면서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부요하고 더불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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