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부요한 자니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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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4-10 00:04
*** 네가 부요한 자니라. / 계 2:8-11
**들어가는 말
계시록 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영국 런던에 있는 ‘워커 미술관’에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은 고대 도시인 ‘폼페이’가 ‘베스비우스’ 화산폭발로 인하여 매몰당하기 직전의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용암은 붉은 강이 되어 폼페이로 향하고 있으며, 폭발로 인한 불덩어리와 검은 화산재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폼페이 성은 온통 불길이 치솟고 검은 화산재로 인하여 숨을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성을 빠져나가려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창을 들고 묵묵히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 아래에 기록된 제목이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즉 충성은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권면하십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죽음에 직면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내게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삶의 자세는 “생명을 다하는 충성”입니다. 이것을 “신실함”이라고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은 두 교회 중 한 교회이며, 주님으로부터 ‘신실함을 인정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는 기원전 4세기에 재건된 터키의 아름다운 고대도시입니다. 현재에는 터키의 이즈미르 주(州)에 속하며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은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이즈미르’시입니다. 인구는 2000년 당시 225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입니다.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신실함을 인정받은 서머나 교회는 믿음을 잘 지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번성하는 도시로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이 서머나 교회를 통하여 배워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으며, 핍박으로 인한 고난이 많았지만 주님으로부터 “부요한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이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기를 기대하시며 ‘진정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권면을 잘 지켜 충성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며,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1. 서머나 교회의 환경을 봅시다.
서머나는 도시 계획이 잘 되어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협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도시 중심으로부터 잘 닦여져 있는 golden street (황금의 거리)라고 불리는 도로를 따라 이방 신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①시벨레(자연의 여신, ‘신들의 어머니’라고 불림) ②아폴로(태양신) ③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 ④아프로디테(비너스, 미의 여신) ⑤제우스(신들의 아버지, 최고의 신) 신전 등이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초라한 교회와 그리스 신들의 장엄한 신전은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의 위협은 ‘로마 황제 숭배의 최고 중심지’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위협은 ‘거대한 유대인 집단’이었습니다. 특히,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살시키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서머나에는 유명한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였던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 감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경건한 폴리캅 감독을 죽이기 위하여 서머나 시민들을 충동질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은 교사요,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며,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거나 경배하지 말도록 많은 사람을 가르친, 신들을 파괴한 자” 라고 증언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와 똑 같은 짓을 했던 것입니다.
주후156년 2월 2일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가 된 폴리캅이 순교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신상을 참배하기를 거절했던 폴리캅과 인근지역 성도들 11명이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폴리캅의 인격과 덕망을 흠모하던 총독은 “예수를 욕하고 황제의 신상에 절하면. 당장에 풀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폴리캅은 “86년 동안 내가 섬겨온 주님, 그 분은 나에게 한 번도 잘못을 행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총독이 다시 “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너를 야수의 밥이 되게 하겠다.”고 하자 폴리캅은 조용히 “어서 맹수를 부르시오.”라고 합니다. 총독은 다시 “네가 맹수를 두려워 않으니 너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합니다. “총독이여, 잠시 있다가 꺼질 이 불보다 장차 심판을 위해 예비 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을 두려워하시오.”라며 결국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불꽃이 그의 몸을 태울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날, 이 시간, 은혜롭게도 나를 그리스도의 잔에 참례하게 해 주시고,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될 만한 가치를 가진 자로 여겨 주시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그의 육신이 불로 얼른 태워지지 않자 그는 칼에 찔려 순교하게 됩니다.
이처럼 서머나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교회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죽기까지 믿음을 지킨 신앙의 영웅들로 가득했습니다.
2.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으며 고난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이요 나중”이라 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서머나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입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주님은 서머나 성도들의 모든 일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주님은 고난당하는 서머나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즉 서머나 성도들과 함께 하시며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고난을 이겨내라는 위로이며 격려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이 소망으로 인하여 서머나 성도들은 폴리캅 감독처럼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모든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천국의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이 반드시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동행을 약속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환경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38-3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러한 소망도 영광도 그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1) 서머나 교회에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시련”(tribulation ‘환난’ / 헬라어 ‘틀립시스’) 은 ‘억압’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거대한 둥근 돌 밑에 깔려서 서서히 부서져 죽게 하는 고문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서머나 성도들에게는 일의 억압, 염려의 억압, 물질적인 환경의 억압, 반대와 적의와 우상숭배로 인한 박해의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긴장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2)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궁핍”이라는 단어는 프토케이안(πτωχεὶαν)으로서 ‘가난(poverty)’ 보다 더한 ‘극빈(destitution)’을 의미합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의미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①페네스(πὲνης)로서, 자기의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여분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가난을 말합니다. 즉, “빠듯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프토케이안(πτωχεὶαν)으로서, 전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처럼)
세상적인 부로 볼 때 서머나 성도들은 극빈하였습니다. 그들이 왜 이처럼 가난했을까요? 히브리서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히브리서 10:34절입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긴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이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산업을 빼앗기거나, 직업을 잃거나 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서머나는 부유한 도시였지만, 서머나의 성도들은 부정 축재나 세상과 타협하면서까지 부를 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3)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악의에 찬 핍박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통치국인 로마에 달라붙어 그리스도인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 유명한 ‘네로’ 황제에게는 유대인 처첩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네로의 여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유대인들을 ‘사단의 회’라고 불렀습니다. 이 유대인들 덕분에 초대 교회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성도들은 부요한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서머나 성도들에게 ‘네가 복음 때문에 환난당하고 물질적으로 궁핍함을 견디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극빈한 삶으로 고통 받는 서머나 성도들을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서머나 성도들의 삶을 주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극빈한 삶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부요함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서머나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곧 다가오게 될 얼마동안의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충성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고난의 기간을 “십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이라는 말은 ‘짧은 기간’을 뜻하는 헬라어 절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약속한 “생명의 면류관(στὲφανος)”은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주후156년 2월 2일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인 폴리캅 감독과 11명의 성도들이 체포되어 폴리캅 감독이 순교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다 순교할 필요는 없지만, 순교적 신앙으로 매일을 살도록 권면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상급이 순교자의 상급이며, 전도자의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충성됨’은 영원하고 진정한 부요함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도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폴리캅 감독처럼 어떤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사업상 불이익을 당하고, 직장의 승진에서 배제되고, 미래가 불투명해진다해도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주님이심을 선언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서머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한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이겨내는 성도들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둘째 사망”이란 세상 끝 날에 있게 될 하나님의 생명심판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영원히 결별되는 지옥행을 면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의 부요함은 잠깐입니다. 잠언 23:5절에서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으며,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6:19-20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땅에서의 잠깐의 부요함보다 영원한 삶의 진정한 부요함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계시록 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영국 런던에 있는 ‘워커 미술관’에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은 고대 도시인 ‘폼페이’가 ‘베스비우스’ 화산폭발로 인하여 매몰당하기 직전의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용암은 붉은 강이 되어 폼페이로 향하고 있으며, 폭발로 인한 불덩어리와 검은 화산재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폼페이 성은 온통 불길이 치솟고 검은 화산재로 인하여 숨을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성을 빠져나가려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창을 들고 묵묵히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 아래에 기록된 제목이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즉 충성은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권면하십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죽음에 직면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내게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삶의 자세는 “생명을 다하는 충성”입니다. 이것을 “신실함”이라고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은 두 교회 중 한 교회이며, 주님으로부터 ‘신실함을 인정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는 기원전 4세기에 재건된 터키의 아름다운 고대도시입니다. 현재에는 터키의 이즈미르 주(州)에 속하며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은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이즈미르’시입니다. 인구는 2000년 당시 225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입니다.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신실함을 인정받은 서머나 교회는 믿음을 잘 지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번성하는 도시로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이 서머나 교회를 통하여 배워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으며, 핍박으로 인한 고난이 많았지만 주님으로부터 “부요한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이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기를 기대하시며 ‘진정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권면을 잘 지켜 충성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며,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1. 서머나 교회의 환경을 봅시다.
서머나는 도시 계획이 잘 되어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협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도시 중심으로부터 잘 닦여져 있는 golden street (황금의 거리)라고 불리는 도로를 따라 이방 신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①시벨레(자연의 여신, ‘신들의 어머니’라고 불림) ②아폴로(태양신) ③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 ④아프로디테(비너스, 미의 여신) ⑤제우스(신들의 아버지, 최고의 신) 신전 등이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초라한 교회와 그리스 신들의 장엄한 신전은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의 위협은 ‘로마 황제 숭배의 최고 중심지’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위협은 ‘거대한 유대인 집단’이었습니다. 특히,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살시키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서머나에는 유명한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였던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 감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경건한 폴리캅 감독을 죽이기 위하여 서머나 시민들을 충동질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은 교사요,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며,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거나 경배하지 말도록 많은 사람을 가르친, 신들을 파괴한 자” 라고 증언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와 똑 같은 짓을 했던 것입니다.
주후156년 2월 2일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가 된 폴리캅이 순교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신상을 참배하기를 거절했던 폴리캅과 인근지역 성도들 11명이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폴리캅의 인격과 덕망을 흠모하던 총독은 “예수를 욕하고 황제의 신상에 절하면. 당장에 풀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폴리캅은 “86년 동안 내가 섬겨온 주님, 그 분은 나에게 한 번도 잘못을 행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총독이 다시 “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너를 야수의 밥이 되게 하겠다.”고 하자 폴리캅은 조용히 “어서 맹수를 부르시오.”라고 합니다. 총독은 다시 “네가 맹수를 두려워 않으니 너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합니다. “총독이여, 잠시 있다가 꺼질 이 불보다 장차 심판을 위해 예비 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을 두려워하시오.”라며 결국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불꽃이 그의 몸을 태울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날, 이 시간, 은혜롭게도 나를 그리스도의 잔에 참례하게 해 주시고,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될 만한 가치를 가진 자로 여겨 주시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그의 육신이 불로 얼른 태워지지 않자 그는 칼에 찔려 순교하게 됩니다.
이처럼 서머나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교회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죽기까지 믿음을 지킨 신앙의 영웅들로 가득했습니다.
2.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으며 고난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이요 나중”이라 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서머나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입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주님은 서머나 성도들의 모든 일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주님은 고난당하는 서머나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즉 서머나 성도들과 함께 하시며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고난을 이겨내라는 위로이며 격려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이 소망으로 인하여 서머나 성도들은 폴리캅 감독처럼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모든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천국의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이 반드시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동행을 약속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환경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38-3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러한 소망도 영광도 그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1) 서머나 교회에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시련”(tribulation ‘환난’ / 헬라어 ‘틀립시스’) 은 ‘억압’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거대한 둥근 돌 밑에 깔려서 서서히 부서져 죽게 하는 고문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서머나 성도들에게는 일의 억압, 염려의 억압, 물질적인 환경의 억압, 반대와 적의와 우상숭배로 인한 박해의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긴장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2)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궁핍”이라는 단어는 프토케이안(πτωχεὶαν)으로서 ‘가난(poverty)’ 보다 더한 ‘극빈(destitution)’을 의미합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의미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①페네스(πὲνης)로서, 자기의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여분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가난을 말합니다. 즉, “빠듯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프토케이안(πτωχεὶαν)으로서, 전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처럼)
세상적인 부로 볼 때 서머나 성도들은 극빈하였습니다. 그들이 왜 이처럼 가난했을까요? 히브리서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히브리서 10:34절입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긴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이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산업을 빼앗기거나, 직업을 잃거나 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서머나는 부유한 도시였지만, 서머나의 성도들은 부정 축재나 세상과 타협하면서까지 부를 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3)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악의에 찬 핍박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통치국인 로마에 달라붙어 그리스도인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 유명한 ‘네로’ 황제에게는 유대인 처첩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네로의 여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유대인들을 ‘사단의 회’라고 불렀습니다. 이 유대인들 덕분에 초대 교회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성도들은 부요한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서머나 성도들에게 ‘네가 복음 때문에 환난당하고 물질적으로 궁핍함을 견디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극빈한 삶으로 고통 받는 서머나 성도들을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서머나 성도들의 삶을 주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극빈한 삶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부요함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서머나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곧 다가오게 될 얼마동안의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충성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고난의 기간을 “십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이라는 말은 ‘짧은 기간’을 뜻하는 헬라어 절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약속한 “생명의 면류관(στὲφανος)”은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주후156년 2월 2일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인 폴리캅 감독과 11명의 성도들이 체포되어 폴리캅 감독이 순교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다 순교할 필요는 없지만, 순교적 신앙으로 매일을 살도록 권면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상급이 순교자의 상급이며, 전도자의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충성됨’은 영원하고 진정한 부요함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도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폴리캅 감독처럼 어떤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사업상 불이익을 당하고, 직장의 승진에서 배제되고, 미래가 불투명해진다해도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주님이심을 선언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서머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한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이겨내는 성도들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둘째 사망”이란 세상 끝 날에 있게 될 하나님의 생명심판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영원히 결별되는 지옥행을 면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의 부요함은 잠깐입니다. 잠언 23:5절에서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으며,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6:19-20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땅에서의 잠깐의 부요함보다 영원한 삶의 진정한 부요함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