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의지할 인생의 지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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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3-19 17:09
*** 내가 의지할 인생의 지주 / 갈 1:11-24
갈 1:11-24,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어느 어머니가 어린 딸과 함께 장보러 갔습니다. 필요한 식료품을 다 산 후에 딸에게 과자를 사 먹으라고 돈을 얼마 주었습니다. 소녀는 가게의 진열대 앞에 서서 마음에 드는 것을 찾느라 이것저것 열심히 눈으로 뒤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상자 속에 있는 것을 가리키면서 \"저것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점원이 그것을 꺼내려는 순간 소녀는 얼른 다른 것을 가리키며 \"그것 말고 이것으로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도 번복하기를 몇 번이나 하고서도 결정을 짓지 못하자 지켜보던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얘야, 어서 살 것을 정하려무나.”하며 딸을 다그쳤습니다. 그 때, 어린 딸은 “그렇지만 엄마, 돈이 하나 밖에 없지 않아요!”라고 단순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대답을 했습니다.
“돈이 하나 밖에!” 소녀는 하나밖에 없는 돈을 단 한 번의 기회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도록 가장 맛있는 과자를 골라야 했던 것이지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단 한번의 생애!’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 못 살았다고 물건을 사듯이 무르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삶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고, 어려운 듯 하면서도 쉬운 길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따라가면 쉬운 길이지만, 주님을 홀로 두고 모든 것을 자기가 짊어지고 가게 되면 어려운 길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을 후회를 남기지 않는 최상의 삶으로 남기려면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시편 37:5-6절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하십니다.
어떤 성도가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믿어야 잘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 믿으시오. 거지 오쟁이 짊어지듯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참고,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가방 같은 자루’를 말함). 즉 ‘죽으나 사나 오직 예수님께 푹 빠져라.’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해 미쳤다.’고 고백했습니다. 확실히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의 표어는 “미치자. 크게 미치자. 예수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사장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고 코카콜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삶이든지 신앙의 삶이든지 열광적이 아니고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TV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과정’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프로에서도 거의 일에 미친 사람들이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런 열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설령 열정이 있다고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남의 것 구경하듯 마음만 설레다가 마는 그런 신앙이 대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의 신앙의 삶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과 의논하지도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 푹 빠져야만 합니다. 야고보서 4:2하-3절을 봅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부터 3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시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광야에서의 훈련은 세상의 어떤 것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며,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는 훈련이었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을 치며 훈련 받은 것도 그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환경이나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시며, 시편 62:10절에서는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과 의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그 과거의 잔재를 씻어내고, 대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훈련의 자리가 광야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광야가 있습니까?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삭막한 바람이 이는 광야와 같은 삶이 있습니까? 아무리 일을 해도 끝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으로 주저앉고 싶습니까? 이런 인생의 광야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인생의 지주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성도가 한숨을 푹 쉬면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조금만 더 주시면 힘이 될 텐데!”그 성도는 ‘하나님께서 늘 부족한 듯이 주시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고 살기가 힘 든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주시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만족하도록 풍족하게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인색하셔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를 아십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 있으면 만족하고 감사할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한계를 넘어서면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됨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파멸로 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잠언 30:8,9절에서 ‘아굴’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내게 주어진 일과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내 인생의 지주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해야 하는지를 봅시다.
본문13-14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열광적인 유대 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지극히 오만했고 잘못된 자기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은 하나님의 복음에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박해자였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소멸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예법이라고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는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핍박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복음을 방해하는 훼방꾼이었습니다. 경찰이 하는 일을 방해하면 무슨 죄입니까? 공무집행 방해죄입니다. 국가가 세운 법을 집행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한 국가의 질서 유지를 방해해도 큰 죄가 되는데, 사울은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이니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사울의 훼방을 사도행전 8:3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사울은 야수처럼 날뛰면서 교회를 휩쓸고 다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
이처럼 적극적인 훼방만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관심한 것은 더욱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핍박 자들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고, 현실은 또 어떠합니까? 사울의 죄는 복음의 방해꾼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14절을 보십시오.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 동족 중에 자기의 열심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십계명 외에 랍비들이 만든 613개의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율법들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애 버려야 할 암적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조롱하고 비난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 증인이 되었고, 잡아들이는 일에 형사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교만했고, 오만 불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는 불같이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잘못된 열심의 소유자였지만, 열정을 가진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을 가진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수기 25:4-13절에 나오는 비느하스의 열정은 하나님을 감동케 했으며, 재앙을 멈추게 했고, 변치 않는 소금 언약을 얻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도들에게서 이와 같은 열정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과 열정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한 지식과 넘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본문11-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배우거나 익혀서 된 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과 길에 대하여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유명한 사람들을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만을 의지한 것입니다.
변화의 주도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계획되고 진행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그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이 있습니다. 본문15-17절을 봅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 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복음의 일을 할 때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16절에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서 “혈육과 의논”이라는 말은 ‘인간적인 어떤 의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인간적인 계획을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도가 자신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에 의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본문 앞쪽의 10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로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핵심 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첫 번째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지해야 할 대상이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울이 바울로 된 것처럼, 우리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정하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시기와 방법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믿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내 인생의 지주로 삼고 주어진 오늘을 성실하게 나아갑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때에 그의 자녀 된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로 채우실 것입니다.
갈 1:11-24,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어느 어머니가 어린 딸과 함께 장보러 갔습니다. 필요한 식료품을 다 산 후에 딸에게 과자를 사 먹으라고 돈을 얼마 주었습니다. 소녀는 가게의 진열대 앞에 서서 마음에 드는 것을 찾느라 이것저것 열심히 눈으로 뒤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상자 속에 있는 것을 가리키면서 \"저것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점원이 그것을 꺼내려는 순간 소녀는 얼른 다른 것을 가리키며 \"그것 말고 이것으로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도 번복하기를 몇 번이나 하고서도 결정을 짓지 못하자 지켜보던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얘야, 어서 살 것을 정하려무나.”하며 딸을 다그쳤습니다. 그 때, 어린 딸은 “그렇지만 엄마, 돈이 하나 밖에 없지 않아요!”라고 단순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대답을 했습니다.
“돈이 하나 밖에!” 소녀는 하나밖에 없는 돈을 단 한 번의 기회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도록 가장 맛있는 과자를 골라야 했던 것이지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단 한번의 생애!’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 못 살았다고 물건을 사듯이 무르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삶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고, 어려운 듯 하면서도 쉬운 길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따라가면 쉬운 길이지만, 주님을 홀로 두고 모든 것을 자기가 짊어지고 가게 되면 어려운 길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을 후회를 남기지 않는 최상의 삶으로 남기려면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시편 37:5-6절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하십니다.
어떤 성도가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믿어야 잘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 믿으시오. 거지 오쟁이 짊어지듯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참고,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가방 같은 자루’를 말함). 즉 ‘죽으나 사나 오직 예수님께 푹 빠져라.’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해 미쳤다.’고 고백했습니다. 확실히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의 표어는 “미치자. 크게 미치자. 예수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사장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고 코카콜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삶이든지 신앙의 삶이든지 열광적이 아니고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TV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과정’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프로에서도 거의 일에 미친 사람들이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런 열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설령 열정이 있다고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남의 것 구경하듯 마음만 설레다가 마는 그런 신앙이 대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의 신앙의 삶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과 의논하지도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 푹 빠져야만 합니다. 야고보서 4:2하-3절을 봅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부터 3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시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광야에서의 훈련은 세상의 어떤 것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며,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는 훈련이었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을 치며 훈련 받은 것도 그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환경이나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시며, 시편 62:10절에서는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과 의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그 과거의 잔재를 씻어내고, 대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훈련의 자리가 광야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광야가 있습니까?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삭막한 바람이 이는 광야와 같은 삶이 있습니까? 아무리 일을 해도 끝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으로 주저앉고 싶습니까? 이런 인생의 광야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인생의 지주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성도가 한숨을 푹 쉬면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조금만 더 주시면 힘이 될 텐데!”그 성도는 ‘하나님께서 늘 부족한 듯이 주시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고 살기가 힘 든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주시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만족하도록 풍족하게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인색하셔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를 아십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 있으면 만족하고 감사할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한계를 넘어서면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됨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파멸로 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잠언 30:8,9절에서 ‘아굴’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내게 주어진 일과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내 인생의 지주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해야 하는지를 봅시다.
본문13-14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열광적인 유대 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지극히 오만했고 잘못된 자기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은 하나님의 복음에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박해자였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소멸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예법이라고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는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핍박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복음을 방해하는 훼방꾼이었습니다. 경찰이 하는 일을 방해하면 무슨 죄입니까? 공무집행 방해죄입니다. 국가가 세운 법을 집행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한 국가의 질서 유지를 방해해도 큰 죄가 되는데, 사울은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이니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사울의 훼방을 사도행전 8:3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사울은 야수처럼 날뛰면서 교회를 휩쓸고 다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
이처럼 적극적인 훼방만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관심한 것은 더욱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핍박 자들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고, 현실은 또 어떠합니까? 사울의 죄는 복음의 방해꾼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14절을 보십시오.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 동족 중에 자기의 열심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십계명 외에 랍비들이 만든 613개의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율법들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애 버려야 할 암적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조롱하고 비난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 증인이 되었고, 잡아들이는 일에 형사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교만했고, 오만 불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는 불같이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잘못된 열심의 소유자였지만, 열정을 가진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을 가진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수기 25:4-13절에 나오는 비느하스의 열정은 하나님을 감동케 했으며, 재앙을 멈추게 했고, 변치 않는 소금 언약을 얻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도들에게서 이와 같은 열정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과 열정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한 지식과 넘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본문11-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배우거나 익혀서 된 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과 길에 대하여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유명한 사람들을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만을 의지한 것입니다.
변화의 주도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계획되고 진행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그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이 있습니다. 본문15-17절을 봅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 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복음의 일을 할 때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16절에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서 “혈육과 의논”이라는 말은 ‘인간적인 어떤 의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인간적인 계획을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도가 자신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에 의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본문 앞쪽의 10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로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핵심 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첫 번째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지해야 할 대상이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울이 바울로 된 것처럼, 우리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정하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시기와 방법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믿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내 인생의 지주로 삼고 주어진 오늘을 성실하게 나아갑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때에 그의 자녀 된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로 채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