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참가치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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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9-10 21:25
*** 인생의 참가치 / 디모데후서 2:14-21
** 들어가는 말
디모데후서 2:14-21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여러분, ‘다운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마 처음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만들었거든요. 다운철학이란 삼라만상 모든 것이 자신의 목적대로 자기답게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답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의 목적에 걸맞을 때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답다.’라고 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11:26절에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한 표현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답다.”라고 인정되었을 때 초대교회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준비된 그릇이란 ‘그리스도인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세우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헌신적인 교육자이기도 한 조만식 장로님에 대한 일화입니다. 조 장로님이 섬기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 주기철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시무하실 때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조만식 장로님의 오산중학교 제자였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시간 중간쯤에 조만식 장로님이 허겁지겁 교회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던 주기철 목사님은 “조 장로! 거기 서시오.” 하고 호령을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들어오다가 그 자리에 서서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서 있어야 했습니다. 성도들은 주기철 목사님이 조만식 장로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아는 터라 ‘예배 후에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성도들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조만식 장로님이 단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단 앞에 엎드려 자신의 나태함을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성도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고 합니다.
과연 훌륭한 인격입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비록 인생에 있어서는 주기철 목사님의 스승이었지만 장로다운 분이었고, 교육자다운 분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나 주기철 목사님은 나라의 위기의 때에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은 훌륭한 그릇이었습니다. 이렇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답게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에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이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인생의 참 가치란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목적대로 쓰임 받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일 때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이 핍박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열정으로 행했던 일들이 자신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인생의 참 목적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깨달은 사울은 이름도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깨달은 바울은 “지나간 일들은 배설물로 여기며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7-14)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목적에 빠져서 정신없이 헤매는 사울을 인생의 참 가치를 깨달은 바울로 만드시는데 14년이라는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긴 기간을 통하여 연단 받고 훈련된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준비된 그릇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20: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인생의 참 가치를 향하여 달리는 바울은 옛날 자신처럼 인생의 목적을 찾는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인생의 참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그 내용이 바로 본문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찾고 따라야 할 인생의 참 가치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인생의 참 가치는 목적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여기 이 마이크의 참 가치는 마이크로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사람도 제각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목적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도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43: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며 에베소서 2:10절에서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인생의 참 가치가 됩니다.
임상옥 이라는 이름을 아시지요? 이 사람은 조선시대의 최대의 상인이며 부자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빚을 갚기 위해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좌우한 중요한 말이 있는데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윤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 아버지가 자신에게 자나 깨나 가르쳤던 상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였습니다.
그는 점원으로서 주인에게 신임을 얻어 인삼을 50근을 받아가지고 중국에 팔아서 은 천 오백 냥을 벌게 되었고 자신의 몫으로 300냥을 얻었습니다. 당시에 그 돈이면 상점을 개점하여 무역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상인으로 독립할 수 있는 종자돈과 주인의 돈까지 차용하여 사창가에 팔린 한 여인의 생명을 구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상점주인의 오해를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구해준 여인이 중국황실의 고관의 부인이 되어 은 오천 냥의 거금을 지원 받았으며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받아 결국 상인으로 대성하게 됩니다.
임상옥이라는 사람은 비록 세상적인 상인이었지만 상인의 도를 실천하여 대성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아 인생의 참 가치를 실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일에 어떻게 쓰임 받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처럼 오직 자기 열정에 빠져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고린도전서 9:26절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라고 교훈합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골인지점을 향하여 달려야 하고, 권투선수는 한 번을 때려도 효과적인 주먹을 날려야 합니다. 목적이 어긋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헛되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서 벗어나면 헛될 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오직 한 가지에 대하여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 추구해야 하는 인생의 참 가치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20절의 말씀처럼 큰 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습니다. “큰 집”이란 이 땅에서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금 그릇이든 은그릇이든 아니면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든,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주어진 것입니다. 달란트나 므나 비유에서도 보여주셨듯이 질 좋은 그릇이나 질이 떨어지는 그릇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사용되느냐? 사용되지 못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귀하게 쓰이든지 천하게 쓰이든지 그릇은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릇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2. 목적대로 쓰임 받으려면 준비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 16:4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선하게 사용되어질 수도 있으며 악하게 사용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퀴리부인이 발견한 방사성원소는 그 원소의 목적대로 선하게 사용되면 훌륭한 산업의 자원이 되어 사람에게 큰 편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떠나 악하게 사용되면 엄청난 재앙을 불러옵니다. 또한 똑 같은 콘크리트이지만 다리를 놓으면 강 이편저편의 사람들이 왕래하는 가교가 되지만, 그 콘크리트로 벽을 쌓으면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선하게 사용되느냐? 악하게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준비에 달려있습니다.
예레미야 35장에는 ‘레갑 족속’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느닷없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영문도 모른 채 명령대로 레갑의 후손들을 모아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레갑의 후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에레미야 35:6-7절입니다.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에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거처할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두지 아니하고 장막에 거처하여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레갑 족속들은 자기 선조의 말을 순종하여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며, 정착생활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유목민으로서의 대를 이어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고 우상을 섬긴다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레감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추구하면서 순종하는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을 누리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본문에서도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에서 19절까지에서 그 길을 말씀하시는데 15절을 봅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즉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옳은 일에 굳게 서서 행하며 쓸데없는 교리의 논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진리를 행하지는 않으면서 쓸데없는 교리의 논쟁을 일삼으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불순한 세력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은 일도 잘 하지 않으면서 일만 만드는 사람, 이리저리 다니면서 온갖 말들을 퍼뜨리는 사람, 이런 일들입니다. 잠언 20:19절에서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를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3:11-12절에서도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하십니다.
오늘 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교리를 따지고 신앙을 따집니다. 이 일 때문에 교회가 시끄럽게 되고 분열되는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 후반절의 말씀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이런 일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이러한 모든 불의로부터 떠나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준비된 그릇이 됩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인생의 참 가치입니다. 인생의 참 가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목적이 있고 달란트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든지 다섯 달란트든지 금 그릇이든지 질그릇이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금 그릇이 아니라 보석그릇이라도 사용되지 못하면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모든 불의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준비 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여러분도 잘 준비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참 가치를 인정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디모데후서 2:14-21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여러분, ‘다운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마 처음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만들었거든요. 다운철학이란 삼라만상 모든 것이 자신의 목적대로 자기답게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답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의 목적에 걸맞을 때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답다.’라고 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11:26절에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한 표현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답다.”라고 인정되었을 때 초대교회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준비된 그릇이란 ‘그리스도인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세우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헌신적인 교육자이기도 한 조만식 장로님에 대한 일화입니다. 조 장로님이 섬기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 주기철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시무하실 때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조만식 장로님의 오산중학교 제자였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시간 중간쯤에 조만식 장로님이 허겁지겁 교회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던 주기철 목사님은 “조 장로! 거기 서시오.” 하고 호령을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들어오다가 그 자리에 서서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서 있어야 했습니다. 성도들은 주기철 목사님이 조만식 장로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아는 터라 ‘예배 후에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성도들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조만식 장로님이 단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단 앞에 엎드려 자신의 나태함을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성도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고 합니다.
과연 훌륭한 인격입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비록 인생에 있어서는 주기철 목사님의 스승이었지만 장로다운 분이었고, 교육자다운 분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나 주기철 목사님은 나라의 위기의 때에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은 훌륭한 그릇이었습니다. 이렇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답게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에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이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인생의 참 가치란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목적대로 쓰임 받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일 때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이 핍박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열정으로 행했던 일들이 자신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인생의 참 목적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깨달은 사울은 이름도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깨달은 바울은 “지나간 일들은 배설물로 여기며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7-14)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목적에 빠져서 정신없이 헤매는 사울을 인생의 참 가치를 깨달은 바울로 만드시는데 14년이라는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긴 기간을 통하여 연단 받고 훈련된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준비된 그릇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20: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인생의 참 가치를 향하여 달리는 바울은 옛날 자신처럼 인생의 목적을 찾는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인생의 참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그 내용이 바로 본문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찾고 따라야 할 인생의 참 가치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인생의 참 가치는 목적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여기 이 마이크의 참 가치는 마이크로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사람도 제각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목적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도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43: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며 에베소서 2:10절에서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인생의 참 가치가 됩니다.
임상옥 이라는 이름을 아시지요? 이 사람은 조선시대의 최대의 상인이며 부자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빚을 갚기 위해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좌우한 중요한 말이 있는데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윤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 아버지가 자신에게 자나 깨나 가르쳤던 상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였습니다.
그는 점원으로서 주인에게 신임을 얻어 인삼을 50근을 받아가지고 중국에 팔아서 은 천 오백 냥을 벌게 되었고 자신의 몫으로 300냥을 얻었습니다. 당시에 그 돈이면 상점을 개점하여 무역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상인으로 독립할 수 있는 종자돈과 주인의 돈까지 차용하여 사창가에 팔린 한 여인의 생명을 구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상점주인의 오해를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구해준 여인이 중국황실의 고관의 부인이 되어 은 오천 냥의 거금을 지원 받았으며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받아 결국 상인으로 대성하게 됩니다.
임상옥이라는 사람은 비록 세상적인 상인이었지만 상인의 도를 실천하여 대성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아 인생의 참 가치를 실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일에 어떻게 쓰임 받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처럼 오직 자기 열정에 빠져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고린도전서 9:26절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라고 교훈합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골인지점을 향하여 달려야 하고, 권투선수는 한 번을 때려도 효과적인 주먹을 날려야 합니다. 목적이 어긋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헛되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서 벗어나면 헛될 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오직 한 가지에 대하여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 추구해야 하는 인생의 참 가치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20절의 말씀처럼 큰 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습니다. “큰 집”이란 이 땅에서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금 그릇이든 은그릇이든 아니면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든,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주어진 것입니다. 달란트나 므나 비유에서도 보여주셨듯이 질 좋은 그릇이나 질이 떨어지는 그릇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사용되느냐? 사용되지 못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귀하게 쓰이든지 천하게 쓰이든지 그릇은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릇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2. 목적대로 쓰임 받으려면 준비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 16:4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선하게 사용되어질 수도 있으며 악하게 사용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퀴리부인이 발견한 방사성원소는 그 원소의 목적대로 선하게 사용되면 훌륭한 산업의 자원이 되어 사람에게 큰 편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떠나 악하게 사용되면 엄청난 재앙을 불러옵니다. 또한 똑 같은 콘크리트이지만 다리를 놓으면 강 이편저편의 사람들이 왕래하는 가교가 되지만, 그 콘크리트로 벽을 쌓으면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선하게 사용되느냐? 악하게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준비에 달려있습니다.
예레미야 35장에는 ‘레갑 족속’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느닷없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영문도 모른 채 명령대로 레갑의 후손들을 모아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레갑의 후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에레미야 35:6-7절입니다.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에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거처할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두지 아니하고 장막에 거처하여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레갑 족속들은 자기 선조의 말을 순종하여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며, 정착생활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유목민으로서의 대를 이어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고 우상을 섬긴다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레감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추구하면서 순종하는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을 누리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본문에서도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에서 19절까지에서 그 길을 말씀하시는데 15절을 봅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즉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옳은 일에 굳게 서서 행하며 쓸데없는 교리의 논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진리를 행하지는 않으면서 쓸데없는 교리의 논쟁을 일삼으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불순한 세력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은 일도 잘 하지 않으면서 일만 만드는 사람, 이리저리 다니면서 온갖 말들을 퍼뜨리는 사람, 이런 일들입니다. 잠언 20:19절에서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를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3:11-12절에서도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하십니다.
오늘 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교리를 따지고 신앙을 따집니다. 이 일 때문에 교회가 시끄럽게 되고 분열되는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 후반절의 말씀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이런 일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이러한 모든 불의로부터 떠나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준비된 그릇이 됩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인생의 참 가치입니다. 인생의 참 가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목적이 있고 달란트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든지 다섯 달란트든지 금 그릇이든지 질그릇이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금 그릇이 아니라 보석그릇이라도 사용되지 못하면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모든 불의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준비 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여러분도 잘 준비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참 가치를 인정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