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도약을 위하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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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9-03 21:57
*** 제2의 도약을 위하여 / 열왕기상 18:30-40
** 들어가는 말
왕상 18:30-40,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영국의 작가 ‘섬머셋 모음’의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명사회를 벗어나 타히티 섬으로 들어가서 그림에 전념한 화가 ‘고갱’을 모델로 한 이야기입니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말합니다. 달은 고상한 것의 대표이며, 6펜스란 영국 은화 중 최저단위로서 세속적인 것의 대명사로 사용된 것입니다.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나지만, 달의세계는 영혼과 감성의 세계를 의미하며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세속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순수하게 추구하는 예술을 달로 표현했고, 명예나 돈을 인생의 최고로 삼는 세속적 인간의 이상을 6펜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증권 거래소에서 일하며 윤택하게 살던 한 중년의 사내(스트릭랜드)가 아내와 자식과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나갑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그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가 나간 이유는 단지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였습니다. 얼마동안 파리의 뒷골목을 떠돌다가 태평양의 외딴 섬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원주민인 ‘야타’라는 여인과 살면서 그림에 전념합니다. 결국은 문둥병에 걸려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장님이 된 채 신비로운 그림을 완성하면서 죽음을 맞습니다. 오두막집에 그린 그림은 눈이 보이지 않은 채 마음으로 그린 신비로운 낙원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야타에게 남긴 부탁은 오두막집을 남김없이 태워달라는 것입니다.
달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느냐? 6펜스짜리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은 누구나가 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아동문학가인 ‘강소천’ 시인은 ‘병아리’라는 동시에서 “물 한 모금 머금고 구름 쳐다보고, 또 한 모금 머금고 하늘 쳐다보고.”라고 병아리가 물 마시는 모습을 높은 하늘과 찬란한 구름을 쳐다본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의 의미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냥 먹기 위해 일하고 살기 위해 먹고, 대를 잇기 위해 자손을 생산하는 그런 삶은 영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은 짐승과는 전혀 다른 영혼이 있고 삶의 의미를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계획을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입니다. 6펜스의 인생처럼 육신적인 편안함과 만족만을 추구하고 산다면 세상이 말하는 조금 진화된 짐승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12절에서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인생은 삶의 매 순간을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달을 추구하느냐? 6펜스를 추구하느냐? 영원한 삶을 추구하느냐? 짧은 육신의 평안과 즐거움을 추구하느냐? 이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교회는 이제 설립 열두 돌을 맞이하면서 제2의 도약을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때입니다. 본문 앞쪽 21절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본문의 엘리야 선지자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가는 시대는 다르지만, 하는 일은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계에는 아직 우리가 일 해야 할 낮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확고히 함으로써 믿음과 능력을 새롭게 하여 제2의 도약을 해야 합니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봅시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의 이스라엘은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의 우상정책으로 온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안식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를 했으며, 생활 속에서는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 보이러 왔습니다. 이사야 1:12절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탄식하십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을 통한 숱한 경고와 권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돈이 운다.”는 신파극의 대사처럼, 신앙을 따르자니 핍박과 고난이 두렵고, 왕을 따르자니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신앙과 세상,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명 없는 우상의 세기적인 대결이 갈멜 산에서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대결은 머뭇거리면서 선택과 결단을 미루는 백성들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의도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1. 도약을 기대하는 성도에게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 함께 행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불 수레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또 한 사람인 ‘에녹’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았던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며,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 해 왔듯이,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한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과 방향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과 능력과 자부심을 가지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육신적인 풍조로 만연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눈앞에 보이는 현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잊어버리고 여러 가지 삶의 고통과 근심으로 마음을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외로움과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다윗의 때에 찬양 대장으로서 선견자라고 까지 불렸던 신실한 신앙인 ‘아삽’도 고난 중에 이러한 고민을 토로했습니다. 시편 77:3-9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성도의 위기는 이러한 때에 찾아옵니다. 영적인 침체는 생활의 침체를 불러오며, ‘씨뿌리는 비유’의 가시밭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확신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믿고 그 약속이 이룰 때까지 오래 참으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고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유다서 1:21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10:36-37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찬송가 342장 1절 가사를 기억합니까?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활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확실한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마음 주님이 계시고, 여러분 역시 주님 안에 있음을 확신하십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확신이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2. 도약을 기대하는 성도에게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위기를 만난 이스라엘을 위하여 엘리야가 벌이는 생명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심각한 영적 침체를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유일한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가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 대결은 ‘각 선지자들이 단을 쌓고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으로 하여금 제물에 불을 내리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기는 쪽이 진 쪽을 죽이는 것입니다. 생명이 걸려 있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결입니다.
다수인 우상의 선지자들이 먼저 나섰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거의 하루 종일을 부르짖었지만, 결국 제단에 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차례입니다. 엘리야는 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지만, 차분하게 한 가지씩 준비했습니다. 먼저, 백성들의 무관심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새로 쌓았습니다. 단을 쌓는 기준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야곱의 12아들로 시작된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로 쌓았습니다. 그리고 단으로 돌아가며 도랑을 파고, 단 위에 나무를 벌이고, 제물인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또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세 번, 즉 12통의 물을 제물과 단에 부어 정결케 했습니다.
제사를 위한 엘리야의 준비에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모든 준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었으며, 결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촉박하고, 생명이 걸려있는 시점에서 왜 그렇게 느긋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은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서 5:2절에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준비하며 기다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모든 준비는 하나님의 뜻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6-7절에서 “나는 여호와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모든 준비는 성실하고 철저해야 합니다. 이 일이 내 생애의 마지막 일인 것처럼, 그리고 이 일을 받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23-24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일의 주도권과 결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삶에는 더욱 조급하지 않아야 하며,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제2의 도약을 할 수가 있습니다.
3. 도약을 기대하는 성도에게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준비를 마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의 길고 수고로운 준비에 비하여 기도는 짧고 간단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인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마태복음 6:33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생활 속에서의 준비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간곡한 기도에 하나님은 불로써 응답하셨습니다. 제물과 나무와 돌단과 도랑의 물까지 깨끗하게 태워 버리셨습니다. 물이 닿았던 곳은 모두 태우신 것입니다. 이는 엘리야의 겸손과 수고와 정성을 모두 받으셨다는 하나님의 신호였습니다. 준비된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철저한 회개로 준비한 다니엘의 기도는 시작하자마자 이미 응답을 받기도 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준비의 중요성에 대하여 별로 민감하지를 못합니다. 예배 시간에 급하게 들어와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예배에 임합니다. 헌금도 정성스럽게 준비되지 못하고, 별 의미 없이 다만 물질로 헌금함에 들어갑니다. 기도나 봉사나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루를 시작하거나,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시작함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설립 12주년을 맞으면서 제2의 도약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철저하게 준비된 신앙의 삶과 간절한 기도로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섭시다. 가정과 교회와 온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기대하면서 우리의 마음 가짐을 철저히 준비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그릇대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왕상 18:30-40,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영국의 작가 ‘섬머셋 모음’의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명사회를 벗어나 타히티 섬으로 들어가서 그림에 전념한 화가 ‘고갱’을 모델로 한 이야기입니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말합니다. 달은 고상한 것의 대표이며, 6펜스란 영국 은화 중 최저단위로서 세속적인 것의 대명사로 사용된 것입니다.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나지만, 달의세계는 영혼과 감성의 세계를 의미하며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세속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순수하게 추구하는 예술을 달로 표현했고, 명예나 돈을 인생의 최고로 삼는 세속적 인간의 이상을 6펜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증권 거래소에서 일하며 윤택하게 살던 한 중년의 사내(스트릭랜드)가 아내와 자식과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나갑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그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가 나간 이유는 단지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였습니다. 얼마동안 파리의 뒷골목을 떠돌다가 태평양의 외딴 섬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원주민인 ‘야타’라는 여인과 살면서 그림에 전념합니다. 결국은 문둥병에 걸려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장님이 된 채 신비로운 그림을 완성하면서 죽음을 맞습니다. 오두막집에 그린 그림은 눈이 보이지 않은 채 마음으로 그린 신비로운 낙원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야타에게 남긴 부탁은 오두막집을 남김없이 태워달라는 것입니다.
달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느냐? 6펜스짜리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은 누구나가 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아동문학가인 ‘강소천’ 시인은 ‘병아리’라는 동시에서 “물 한 모금 머금고 구름 쳐다보고, 또 한 모금 머금고 하늘 쳐다보고.”라고 병아리가 물 마시는 모습을 높은 하늘과 찬란한 구름을 쳐다본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의 의미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냥 먹기 위해 일하고 살기 위해 먹고, 대를 잇기 위해 자손을 생산하는 그런 삶은 영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은 짐승과는 전혀 다른 영혼이 있고 삶의 의미를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계획을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입니다. 6펜스의 인생처럼 육신적인 편안함과 만족만을 추구하고 산다면 세상이 말하는 조금 진화된 짐승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12절에서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라고 탄식합니다.
우리 인생은 삶의 매 순간을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달을 추구하느냐? 6펜스를 추구하느냐? 영원한 삶을 추구하느냐? 짧은 육신의 평안과 즐거움을 추구하느냐? 이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교회는 이제 설립 열두 돌을 맞이하면서 제2의 도약을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때입니다. 본문 앞쪽 21절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본문의 엘리야 선지자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가는 시대는 다르지만, 하는 일은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계에는 아직 우리가 일 해야 할 낮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확고히 함으로써 믿음과 능력을 새롭게 하여 제2의 도약을 해야 합니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봅시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의 이스라엘은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의 우상정책으로 온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안식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를 했으며, 생활 속에서는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 보이러 왔습니다. 이사야 1:12절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탄식하십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을 통한 숱한 경고와 권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돈이 운다.”는 신파극의 대사처럼, 신앙을 따르자니 핍박과 고난이 두렵고, 왕을 따르자니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신앙과 세상,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명 없는 우상의 세기적인 대결이 갈멜 산에서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대결은 머뭇거리면서 선택과 결단을 미루는 백성들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의도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1. 도약을 기대하는 성도에게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 함께 행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불 수레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또 한 사람인 ‘에녹’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았던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며,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 해 왔듯이,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한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과 방향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과 능력과 자부심을 가지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육신적인 풍조로 만연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눈앞에 보이는 현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잊어버리고 여러 가지 삶의 고통과 근심으로 마음을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외로움과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다윗의 때에 찬양 대장으로서 선견자라고 까지 불렸던 신실한 신앙인 ‘아삽’도 고난 중에 이러한 고민을 토로했습니다. 시편 77:3-9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성도의 위기는 이러한 때에 찾아옵니다. 영적인 침체는 생활의 침체를 불러오며, ‘씨뿌리는 비유’의 가시밭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확신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믿고 그 약속이 이룰 때까지 오래 참으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고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유다서 1:21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10:36-37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찬송가 342장 1절 가사를 기억합니까?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활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확실한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마음 주님이 계시고, 여러분 역시 주님 안에 있음을 확신하십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확신이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2. 도약을 기대하는 성도에게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위기를 만난 이스라엘을 위하여 엘리야가 벌이는 생명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심각한 영적 침체를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유일한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가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 대결은 ‘각 선지자들이 단을 쌓고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으로 하여금 제물에 불을 내리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기는 쪽이 진 쪽을 죽이는 것입니다. 생명이 걸려 있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결입니다.
다수인 우상의 선지자들이 먼저 나섰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거의 하루 종일을 부르짖었지만, 결국 제단에 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차례입니다. 엘리야는 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지만, 차분하게 한 가지씩 준비했습니다. 먼저, 백성들의 무관심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새로 쌓았습니다. 단을 쌓는 기준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야곱의 12아들로 시작된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로 쌓았습니다. 그리고 단으로 돌아가며 도랑을 파고, 단 위에 나무를 벌이고, 제물인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또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세 번, 즉 12통의 물을 제물과 단에 부어 정결케 했습니다.
제사를 위한 엘리야의 준비에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모든 준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었으며, 결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촉박하고, 생명이 걸려있는 시점에서 왜 그렇게 느긋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은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서 5:2절에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준비하며 기다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모든 준비는 하나님의 뜻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6-7절에서 “나는 여호와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모든 준비는 성실하고 철저해야 합니다. 이 일이 내 생애의 마지막 일인 것처럼, 그리고 이 일을 받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23-24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일의 주도권과 결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삶에는 더욱 조급하지 않아야 하며,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제2의 도약을 할 수가 있습니다.
3. 도약을 기대하는 성도에게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준비를 마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의 길고 수고로운 준비에 비하여 기도는 짧고 간단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인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마태복음 6:33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생활 속에서의 준비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간곡한 기도에 하나님은 불로써 응답하셨습니다. 제물과 나무와 돌단과 도랑의 물까지 깨끗하게 태워 버리셨습니다. 물이 닿았던 곳은 모두 태우신 것입니다. 이는 엘리야의 겸손과 수고와 정성을 모두 받으셨다는 하나님의 신호였습니다. 준비된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철저한 회개로 준비한 다니엘의 기도는 시작하자마자 이미 응답을 받기도 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준비의 중요성에 대하여 별로 민감하지를 못합니다. 예배 시간에 급하게 들어와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예배에 임합니다. 헌금도 정성스럽게 준비되지 못하고, 별 의미 없이 다만 물질로 헌금함에 들어갑니다. 기도나 봉사나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루를 시작하거나,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시작함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설립 12주년을 맞으면서 제2의 도약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철저하게 준비된 신앙의 삶과 간절한 기도로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섭시다. 가정과 교회와 온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기대하면서 우리의 마음 가짐을 철저히 준비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그릇대로 채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