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직접적인 신앙과 간접적인 신앙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089회 작성일 2006-08-29 22:34
*** 직접적인 신앙과 간접적인 신앙 / 욥 42:1-6

** 들어가는 말

욥기 42:1-6(현대어성경), “1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이렇게 아뢰었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나는 잘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3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계획을 가리는 자 그 누구냐고 말입니다.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 댔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댔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듣고만 있으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5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6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현인(賢人)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유명한 현인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배우고 싶어서 왔습니다. 삶의 의미를 배울 수 있겠지요?” 현인은 고개를 흔들며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지망생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말입니까?” 현인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제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현인을 비웃으며 떠났습니다. 스승의 대답을 기대하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도 실망하자 현인(賢人)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삶의 본질과 의미를 맛본 적이 없다면 그걸 이해해서 무엇 하겠느냐? 나는 너희가 요리를 보고 사색하기보다 요리를 먹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진수성찬이 차려진 그림을 본다고 배가 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평범한 이 진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접목시키지 못한 채, 자신의 신앙이 의롭다고만 생각한 욥이 고백하는 말을 우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머릿속에 담겨진 지식이 아니며, 열변을 토하는 웅변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삶에서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고 지식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 신앙을 가두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도 하고 알기도 하지만 삶에서 경험하지 못하고 주님 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모르며, 말씀을 듣고 읽지만 말씀의 능력을 모릅니다. 오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림 속의 음식으로 배부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4:8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맛보아 알라.”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 보고 알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는 간접경험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서 아는 것도 아니며, 상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는 신앙입니다. 비록 욥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난 욥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자리도 다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욥기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은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참소로 두 번의 큰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욥의 믿음을 칭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단은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믿음이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잘해 주시고 보호해주시니까 그렇지요. 재앙을 내려보십시오. 당장에 욕을 할 겁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사단은 두 번에 걸쳐서 시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욥의 재산과 자식들을 쳤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열 명의 자식들을 한꺼번에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는 욥의 몸을 쳤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도록 악창과 종기로 덮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은 욥의 절친한 친구들까지 동원하여 정신적인 고통으로 고문을 했습니다. 친구들이 욥이 당하는 고난을 욥의 죄 때문이라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이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며 자신은 결단코 의롭다.’고 항변을 합니다.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욥 12:4)라고 항변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정죄하는 말과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항변하면서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말을 다 들으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욥기 38:1-3절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튼 소리를 해대며 내가 계획하고 있는 것을 흩어 놓으려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그리고 내가 물어 볼 터이니 내 말에 대답하여라.”(현대어성경) 이 말씀을 시작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대하여 욥에게 끊임없이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들은 욥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자신이 한없이 의롭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니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고 추한 죄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라고 자기를 고백하고 통회한 것입니다.
우리는 욥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것없는 신앙입니다. 욥의 신앙의 예를 든 구절이 있습니다. 욥기 1:4-5절입니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삽니다. 옛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했습니다. 이제 욥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삶을 돌아봅시다. 무식해서 용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신앙으로 주님 안에서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들어서 아는 간접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로마서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물론 믿음은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1년, 5년,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듣기만 하는 신앙에 머문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젖만 먹는다면 정상적인 성장이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몸은 성년으로 성장을 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성장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5:12-13절입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하십니다.

왜 간접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까?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여 어린아이의 연령에 머물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성인으로서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위험한 물건을 맡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으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능력도 하나님의 은혜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관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너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부자청년은 고민했습니다.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재물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0:22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런 사람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듣기만 하는 간접적인 신앙이며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지는 23절에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하시며,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어도 간접적인 신앙으로는 얻을 것도 없으며 하나님나라에도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욥은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자신만만했습니다. 자신의 순전함을 하나님께 따져보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욥기 13:3절입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18절에서는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당돌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듣는 신앙, 간접적인 신앙일 때에는 이렇게 대담하고 당돌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식으로 용감한 것이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고 싶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싶다면 간접적인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눈으로 보는 직접적인 신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2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현대어성경/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6명의 장님과 코끼리’라는 인도우화를 잘 아시지요?
여섯 명의 장님이 코끼리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코끼리라는 동물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첫 번째 장님이 다가가 거대한 동물의 옆면을 만졌습니다. 그는 “코끼리는 판판한 벽 같은 거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장님은 코끼리의 코를 만졌습니다. “코끼리는 뱀과 비슷한 종류야.”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세 번째 장님은 상아를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매우 날카로우며 창처럼 위험한 존재”라고 선언했습니다. 네 번째 장님은 꼬리를 만졌기 때문에 “코끼리가 밧줄과 비슷한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다섯 번째 장님은 귀를 만져 보고는 “부채”라고 했습니다. 코끼리의 육중한 다리에 팔을 둘러본 마지막 장님이 다른 사람들을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걸 모르다니, 코끼리는 나무랑 똑같아.” 여섯 명의 장님은 저마다의 독특한 여섯 마리의 코끼리를 만들었습니다.

장님들의 코끼리처럼 간접적인 신앙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자신이 들은 소리를 냅니다. 서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소문만 들은 사람이 직접 같다가 온 사람을 이겼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코끼리의 모양이 바뀌고, 서울이 소문처럼 변하지는 않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나 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즉 신앙은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가시나무이면서 ‘나는 사과나무다.’라고 외친다고 사과나무가 되지는 않습니다. 가시나무에는 탱자가 달립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알듯이 신앙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 즉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마 7:16)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을 부당하게 여기며 자신의 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하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쳤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욥기 38:1-3절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욥은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고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추궁에 본문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눈으로 주를 뵈옵는다.”는 표현은 직접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체험에 대한 고백입니다. 직접적인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주님과 연합되는 이 신비로운 연합의 체험이 없으면 결코 신앙의 열매는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직접적인 신앙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의 욥의 신앙은 ‘듣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들어서 알았고 자신의 결단에 의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경험을 한 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지식과 섬김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낍니까?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을 봅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듣기만 하는 모방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도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연합된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 믿음으로 실천함으로서 이루어집니다. 말씀의 깨달음은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주어집니다.

기도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을 느낄 수 없습니까? 마음을 다하지 않고, 믿음을 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과 연합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어린아이와 같은 간접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직접적인 신앙으로 능력 있는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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