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 그 당연한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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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8-07 07:38
*** 하나님의 자녀, 그 당연한 삶 / 로마서 8:12-18
** 들어가는 말
로마서 8:12-18,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손재주가 좋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노력을 들여서 작은 배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 배는 섬세한 부분까지 잘 조각이 되어서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소년은 강가로 가서 그 배를 물에 띄웠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작은 배는 물결을 타고 멀리 흘러가버렸습니다. 둑을 따라서 배를 따라가 보았지만 좇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한 바람과 물결이 배를 가져가 버렸습니다. 소년은 또 다른 배를 만들려면 얼마나 힘들여 일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 아래쪽에서 물에 떠내려 오는 작고 아름다운 배를 발견하고 건져내었습니다. 그 사람은 도시로 가지고 가서 상점 주인에게 팔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배를 만든 소년이 시내를 걸어가다가 어느 상점의 진열장에 있는 작은 배를 보았습니다. 소년은 그 배가 자신이 만든 배임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상점에 들어가서 주인에게 ‘그 배는 잃어버린 자기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배에는 자기가 찍어 놓은 작은 표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표시만으로 그것이 자기 배라는 것을 주인에게 증명해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상점 주인은 ‘그가 작은 배를 갖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배를 사는 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년은 그 배가 너무 갖고 싶기 때문에 값을 치르고 샀습니다. 소년은 배를 손에 들고 말했습니다.
“작은 배야, 너는 두 번째 나의 것이다. 내가 너를 만들었고 또 내가 너를 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사신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들입니다. 이사야 43:1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7:22-23절에서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은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은 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신분은 그 사람의 소속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래 된 한 토막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낯선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도 더러웠고 못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강아지는 굶주림에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강아지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의 목에 무슨 표시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그 강아지를 붙잡아서 이름표를 보았습니다. 그 개의 이름은 ‘밥스’였으며,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나는 이 나라의 왕에게 속했습니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곧 경찰에 보고 되었고 잘 보호되어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국왕 부부가 에든버러 성에 휴가를 왔다가 강아지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수백 킬로나 떨어진 왕과 강아지를 연결시켜 준 것은 바로 그 강아지의 소속 표시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깊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비록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세상 끝 날까지 보호되며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37절 이하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으며,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보증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구속을 보증으로 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하나님께 생명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본문 12절에서 “우리가 빚진 자”라고 표현하면서, 빚진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영이 주도권을 잡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2-1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저나 여러분이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의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로서 세상에 살다가 보니 육체의 욕망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치는 환경이 있는데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는 말씀을 좀 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육신을 따라 살게 하려고 육신에게 빚을 진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령에게 빚을 지고 있지만 육신에게는 빚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에게 진 빚은 성령을 따라 살도록 하는 의무가 부과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따라 살면 어떻게 됩니까? 결과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본문 13절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결과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엄중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새 생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은 육신에게 진 빚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따라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는 육신의 생활을 부정할 수가 없음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는 말씀은 ‘그 결과 너희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령을 거슬러 육신대로 사는 사람의 필연적인 결과는 죽음입니다. 여기에서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을 어떻게 지켜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이 주도권을 잡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가 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실”은 ‘행함’, ‘활동’을 의미하는데, 주로 ‘악한 행동’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악한 행실을 완전히 정지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무법한 우상숭배, 거짓말, 원수 맺는 것, 시기, 질투(벧전4:3, 골3:4) 등의 나쁜 짓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직도 몸의 행실을 따르는 나쁜 습관과 풍습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계속적인 감동으로 ‘버리라.’고 하시는 것을 아직도 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게는 많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결단을 미루고 있다면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누가복음 12:20절에서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영이 주도권을 잡도록 하십시오.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르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이면 늦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이 주도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주인으로 오십니다. 요한복음 14: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도들에게는 때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갈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케 하시거나 깨닫게 하실 때에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사람의 정에 치우치거나, 게으름이나, 여러 사정에 의하여 흔들리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집으로 기회를 놓치고 나서 나중에 후회해도 에서처럼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2. 고난을 마주 대하여 담대하게 헤쳐 나가야 합니다.
본문 17-18절을 봅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성도들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에 ‘고난’이라는 메뉴가 들어있습니다. 이 메뉴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목’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당연히 주어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성도들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홀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본문 14-16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명백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 사실을 성령께서 보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결코 외로운 싸움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저를 보고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아기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말이 ‘엄마, 아빠’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 소리가 제일 듣고 싶은 것이겠지요. 아이가 병이라도 들면 밤을 새워가면서 노심초사 아이를 돌봅니다. 자식에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옛말에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한다.’고 했습니다. ‘함함하다’라는 말은 ‘보드랍고 윤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슴도치는 온몸이 밤송이처럼 가시로 덮여 있고 칙칙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슴도치 어미에게는 자식이 보드랍고 윤기 있게만 느껴지니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엄마, 아빠’를 부르며 웅얼거리는 것을 부모가 그 뜻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만 듣고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이처럼 자상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애당초 고난이 없게 하시면 더 좋았을 것이 아닙니까? 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그것은 더욱 큰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의 것을 소유하려면 세상의 것을 버리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잠시의 고난이나 어려움을 면하려고 육신의 요구대로 사시렵니까? 그 결과는 필연적인 죽음입니다. 히브리서 11:35절에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증언합니다. 더욱 큰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진실로 기대하고 소망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당연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자녀로서의 당연한 삶은 첫째, 영이 주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감동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하는 고난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더욱 큰 영광을 얻게 하려고 주시는 값비싼 은혜의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12: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지는 이 때에 육신의 욕망에 끌려 다니며 전전긍긍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고난과 맞서 싸우며 믿음으로 이겨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로마서 8:12-18,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손재주가 좋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노력을 들여서 작은 배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 배는 섬세한 부분까지 잘 조각이 되어서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소년은 강가로 가서 그 배를 물에 띄웠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작은 배는 물결을 타고 멀리 흘러가버렸습니다. 둑을 따라서 배를 따라가 보았지만 좇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한 바람과 물결이 배를 가져가 버렸습니다. 소년은 또 다른 배를 만들려면 얼마나 힘들여 일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 아래쪽에서 물에 떠내려 오는 작고 아름다운 배를 발견하고 건져내었습니다. 그 사람은 도시로 가지고 가서 상점 주인에게 팔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배를 만든 소년이 시내를 걸어가다가 어느 상점의 진열장에 있는 작은 배를 보았습니다. 소년은 그 배가 자신이 만든 배임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상점에 들어가서 주인에게 ‘그 배는 잃어버린 자기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배에는 자기가 찍어 놓은 작은 표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표시만으로 그것이 자기 배라는 것을 주인에게 증명해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상점 주인은 ‘그가 작은 배를 갖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배를 사는 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년은 그 배가 너무 갖고 싶기 때문에 값을 치르고 샀습니다. 소년은 배를 손에 들고 말했습니다.
“작은 배야, 너는 두 번째 나의 것이다. 내가 너를 만들었고 또 내가 너를 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사신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들입니다. 이사야 43:1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7:22-23절에서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은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은 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신분은 그 사람의 소속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래 된 한 토막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낯선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도 더러웠고 못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강아지는 굶주림에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강아지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의 목에 무슨 표시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그 강아지를 붙잡아서 이름표를 보았습니다. 그 개의 이름은 ‘밥스’였으며,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나는 이 나라의 왕에게 속했습니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곧 경찰에 보고 되었고 잘 보호되어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국왕 부부가 에든버러 성에 휴가를 왔다가 강아지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수백 킬로나 떨어진 왕과 강아지를 연결시켜 준 것은 바로 그 강아지의 소속 표시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깊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비록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세상 끝 날까지 보호되며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37절 이하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으며,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보증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구속을 보증으로 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하나님께 생명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본문 12절에서 “우리가 빚진 자”라고 표현하면서, 빚진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영이 주도권을 잡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2-1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저나 여러분이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의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로서 세상에 살다가 보니 육체의 욕망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치는 환경이 있는데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는 말씀을 좀 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육신을 따라 살게 하려고 육신에게 빚을 진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령에게 빚을 지고 있지만 육신에게는 빚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에게 진 빚은 성령을 따라 살도록 하는 의무가 부과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따라 살면 어떻게 됩니까? 결과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본문 13절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결과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엄중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새 생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은 육신에게 진 빚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따라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는 육신의 생활을 부정할 수가 없음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는 말씀은 ‘그 결과 너희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령을 거슬러 육신대로 사는 사람의 필연적인 결과는 죽음입니다. 여기에서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을 어떻게 지켜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이 주도권을 잡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가 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실”은 ‘행함’, ‘활동’을 의미하는데, 주로 ‘악한 행동’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악한 행실을 완전히 정지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무법한 우상숭배, 거짓말, 원수 맺는 것, 시기, 질투(벧전4:3, 골3:4) 등의 나쁜 짓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직도 몸의 행실을 따르는 나쁜 습관과 풍습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계속적인 감동으로 ‘버리라.’고 하시는 것을 아직도 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게는 많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결단을 미루고 있다면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누가복음 12:20절에서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영이 주도권을 잡도록 하십시오.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르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이면 늦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이 주도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주인으로 오십니다. 요한복음 14: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도들에게는 때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갈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케 하시거나 깨닫게 하실 때에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사람의 정에 치우치거나, 게으름이나, 여러 사정에 의하여 흔들리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집으로 기회를 놓치고 나서 나중에 후회해도 에서처럼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2. 고난을 마주 대하여 담대하게 헤쳐 나가야 합니다.
본문 17-18절을 봅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성도들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에 ‘고난’이라는 메뉴가 들어있습니다. 이 메뉴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목’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당연히 주어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성도들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홀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본문 14-16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명백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 사실을 성령께서 보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결코 외로운 싸움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저를 보고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아기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말이 ‘엄마, 아빠’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 소리가 제일 듣고 싶은 것이겠지요. 아이가 병이라도 들면 밤을 새워가면서 노심초사 아이를 돌봅니다. 자식에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옛말에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한다.’고 했습니다. ‘함함하다’라는 말은 ‘보드랍고 윤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슴도치는 온몸이 밤송이처럼 가시로 덮여 있고 칙칙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슴도치 어미에게는 자식이 보드랍고 윤기 있게만 느껴지니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엄마, 아빠’를 부르며 웅얼거리는 것을 부모가 그 뜻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만 듣고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이처럼 자상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애당초 고난이 없게 하시면 더 좋았을 것이 아닙니까? 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그것은 더욱 큰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의 것을 소유하려면 세상의 것을 버리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잠시의 고난이나 어려움을 면하려고 육신의 요구대로 사시렵니까? 그 결과는 필연적인 죽음입니다. 히브리서 11:35절에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증언합니다. 더욱 큰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진실로 기대하고 소망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당연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자녀로서의 당연한 삶은 첫째, 영이 주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감동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하는 고난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더욱 큰 영광을 얻게 하려고 주시는 값비싼 은혜의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12: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지는 이 때에 육신의 욕망에 끌려 다니며 전전긍긍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고난과 맞서 싸우며 믿음으로 이겨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