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의 기쁨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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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28 13:00
*** 우리 인생의 기쁨 / 요 16:20-24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6:20-24,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아무런 염려나 근심, 걱정이 없습니까? ‘걱정거리가 없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활에 대하여 염려나 근심 걱정을 하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걱정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걱정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지요.
예전에 ‘건강염려증후군’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등장하는 당시 41세의 회사원 김○○씨는 매스컴에서 질병에 대한 보도만 나오면 왠지 자신도 그런 병이 있는 것 같아 늘 염려가 되었습니다. 배가 몹시 아프기도 하고, 목 아래쪽에 혹이 만져지는 것 같기도 해서 혹시 종양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고, 때로는 소변이 시원하지가 않아서 신장 결석이나 방광염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며 ‘잘 쉬라.’고만 했습니다. 그래도 이쪽저쪽 아픈 부분이 많은 걸로 미뤄보아 분명 병이 있는 것 같은 확신이 들어서 다른 의사를 찾아가 진료를 받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별 탈이 없다고 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를 두고 '건강염려증후군'이라 합니다. ‘신체적으로는 이상이 없는데도 여기저기 아픈 느낌이 들고 병들었다고 생각하는 증상’을 통틀어 표현하는 병명입니다. 자신이 위중한 병에 걸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일종의 정신장애입니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가 많고 건강에 자신감을 잃어 가는30-40대 남성들이나 집안일에서 정신적 압박을 받는 주부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원인은 대부분 심리적인 것입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은 그 원인을
“아프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현실적인 책임과 어려움으로부터 피하고, 주위로부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기우'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걱정’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나누다’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즉 걱정이란 ‘마음이 나누이는 것’ ‘두 마음으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걱정은 사람의 마음을 둘로 나누어지게 해서 평화를 깨뜨리며, 감정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여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7:10절에서 “…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잠언 17:22절에서는 “…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염려거리가 산적해 있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몰려오고, 세상의 희망이 사라지는 때에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고, 한 번 돌로 침을 당하고, 세 번 파선하고,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춥고 헐벗었다.”(고후11:23-27)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하시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애를 주관하시는 주인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며, 신뢰를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염려와 근심걱정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 근심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비록 어두운 부분이 많고, 들려오는 소식들이 마음을 어둡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세상을 밝게 만들어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밝고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쁨을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기쁨을 주려면 당연히 나 자신이 먼저 기쁨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인생이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 합니다.
1. 먼저, 기쁨을 잃고 사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은 근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봅니다. 왜 제자들이 그렇게 근심하고 있습니까? 이유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다가올 박해에 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따라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자신의 죽음과 박해에 대한 말씀이 웬 말입니까? 20절에서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하시고, 21절에서 출산하는 여인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출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과 같은 고통스러운 근심이 제자들에게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22절에서도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의 근심으로 가득한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앞으로 다가올 박해가 제자들에게 근심이 된 원인은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미에서 유적을 탐사하던 ‘유적 탐사단’이 한 오지에서 광부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두막집을 발견했습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 안에는 뼈만 앙상한 두 구의 시신과 많은 금이 담긴 자루가 있었습니다. “왜 두 광부가 많은 금을 모으고 죽었을까?”라는 것이 탐사단의 의문이었습니다. 그 때 한 단원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들은 금맥을 발견하고 금을 캐는 기쁨에 북쪽 지역에는 겨울이 일찍 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적당량의 금을 갖고 빨리 이곳을 떠났어야 했습니다. 혹한과 엄청난 눈보라를 맞았을 때는 이미 식량도 바닥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금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겠죠.”
오늘도 하늘의 기쁨을 안고 살아야 할 성도들이 기쁨은 고사하고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근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영광스러운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성도들이 왜 근심에 싸여서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과 다른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축복과 만사형통이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잘 되고,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되고, 돈 잘 벌고, 행복한 생애를 꿈꿉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에 자신들이 얻게 될 높은 자리와 부귀영화를 꿈꾸었듯이 말입니다. 마가복음 10: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엠마오라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두 자신들의 소망이 그러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고자 할 때에 반드시 결단해야 할 사실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3절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도 바울도 역시 그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8: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고난이 없는 값싼 영광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표현되는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거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의 월계관을 받으려 해도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훈련을 거쳐야 그 영광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영광을 얻기 위해서 그 길이 쉽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를 부르신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마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기쁨을 잃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자존심도 자기 생각도 버리고 따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려움이 없는 형통함만을 요구하니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2.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본문 22-24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말씀에서 답을 찾으셨습니까? 우리 인생의 기쁨을 얻는 두 가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뿐이고,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열정과 인내입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열정과 이것이 이루기까지 인내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13절에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10: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총을 입기를 원하신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은총을 입기도 전에 미리 지치고 낙심해서 포기해버리기 때문에 아무 것도 얻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받기 위하여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1: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열정으로 기도하고 인내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본문 24절에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나 주십니까? 우리가 사람을 만나듯이 그렇게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통하여, 혹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혹 음성을 들려주시고, 혹 우리의 영혼을 감싸주십니다. 사도행전 2:17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십니다. 즉 성령을 우리 영혼에 보내주시면 성령께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사모하십시오.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무엇보다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응답의 표현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기른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손자 녀석이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밖으로 꺼내 놓고 주무셔요?”
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뜻밖의 질문을 받은 할아버지는 “글쎄…”라며 한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어떻게 잤는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꺼내 놓고 잔 것 같기도 하고 이불 속에 넣고 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날 밤에 자 보고 그 다음 날 대답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노인은 자리에 누워 수염을 이불 밖으로 꺼내 놓았습니다. 어째 허전한 것이 전에는 꼭 이불 속에 넣고 잔 것 같았습니다. 슬그머니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잠을 청했습니다. 이제는 답답한 것이 아무래도 전에는 밖으로 꺼내 놓고 잔 것 같아 다시 이불 밖으로 꺼냈습니다. 노인은 밤새 수염을 이불 속에 넣었다가 꺼냈다가 하느라고 잠을 못 잤습니다.
왜 엉뚱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던 일도 의식이 되어지면 그때부터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기도생활’이 그러합니다. “해야겠다.”는 필요성과 생각은 있지만 그렇게 실천하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강박증이 생겨서 기도가 더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몸에 좋은 약을 먹으면 처음에는 “명현 반응”이 생길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약을 먹었음에도 오히려 몸이 더 안 좋은 역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몸의 좋지 않은 것들이 빠져나가면서 일으키는 반응입니다. 일정 기간만 지나면 몸은 회복을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생활도 그렇습니다. 내 영혼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쁨을 누릴 있는 길운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게 되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6:20-24,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아무런 염려나 근심, 걱정이 없습니까? ‘걱정거리가 없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활에 대하여 염려나 근심 걱정을 하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걱정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걱정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지요.
예전에 ‘건강염려증후군’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등장하는 당시 41세의 회사원 김○○씨는 매스컴에서 질병에 대한 보도만 나오면 왠지 자신도 그런 병이 있는 것 같아 늘 염려가 되었습니다. 배가 몹시 아프기도 하고, 목 아래쪽에 혹이 만져지는 것 같기도 해서 혹시 종양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고, 때로는 소변이 시원하지가 않아서 신장 결석이나 방광염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며 ‘잘 쉬라.’고만 했습니다. 그래도 이쪽저쪽 아픈 부분이 많은 걸로 미뤄보아 분명 병이 있는 것 같은 확신이 들어서 다른 의사를 찾아가 진료를 받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별 탈이 없다고 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를 두고 '건강염려증후군'이라 합니다. ‘신체적으로는 이상이 없는데도 여기저기 아픈 느낌이 들고 병들었다고 생각하는 증상’을 통틀어 표현하는 병명입니다. 자신이 위중한 병에 걸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일종의 정신장애입니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가 많고 건강에 자신감을 잃어 가는30-40대 남성들이나 집안일에서 정신적 압박을 받는 주부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원인은 대부분 심리적인 것입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은 그 원인을
“아프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현실적인 책임과 어려움으로부터 피하고, 주위로부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기우'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걱정’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나누다’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즉 걱정이란 ‘마음이 나누이는 것’ ‘두 마음으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걱정은 사람의 마음을 둘로 나누어지게 해서 평화를 깨뜨리며, 감정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여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7:10절에서 “…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잠언 17:22절에서는 “…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염려거리가 산적해 있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몰려오고, 세상의 희망이 사라지는 때에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고, 한 번 돌로 침을 당하고, 세 번 파선하고,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춥고 헐벗었다.”(고후11:23-27)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하시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애를 주관하시는 주인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며, 신뢰를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염려와 근심걱정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 근심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비록 어두운 부분이 많고, 들려오는 소식들이 마음을 어둡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세상을 밝게 만들어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밝고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쁨을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기쁨을 주려면 당연히 나 자신이 먼저 기쁨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인생이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 합니다.
1. 먼저, 기쁨을 잃고 사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은 근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봅니다. 왜 제자들이 그렇게 근심하고 있습니까? 이유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다가올 박해에 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따라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자신의 죽음과 박해에 대한 말씀이 웬 말입니까? 20절에서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하시고, 21절에서 출산하는 여인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출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과 같은 고통스러운 근심이 제자들에게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22절에서도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의 근심으로 가득한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앞으로 다가올 박해가 제자들에게 근심이 된 원인은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미에서 유적을 탐사하던 ‘유적 탐사단’이 한 오지에서 광부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두막집을 발견했습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 안에는 뼈만 앙상한 두 구의 시신과 많은 금이 담긴 자루가 있었습니다. “왜 두 광부가 많은 금을 모으고 죽었을까?”라는 것이 탐사단의 의문이었습니다. 그 때 한 단원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들은 금맥을 발견하고 금을 캐는 기쁨에 북쪽 지역에는 겨울이 일찍 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적당량의 금을 갖고 빨리 이곳을 떠났어야 했습니다. 혹한과 엄청난 눈보라를 맞았을 때는 이미 식량도 바닥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금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겠죠.”
오늘도 하늘의 기쁨을 안고 살아야 할 성도들이 기쁨은 고사하고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근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영광스러운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성도들이 왜 근심에 싸여서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과 다른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축복과 만사형통이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잘 되고,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되고, 돈 잘 벌고, 행복한 생애를 꿈꿉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에 자신들이 얻게 될 높은 자리와 부귀영화를 꿈꾸었듯이 말입니다. 마가복음 10: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엠마오라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두 자신들의 소망이 그러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고자 할 때에 반드시 결단해야 할 사실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3절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도 바울도 역시 그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8: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고난이 없는 값싼 영광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표현되는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거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의 월계관을 받으려 해도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훈련을 거쳐야 그 영광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영광을 얻기 위해서 그 길이 쉽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를 부르신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마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기쁨을 잃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자존심도 자기 생각도 버리고 따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려움이 없는 형통함만을 요구하니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2.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본문 22-24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말씀에서 답을 찾으셨습니까? 우리 인생의 기쁨을 얻는 두 가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뿐이고,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열정과 인내입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열정과 이것이 이루기까지 인내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13절에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10: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총을 입기를 원하신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은총을 입기도 전에 미리 지치고 낙심해서 포기해버리기 때문에 아무 것도 얻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받기 위하여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1: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열정으로 기도하고 인내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본문 24절에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나 주십니까? 우리가 사람을 만나듯이 그렇게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통하여, 혹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혹 음성을 들려주시고, 혹 우리의 영혼을 감싸주십니다. 사도행전 2:17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십니다. 즉 성령을 우리 영혼에 보내주시면 성령께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사모하십시오.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무엇보다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응답의 표현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기른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손자 녀석이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밖으로 꺼내 놓고 주무셔요?”
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뜻밖의 질문을 받은 할아버지는 “글쎄…”라며 한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어떻게 잤는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꺼내 놓고 잔 것 같기도 하고 이불 속에 넣고 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날 밤에 자 보고 그 다음 날 대답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노인은 자리에 누워 수염을 이불 밖으로 꺼내 놓았습니다. 어째 허전한 것이 전에는 꼭 이불 속에 넣고 잔 것 같았습니다. 슬그머니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잠을 청했습니다. 이제는 답답한 것이 아무래도 전에는 밖으로 꺼내 놓고 잔 것 같아 다시 이불 밖으로 꺼냈습니다. 노인은 밤새 수염을 이불 속에 넣었다가 꺼냈다가 하느라고 잠을 못 잤습니다.
왜 엉뚱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던 일도 의식이 되어지면 그때부터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기도생활’이 그러합니다. “해야겠다.”는 필요성과 생각은 있지만 그렇게 실천하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강박증이 생겨서 기도가 더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몸에 좋은 약을 먹으면 처음에는 “명현 반응”이 생길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약을 먹었음에도 오히려 몸이 더 안 좋은 역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몸의 좋지 않은 것들이 빠져나가면서 일으키는 반응입니다. 일정 기간만 지나면 몸은 회복을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생활도 그렇습니다. 내 영혼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쁨을 누릴 있는 길운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게 되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