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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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6-25 22:28
*** 이 한 가지를 잊지말라. / 베드로후서 3:8-13
** 들어가는 말
베드로후서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부로 보이는 한 여성이 의사를 찾아 왔는데, 양쪽 귀가 뻘겋게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주 심하게 다치셨군요. 어쩌다 그렇게 된 거죠?”
“집에서 다리미질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얼떨결에 그만 다리미로 전화를 받았지 뭐예요.”
의사가 어이없어 웃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 귀는 어떻게 된 거죠?”
그러자 여자가 말했습니다.
“전화가 또 오더라고요.”
잊어버릴 것이 따로 있지. 건망증이 이쯤 되면 큰일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네 삶에는 잊어야 할 것도 많지만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소망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본문 말씀에서 신중한 명령어로 기록되어 있는 8절의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말씀은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왜 잊어서는 안 됩니까? 오늘은 밝은 빛이 있는 날이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난이 겹치는 어두운 날이 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다가올 어두운 날을 위하여 우리는 오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시간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어두운 날은 내가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그 불청객은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요한복음 9:4절을 봅시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인용한 찬송가 370장 1절에서 “어둔 밤 쉬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고 고백합니다.
대홍수가 휩쓸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불의 심판을 받던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나 그 죽음의 시간이 그렇게 다가올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 중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성수대교 붕괴, 서해 유람선 침몰 등.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그 사건들을 기억하시지요? 그 참사를 당한 사람들도 그 순간을 알았다면 그 자리에 있었겠습니까? 인생의 어두운 밤은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그런 어두운 날이 올지라도 당황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준비가 필요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이해나 계산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우리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조롱 섞인 태도로 비난했습니다. 비난자들은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재림을 전하는 베드로를 조롱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물이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조롱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즉 노아시대의 홍수심판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말하면서 하늘과 땅은 장차 있을 불의 심판을 위한 예비해 둔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날을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왜 이런 불신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믿음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강도 높게 선포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자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따르는 우주의 변화 조짐조차도 없음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을 것임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확산되면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던 소망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부당함을 깨우치고, 성도들의 예수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되찾아 주기 위하여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1.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본문 8-10절 상반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베드로 시대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성도들조차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 때 일어난다고 하신 환경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2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현대어성경 “예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물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나는 징조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24:4-12절에서 그 징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자신이 예수라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서 미혹할 것이며, 나라와 민족간의 전쟁이 많이 일어나며,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며, 극심한 핍박이 일어나며, 불법이 판을 치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직전에 있을 환난의 날에 일어날 징조까지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징조가 일어나는지를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그런데 전혀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선포하는 제자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자연의 웅대함과 신선함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일부 인위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자연은 우리가 외경심과 푸근한 마음을 동시에 느낄 정도로 변함없이 웅대하고 아름답고 신선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재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기회가 있을 때 믿음을 준비하라.’고 해도 적당하게 웃어넘기고 맙니다. 홍수로 멸망된 노아시대와 불로 멸망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며 준비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노아와 롯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창세기 19:14절에서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증언합니다.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는“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표현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시편 90:4절 말씀인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현대어성경 “그래요, 주께는 천년도 하루같아 지나가 버린 어제 같고 간밤의 짧디짧은 한순간 같을 뿐.”)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표현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이 사람의 시간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우리 사람의 시간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짧은 하루라도 천 년의 시간이 필요한 일들을 문제없이 이루시며, 반면에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는 천 년의 긴 시간도 하루처럼 기다리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시는 인류역사 최종의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것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도적처럼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4:42-4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뒷밭침하는 말씀이 바로 본문의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말씀은 ‘하루라도 천년 같은 의미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은 ‘천년 같은 긴 시간이라도 하루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사는 것처럼, 천년을 살아도 단 하루를 사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미래에 평가될 자신을 생각하면서 종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우리가 바라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바라는 소망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바라는 것을 손꼽아 헤아려 보십시오. 그 중의 대부분은 아마도 육신적인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본문 10절 하반절-13절을 봅시다. “…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육신적인 이 땅의 것은 모두가 흔적도 없이 없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즉 이 땅의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치 없는 것을 사모하지 말고, 우리의 영원한 삶을 이룰 하나님의 날을 바라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날’이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이 믿지 않은 사람들,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재앙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곧 13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며,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입니다.
미국의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아들은 치료가 되어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소아마비를 치료하여 완치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소년의 어머니가 신문을 보고는 로렌스 박사를 만나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며칠 후 로렌스 박사가 마을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피하여 들어간 곳이 이 소년의 집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비로 인하여 잠시 쉬기를 청하는 로렌스 박사에게 소년의 어머니는 병든 아들과 집의 누추함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는 자신이 거절하여 보낸 사람이 로렌스 박사였음을 알고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박사는 이미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기회는 일생에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것도 소중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는 것, 진실하게 사는 것, 봉사와 헌신과 충성 등 모든 신앙의 일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6-17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에 대하여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주림을 면하려고 생각 없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동생인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 후에 가문의 대를 잇는 장자의 축복을 빼앗기고서야 중요성을 알았지만 이미 기회는 지나간 후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직분이 중요함을 아십니까? 디모데전서 3:13절에서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교사’의 직분은 은사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영광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세상에서의 모든 기회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기회들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재림이 곧 가까이 오고 있으며,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임을 기억하고 준비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어 받는 복된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베드로후서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부로 보이는 한 여성이 의사를 찾아 왔는데, 양쪽 귀가 뻘겋게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주 심하게 다치셨군요. 어쩌다 그렇게 된 거죠?”
“집에서 다리미질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얼떨결에 그만 다리미로 전화를 받았지 뭐예요.”
의사가 어이없어 웃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 귀는 어떻게 된 거죠?”
그러자 여자가 말했습니다.
“전화가 또 오더라고요.”
잊어버릴 것이 따로 있지. 건망증이 이쯤 되면 큰일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네 삶에는 잊어야 할 것도 많지만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소망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본문 말씀에서 신중한 명령어로 기록되어 있는 8절의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말씀은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왜 잊어서는 안 됩니까? 오늘은 밝은 빛이 있는 날이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난이 겹치는 어두운 날이 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다가올 어두운 날을 위하여 우리는 오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시간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어두운 날은 내가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그 불청객은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요한복음 9:4절을 봅시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인용한 찬송가 370장 1절에서 “어둔 밤 쉬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고 고백합니다.
대홍수가 휩쓸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불의 심판을 받던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나 그 죽음의 시간이 그렇게 다가올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 중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성수대교 붕괴, 서해 유람선 침몰 등.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그 사건들을 기억하시지요? 그 참사를 당한 사람들도 그 순간을 알았다면 그 자리에 있었겠습니까? 인생의 어두운 밤은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그런 어두운 날이 올지라도 당황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준비가 필요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이해나 계산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우리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조롱 섞인 태도로 비난했습니다. 비난자들은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재림을 전하는 베드로를 조롱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물이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조롱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즉 노아시대의 홍수심판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말하면서 하늘과 땅은 장차 있을 불의 심판을 위한 예비해 둔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날을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왜 이런 불신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믿음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강도 높게 선포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자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따르는 우주의 변화 조짐조차도 없음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을 것임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확산되면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던 소망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부당함을 깨우치고, 성도들의 예수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되찾아 주기 위하여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1.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본문 8-10절 상반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베드로 시대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성도들조차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 때 일어난다고 하신 환경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2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현대어성경 “예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물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나는 징조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24:4-12절에서 그 징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자신이 예수라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서 미혹할 것이며, 나라와 민족간의 전쟁이 많이 일어나며,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며, 극심한 핍박이 일어나며, 불법이 판을 치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직전에 있을 환난의 날에 일어날 징조까지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징조가 일어나는지를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그런데 전혀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선포하는 제자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자연의 웅대함과 신선함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일부 인위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자연은 우리가 외경심과 푸근한 마음을 동시에 느낄 정도로 변함없이 웅대하고 아름답고 신선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재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기회가 있을 때 믿음을 준비하라.’고 해도 적당하게 웃어넘기고 맙니다. 홍수로 멸망된 노아시대와 불로 멸망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며 준비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노아와 롯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창세기 19:14절에서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증언합니다.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는“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표현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시편 90:4절 말씀인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현대어성경 “그래요, 주께는 천년도 하루같아 지나가 버린 어제 같고 간밤의 짧디짧은 한순간 같을 뿐.”)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표현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이 사람의 시간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우리 사람의 시간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짧은 하루라도 천 년의 시간이 필요한 일들을 문제없이 이루시며, 반면에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는 천 년의 긴 시간도 하루처럼 기다리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시는 인류역사 최종의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것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도적처럼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4:42-4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뒷밭침하는 말씀이 바로 본문의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말씀은 ‘하루라도 천년 같은 의미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은 ‘천년 같은 긴 시간이라도 하루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사는 것처럼, 천년을 살아도 단 하루를 사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미래에 평가될 자신을 생각하면서 종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우리가 바라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바라는 소망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바라는 것을 손꼽아 헤아려 보십시오. 그 중의 대부분은 아마도 육신적인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본문 10절 하반절-13절을 봅시다. “…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육신적인 이 땅의 것은 모두가 흔적도 없이 없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즉 이 땅의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치 없는 것을 사모하지 말고, 우리의 영원한 삶을 이룰 하나님의 날을 바라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날’이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이 믿지 않은 사람들,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재앙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곧 13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며,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입니다.
미국의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아들은 치료가 되어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소아마비를 치료하여 완치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소년의 어머니가 신문을 보고는 로렌스 박사를 만나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며칠 후 로렌스 박사가 마을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피하여 들어간 곳이 이 소년의 집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비로 인하여 잠시 쉬기를 청하는 로렌스 박사에게 소년의 어머니는 병든 아들과 집의 누추함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는 자신이 거절하여 보낸 사람이 로렌스 박사였음을 알고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박사는 이미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기회는 일생에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것도 소중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는 것, 진실하게 사는 것, 봉사와 헌신과 충성 등 모든 신앙의 일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6-17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에 대하여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주림을 면하려고 생각 없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동생인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 후에 가문의 대를 잇는 장자의 축복을 빼앗기고서야 중요성을 알았지만 이미 기회는 지나간 후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직분이 중요함을 아십니까? 디모데전서 3:13절에서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교사’의 직분은 은사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영광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세상에서의 모든 기회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기회들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재림이 곧 가까이 오고 있으며,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임을 기억하고 준비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어 받는 복된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