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마음과 사랑의 열정으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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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6-17 14:02
*** 처음 마음과 사랑의 열정으로 / 계 2:4-5
계 2:4-5(현대어성경),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 들어가는 말
지난 5.31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박맹우 울산시장이 ‘초심으로 돌아가서…’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즉 처음 시장이 된 마음으로 성실하고 열심 있게 일하겠다는 말과 함께 공무원들을 대동하고 태화강 청소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다시 시장으로 뽑아준 시민들에게 이렇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를 보이려는 것이겠지요. 오랜 경험과 연륜을 과시하면서 요령을 피우는 것보다 처음의 설렘과 열정으로 일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처음의 설레는 마음과 감격을 쉽게 잊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열정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처음의 설렘과 열정을 좋아하시는 분이 또 있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당시의 소아시아 지역 일곱 교회 중 하나였던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현대어성경) 고 하셨습니다. 즉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던 그 때의 설렘과 감격과 열정으로 표현된 뜨겁던 사랑이,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 처음 사랑이 변질되고 식어가는 원인을 찾아서 빨리 고치고 다시 처음의 설렘과 감격과 열정의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겠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떠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서 기분 나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애인이나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시대에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많기는 한데,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끓어오르고 너무나 쉽게 식어버리는 양은냄비 같은 사랑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말조차 믿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 속에도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에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1.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은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님께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랑하기는 하지만 처음과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즉 변질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지만, 가면으로 가려진 변질된 사랑이라면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열심도 있고, 헌신도 있고, 희생도 있고, 지식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회복하라고 하신 처음 사랑은 무엇입니까?
옛날 헬라의 부강한 왕이 있었습니다. 처첩들이 많았는데 그 처첩들은 모두 ‘자신이 왕을 제일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처첩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희가 원하는 것을 선물로 주겠다. 나라의 주권만 남겨 놓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가져가라.”
고 했습니다. 갑자기 처첩들은 보석, 집, 토지, 높은 직위 등등.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야단이었습니다. 왕은 한사람씩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적었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은 아무것도 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왕이 그 부인에게 “너는 왜 원하는 것이 없느냐? 욕심도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은
“아니,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당신입니다.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왕은 자신을 가장 진실하게 사랑한 이 부인을 영부인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많은 처첩들은 왕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사랑했지만, 한 부인은 오직 왕을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늘 ‘…주십시오. …해 주십시오.’라는 ‘달라’는 내용이 태반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헌신, 봉사, 위대한 일, 많은 사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원하시며, 또한 우리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6:6절을 봅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현대어성경/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우리 마을 아파트 앞 도로변, 혹은 마을의 도로변에 매일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채소나 과일을 파는 것을 봅니다. 다 팔아봐야 몇 만원이 되지 않는 채소들이나 철따라 나는 과일들을 난장에 펴놓고 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은 농사를 짓는 분들이어서 자신들이 농사지은 농작물을 파는 것입니다.
무더운 날씨나 웬만큼 춥거나 비가와도 파라솔 하나 세워놓지 않고 앉아서 장사를 합니다. 그런데도 힘든 기색도 짜증스러움도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분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 자녀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그 몇 만원을 위해 그 고생을 하나!’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분들에게 그 몇 만원은 자식의 꿈을 열어주는 희망입니다. 몇 해 전에는 한 해 내내 채소를 팔고 단감을 팔아서 아들 승용차를 사줬다고 자랑하는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 않습니다. 가족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주일에 교회 오는 것이 번거롭고, 특히 저녁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하는 것이 피곤하고, 헌금하는 것이 아깝게 여겨지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번거롭게 여겨진다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에 문제가 생겨진 것입니다. 즉 에베소 교회처럼 회복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입니다. 앞서 보았던 호세아 6:6절의 말씀처럼 예배나 최상의 제물보다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야고보서 4:4절을 봅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공동번역/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나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2. 하나님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어떻게 회복합니까?
본문 5절 상반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현대어성경/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다보면 어떤 분들이 “그때가 좋았는데…”라는 한숨 섞인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지요? 이는 자신의 생애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좋은 부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처음의 감격과 설렘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타임머신이 있어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일단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의 감격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때는 이랬었구나!”라는 것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중요한 것은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는 필요성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처음마음과 지금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이 변했구나!’라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하게 된 원인을 찾아봅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생활이 어려웠다’ ‘사는 것이 바빠서 여유가 없었다.’ ‘세상 친구들’ ‘신앙의 회의’ ‘신앙적인 게으름’ 등등의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설렘과 감격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니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계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처음의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슬픔보다는 사랑을 잃은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인간을 위한 속죄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4:9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변심을 했으니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통렬한 뉘우침과 반성과 함께 처음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것을 후회하고 뉘우쳤지만 처음으로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잊으려했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통곡하며 뉘우치고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낮은 마음으로 예수님 곁에 섰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의 변질된 사랑이 어떠했든지 도려내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설렘과 감격으로 예배하며, 교회에 가는 것이 좋고, 봉사하는 것이 마냥 좋고, 성경말씀이 달게 여겨지던 그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직 몇 년을 신앙 생활하지만 아직 그런 감격도 기쁨도 설렘도 느껴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곰곰이 다시 생각하고 정립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절 말씀을 꼭 생각하십시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3. 만일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5절 후반절을 봅시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현대어성경/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경고의 말씀을 듣지만 순종하고 안 하고는 각자의 결정에 따르게 됩니다. 만일 처음 사랑과 관심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무서운 경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촛대는 에베소 교회를 의미하며, 오늘의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 촛대가 어디에 있습니까? 계시록 1:12-13절을 보면 촛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 성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그 곳입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과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그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듯이 처음 마음을 회복하지 못한 성도를 하나님의 나라 생명의 자리에서 내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융성했던 에베소교회가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위대했습니다. 그 믿음이 퍼지고 전해져서 오늘처럼 온 땅에 복음전해지고 사람들을 살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 사랑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도 지금까지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도 ‘요한’이 묻혀있는 지금의 에베소교회는 그 터와 골조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뜻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좋아하셨던 처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설렘과 감격이 있는 사랑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과 봉사, 수많은 위대한 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해서 촛대가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만일 처음 사랑과 행위를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버려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회복할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착각 중에 한 가지는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경 읽는 것 기도하는 것 힘들게 생각하고, 헌금하는 것 아깝게 여기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자신만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고,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소망과 믿음이 착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나 자신을 드리고 처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설렘과 감격의 사랑을 회복하고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 2:4-5(현대어성경),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 들어가는 말
지난 5.31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박맹우 울산시장이 ‘초심으로 돌아가서…’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즉 처음 시장이 된 마음으로 성실하고 열심 있게 일하겠다는 말과 함께 공무원들을 대동하고 태화강 청소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다시 시장으로 뽑아준 시민들에게 이렇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를 보이려는 것이겠지요. 오랜 경험과 연륜을 과시하면서 요령을 피우는 것보다 처음의 설렘과 열정으로 일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처음의 설레는 마음과 감격을 쉽게 잊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열정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처음의 설렘과 열정을 좋아하시는 분이 또 있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당시의 소아시아 지역 일곱 교회 중 하나였던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현대어성경) 고 하셨습니다. 즉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던 그 때의 설렘과 감격과 열정으로 표현된 뜨겁던 사랑이,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 처음 사랑이 변질되고 식어가는 원인을 찾아서 빨리 고치고 다시 처음의 설렘과 감격과 열정의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겠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떠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서 기분 나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애인이나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시대에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많기는 한데,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끓어오르고 너무나 쉽게 식어버리는 양은냄비 같은 사랑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말조차 믿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 속에도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에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1. 회복해야 할 처음 사랑은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님께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랑하기는 하지만 처음과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즉 변질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지만, 가면으로 가려진 변질된 사랑이라면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열심도 있고, 헌신도 있고, 희생도 있고, 지식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회복하라고 하신 처음 사랑은 무엇입니까?
옛날 헬라의 부강한 왕이 있었습니다. 처첩들이 많았는데 그 처첩들은 모두 ‘자신이 왕을 제일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처첩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희가 원하는 것을 선물로 주겠다. 나라의 주권만 남겨 놓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가져가라.”
고 했습니다. 갑자기 처첩들은 보석, 집, 토지, 높은 직위 등등.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야단이었습니다. 왕은 한사람씩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적었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은 아무것도 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왕이 그 부인에게 “너는 왜 원하는 것이 없느냐? 욕심도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은
“아니,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당신입니다.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왕은 자신을 가장 진실하게 사랑한 이 부인을 영부인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많은 처첩들은 왕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사랑했지만, 한 부인은 오직 왕을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늘 ‘…주십시오. …해 주십시오.’라는 ‘달라’는 내용이 태반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헌신, 봉사, 위대한 일, 많은 사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원하시며, 또한 우리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6:6절을 봅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현대어성경/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우리 마을 아파트 앞 도로변, 혹은 마을의 도로변에 매일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채소나 과일을 파는 것을 봅니다. 다 팔아봐야 몇 만원이 되지 않는 채소들이나 철따라 나는 과일들을 난장에 펴놓고 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은 농사를 짓는 분들이어서 자신들이 농사지은 농작물을 파는 것입니다.
무더운 날씨나 웬만큼 춥거나 비가와도 파라솔 하나 세워놓지 않고 앉아서 장사를 합니다. 그런데도 힘든 기색도 짜증스러움도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분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 자녀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그 몇 만원을 위해 그 고생을 하나!’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분들에게 그 몇 만원은 자식의 꿈을 열어주는 희망입니다. 몇 해 전에는 한 해 내내 채소를 팔고 단감을 팔아서 아들 승용차를 사줬다고 자랑하는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 않습니다. 가족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주일에 교회 오는 것이 번거롭고, 특히 저녁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하는 것이 피곤하고, 헌금하는 것이 아깝게 여겨지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번거롭게 여겨진다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에 문제가 생겨진 것입니다. 즉 에베소 교회처럼 회복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입니다. 앞서 보았던 호세아 6:6절의 말씀처럼 예배나 최상의 제물보다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야고보서 4:4절을 봅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공동번역/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나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2. 하나님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어떻게 회복합니까?
본문 5절 상반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현대어성경/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다보면 어떤 분들이 “그때가 좋았는데…”라는 한숨 섞인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지요? 이는 자신의 생애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좋은 부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처음의 감격과 설렘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타임머신이 있어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일단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의 감격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때는 이랬었구나!”라는 것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중요한 것은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는 필요성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처음마음과 지금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이 변했구나!’라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하게 된 원인을 찾아봅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생활이 어려웠다’ ‘사는 것이 바빠서 여유가 없었다.’ ‘세상 친구들’ ‘신앙의 회의’ ‘신앙적인 게으름’ 등등의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설렘과 감격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니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계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처음의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슬픔보다는 사랑을 잃은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인간을 위한 속죄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4:9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변심을 했으니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통렬한 뉘우침과 반성과 함께 처음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것을 후회하고 뉘우쳤지만 처음으로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잊으려했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통곡하며 뉘우치고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낮은 마음으로 예수님 곁에 섰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의 변질된 사랑이 어떠했든지 도려내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설렘과 감격으로 예배하며, 교회에 가는 것이 좋고, 봉사하는 것이 마냥 좋고, 성경말씀이 달게 여겨지던 그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직 몇 년을 신앙 생활하지만 아직 그런 감격도 기쁨도 설렘도 느껴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곰곰이 다시 생각하고 정립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절 말씀을 꼭 생각하십시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3. 만일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5절 후반절을 봅시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현대어성경/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경고의 말씀을 듣지만 순종하고 안 하고는 각자의 결정에 따르게 됩니다. 만일 처음 사랑과 관심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무서운 경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촛대는 에베소 교회를 의미하며, 오늘의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 촛대가 어디에 있습니까? 계시록 1:12-13절을 보면 촛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 성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그 곳입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과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그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듯이 처음 마음을 회복하지 못한 성도를 하나님의 나라 생명의 자리에서 내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융성했던 에베소교회가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위대했습니다. 그 믿음이 퍼지고 전해져서 오늘처럼 온 땅에 복음전해지고 사람들을 살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 사랑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도 지금까지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도 ‘요한’이 묻혀있는 지금의 에베소교회는 그 터와 골조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뜻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좋아하셨던 처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설렘과 감격이 있는 사랑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과 봉사, 수많은 위대한 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해서 촛대가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만일 처음 사랑과 행위를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버려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회복할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착각 중에 한 가지는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경 읽는 것 기도하는 것 힘들게 생각하고, 헌금하는 것 아깝게 여기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자신만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고,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소망과 믿음이 착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나 자신을 드리고 처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설렘과 감격의 사랑을 회복하고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