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무엇을 보느냐?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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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6-11 21:57
*** 너는 무엇을 보느냐? / 요한복음 4:27-38
** 들어가는 말
요 4:27-38,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등산용, 주머니칼을 보여주며)
여러분, 지금 보고 계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용도로 생각됩니까?
어떤 분은 ‘무서운 흉기다.’라고 생각하실 것이고, 어떤 분은 ‘등산이나 낚시나 나들이 갈 때 가지고 다니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이 있습니다. 같은 관점으로 보기도 하겠지만, 환경이나 각자의 생각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보는 눈)은 신앙인과 비 신앙인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날 것이며,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도 차이가 많을 것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 성을 방문하셨을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서 수가 성의 입구에 있는 공동 우물곁에 잠시 쉬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고, 예수님은 물을 길러 온 어떤 수가 성의 여인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유대인이 자기 마을에 들어 온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족속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바벨론 왕이 빈천한 사람들을 남겨두어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민족을 이주시켜서 혼혈이 되게 했습니다. 만일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면 언젠가는 세력을 키워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정복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은 혼혈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그런 곳을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방문하셨으니 사마리아 여인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예수님은 수가 성의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창녀였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한낮에 우물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반 사막지역인 그곳에서는 한낮의 열기가 너무 뜨겁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사람도 짐승도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들 만나는 것이 싫은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다.’는 말이 마음을 끌었던 것입니다. 눈치 보면서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현실과 마음을 꿰뚫어보셨고,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여인은 메시아를 만났다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부끄러움도 잊어버리고 마을로 달려가서 쉬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쳤습니다. 한편 그 시간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가져와서 예수님께 “선생님 잡수십시오.”라고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갸우뚱하면서 “우리가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음식을 갖다드렸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여인이 전하는 ‘메시아’라는 소리에 한낮의 뜨거움도 잊고 예수님이 계시는 마을 입구의 우물을 향하여 모여오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은 들판을 가로질러 모여오는 수가 성 사람들을 보면서 당신이 하실 일을 생각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들판에 파랗게 자라는 곡식들을 보면서 “넉 달 정도 지나면 추수하겠구나.”라는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을 보고 있지만 예수님이 보시는 것과 제자들의 보는 눈은 달랐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보는 눈을 예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너는 무엇을 보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예수님의 생각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여러분은 지금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에 대하여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장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공부하는 것이나 하는 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정처 없이 인가(人家)를 찾아 방황했습니다. 가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은 나타나지 않고 두 사람은 지쳐버렸습니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사막 길을 헤맸기 때문에 쓰러지기 직전에 놓였습니다. 그 때 저 멀리서 공동묘지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아들은 완전히 절망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모든 것은 끝장났어요.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사막을 헤매다가 죽은 무덤이 저기 있잖아요.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죽고 말거예요.”
그러나 아버지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애야, 그게 아니란다. 저기 저렇게 공동묘지가 있다는 말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니? 우리 조금만 더 걸어가 보자.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거란다.”
여러분은 누가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아들이 보는 눈입니까? 아버지가 보는 눈입니까? 아버지의 보는 눈이 옳습니다. 공동묘지가 있다는 말은 누군가가 그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과연 아버지가 보았던 대로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서 두 사람은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같은 상황에서 같은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보는 눈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들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야, 저기 저렇게 무덤은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구나. 이제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비참하게 죽겠구나.”라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무덤 안에 들어있는 죽은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낸 살아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 마을이 가까이 있구나!”라고 희망을 본 것입니다. 히브리서 6:19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현대어성경 /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 확고한 희망은 마치 우리 영혼을 이끄는 튼튼하고 믿을 만한 닻과 같아서 우리를 하늘의 지성소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이르게 해줍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앙이 일어나고, 환경재난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인 분쟁과 민족의 내분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정부와 국민간의 불협화음이 높아만 가고, 서민들의 생활고충과 기업들의 고충도 높아갑니다. 국가적인 미래도 저 출산, 높은 이혼율, 고령화 사회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 염려를 하게 합니다.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많아집니다. 분쟁으로 얼룩진 교회들도 수없이 많고, 작은 교회들은 유지가 어려워 폐쇄되는 곳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이 어려워가는 현실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장 급한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과 들판에 심겨진 곡식만 보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는 않습니까? 당장 눈앞에 살아가는 일만 보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시듯이 사명의 눈, 소망의 눈,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똑같은데 보는 사람의 태도는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이것은 '육의 눈'과 '영의 눈'의 차이입니다. 육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 그것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기 쉽습니다. 반면에 영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까지 봅니다. 즉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8:5-7절을 봅시다. (현대어성경)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삽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만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뜻대로 산 사람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일도 없고 또 결코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고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실 일들을 미리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고픔을 해결할 음식 구하는 일에 몰두하고 들판의 곡식들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양식이었고, 지금 구원받아야 할 생명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모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더 중요합니까? 잠시 사는 이 땅의 먹고사는 일, 쾌락을 누리는 일이 중요합니까?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삶을 누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더 중요합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땅히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그런 사명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눈은 성령 충만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런 눈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마가복음 10:17-22절에 부자 관원인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내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이 땅의 재물이 더 귀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4:16-24절에 나오는 ‘큰 잔치의 비유’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벌여놓고 손님들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는 밭을 샀으니 어쩔 수 없이 가 보아야겠으니 잔치에 못 가겠다.” “나는 소 10마리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하니 잔치에 못가겠다.” “나는 방금 결혼했기 때문에 잔치에 못가겠다.”고 변명하며 거절했습니다. 이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잔치보다는 세상일을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9:6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가 세상일을 더 중요하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시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관심을 끌며 다가오는 수많은 일들을 볼 때에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월드컵 축구를 한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관람을 하면서 자신의 영을 위해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지 못한다면 그 생의 결과는 어떠하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을 보든지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예수님이 보시는 영의 관점으로, 믿음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온 마음과 물질과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형통한 길입니다.
** 들어가는 말
요 4:27-38,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등산용, 주머니칼을 보여주며)
여러분, 지금 보고 계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용도로 생각됩니까?
어떤 분은 ‘무서운 흉기다.’라고 생각하실 것이고, 어떤 분은 ‘등산이나 낚시나 나들이 갈 때 가지고 다니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이 있습니다. 같은 관점으로 보기도 하겠지만, 환경이나 각자의 생각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보는 눈)은 신앙인과 비 신앙인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날 것이며,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도 차이가 많을 것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 성을 방문하셨을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서 수가 성의 입구에 있는 공동 우물곁에 잠시 쉬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고, 예수님은 물을 길러 온 어떤 수가 성의 여인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유대인이 자기 마을에 들어 온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족속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바벨론 왕이 빈천한 사람들을 남겨두어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민족을 이주시켜서 혼혈이 되게 했습니다. 만일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면 언젠가는 세력을 키워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정복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은 혼혈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그런 곳을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방문하셨으니 사마리아 여인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예수님은 수가 성의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창녀였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한낮에 우물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반 사막지역인 그곳에서는 한낮의 열기가 너무 뜨겁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사람도 짐승도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들 만나는 것이 싫은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다.’는 말이 마음을 끌었던 것입니다. 눈치 보면서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현실과 마음을 꿰뚫어보셨고,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여인은 메시아를 만났다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부끄러움도 잊어버리고 마을로 달려가서 쉬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쳤습니다. 한편 그 시간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가져와서 예수님께 “선생님 잡수십시오.”라고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갸우뚱하면서 “우리가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음식을 갖다드렸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여인이 전하는 ‘메시아’라는 소리에 한낮의 뜨거움도 잊고 예수님이 계시는 마을 입구의 우물을 향하여 모여오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은 들판을 가로질러 모여오는 수가 성 사람들을 보면서 당신이 하실 일을 생각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들판에 파랗게 자라는 곡식들을 보면서 “넉 달 정도 지나면 추수하겠구나.”라는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을 보고 있지만 예수님이 보시는 것과 제자들의 보는 눈은 달랐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보는 눈을 예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너는 무엇을 보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예수님의 생각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여러분은 지금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에 대하여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장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공부하는 것이나 하는 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정처 없이 인가(人家)를 찾아 방황했습니다. 가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은 나타나지 않고 두 사람은 지쳐버렸습니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사막 길을 헤맸기 때문에 쓰러지기 직전에 놓였습니다. 그 때 저 멀리서 공동묘지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아들은 완전히 절망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모든 것은 끝장났어요.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사막을 헤매다가 죽은 무덤이 저기 있잖아요.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죽고 말거예요.”
그러나 아버지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애야, 그게 아니란다. 저기 저렇게 공동묘지가 있다는 말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니? 우리 조금만 더 걸어가 보자.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거란다.”
여러분은 누가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아들이 보는 눈입니까? 아버지가 보는 눈입니까? 아버지의 보는 눈이 옳습니다. 공동묘지가 있다는 말은 누군가가 그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과연 아버지가 보았던 대로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서 두 사람은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같은 상황에서 같은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보는 눈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들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야, 저기 저렇게 무덤은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구나. 이제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비참하게 죽겠구나.”라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무덤 안에 들어있는 죽은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낸 살아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 마을이 가까이 있구나!”라고 희망을 본 것입니다. 히브리서 6:19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현대어성경 /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 확고한 희망은 마치 우리 영혼을 이끄는 튼튼하고 믿을 만한 닻과 같아서 우리를 하늘의 지성소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이르게 해줍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앙이 일어나고, 환경재난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인 분쟁과 민족의 내분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정부와 국민간의 불협화음이 높아만 가고, 서민들의 생활고충과 기업들의 고충도 높아갑니다. 국가적인 미래도 저 출산, 높은 이혼율, 고령화 사회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 염려를 하게 합니다.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많아집니다. 분쟁으로 얼룩진 교회들도 수없이 많고, 작은 교회들은 유지가 어려워 폐쇄되는 곳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이 어려워가는 현실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장 급한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과 들판에 심겨진 곡식만 보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는 않습니까? 당장 눈앞에 살아가는 일만 보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시듯이 사명의 눈, 소망의 눈,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똑같은데 보는 사람의 태도는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이것은 '육의 눈'과 '영의 눈'의 차이입니다. 육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 그것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기 쉽습니다. 반면에 영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까지 봅니다. 즉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8:5-7절을 봅시다. (현대어성경)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삽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만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뜻대로 산 사람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일도 없고 또 결코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고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실 일들을 미리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고픔을 해결할 음식 구하는 일에 몰두하고 들판의 곡식들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양식이었고, 지금 구원받아야 할 생명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모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더 중요합니까? 잠시 사는 이 땅의 먹고사는 일, 쾌락을 누리는 일이 중요합니까?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삶을 누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더 중요합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땅히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그런 사명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눈은 성령 충만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런 눈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마가복음 10:17-22절에 부자 관원인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내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이 땅의 재물이 더 귀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4:16-24절에 나오는 ‘큰 잔치의 비유’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벌여놓고 손님들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는 밭을 샀으니 어쩔 수 없이 가 보아야겠으니 잔치에 못 가겠다.” “나는 소 10마리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하니 잔치에 못가겠다.” “나는 방금 결혼했기 때문에 잔치에 못가겠다.”고 변명하며 거절했습니다. 이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잔치보다는 세상일을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9:6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가 세상일을 더 중요하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시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관심을 끌며 다가오는 수많은 일들을 볼 때에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월드컵 축구를 한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관람을 하면서 자신의 영을 위해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지 못한다면 그 생의 결과는 어떠하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을 보든지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예수님이 보시는 영의 관점으로, 믿음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온 마음과 물질과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형통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