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인간성 - 우리가 닮아야 할 주님의 성품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726회 작성일 2006-12-14 22:47
인간성 - 우리가 닮아야 할 주님의 성품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8:2-11,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아서 그 사람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다운 인간성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인간성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안다고 하시며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누가복음 6:44절)고 하셨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3:12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생활에서 나타나는 인간성이 그 사람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카네기 멜론대학에서 학생 일만 명을 상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질문 내용은 “사람이 성공을 하는 비결이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응답자의 절대 다수가 성공지수를 100으로 보았을 때, 지식 혹은 기술은 15%정도 차지하며 나머지 85%는 인간성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 사람의 화평과 온유한 마음, 이러한 인간성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미국 메사추세츠주에 있는 하버드대학에서는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이유에 대한 유형조사”를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해고당한 이유에서 ‘지식이나 기술’에 관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해고당하는 100%, 그 사람의 잘못된 인간성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삶을 네 단계로 나누어서 각 단계에서 갖추어야 할 인간성을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 어린 사람은 겸손을 배워야 한다.  혈기가 왕성한 젊은 때에는 온유를 잊지 말아야 한다.  장년이 되어서는 욕심이 지나치기 쉬우므로 공정을 잊지 마라.  늙어서는 잘못하면 주책뿐이므로 신중 하라.”

우리들이 사는 사회가 아직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진정한 인재를 꼽을 때는 ‘인간성’을 달아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내면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세계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성’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내면세계를 살피시고 판단하십니다. 사무엘상 2:3절에서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하시며, 잠언 16:2절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시고, 예레미야 17:10절에서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마땅히 바른 생각과 함께 정직과 성실함, 부드러움과 사려 깊은 인간성을 생활 속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이러한 인간다움의 성품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그 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시간의 본문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인간다움의 성품은 당시 사회지도층의 편협한 이기주의와 선명하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도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시던 성전 뜰로 왔습니다. 그들에게 끌려온 여인에 대하여 “간음 중에 잡힌 여자”라는 상황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이 설명은 당시의 비참한 광경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죽음 목숨’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잡혔다는 것은 지금 여인의 상태가 벌거벗은 상태임을 말해줍니다. 그 여인은 수치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을 것이며, 인간의 수치와 고통스러운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면 벌써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여인을 끌고 온 그들은 그 여인을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 중앙에 세우고는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굽히시고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시자 ‘이젠 제대로 걸렸다.’고 여겼는지 답변을 다그쳤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계시던 예수님은 허리를 펴시고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는 다시 허리를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계속 쓰셨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예수님이 일어나셨습니다. 그곳에는 그 여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씩 빠져나가서 결국 한 사람도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며 여인을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성품이 어떠해야 함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자비롭고 선하시며 사람을 생각하는 그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인간성을 제시하십니다. 이 대강절에 주님을 닮아야 할 인간성을 생각해 봅시다.

1. 주님을 닮은 인간성은 사람을 생각하는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끌고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을 올무에 걸리도록 시험하려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율법에 의해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주님은 말없이 허리를 굽히시고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무엇을 쓰셨는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격동되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되도록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너무나 뜻밖의 말씀입니다. ‘돌로 치라.’든지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 중에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피고의 죄를 묵과하지도 않으셨으며, 고소하는 사람들을 옹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범죄자들을 처벌할 때의 원칙을 적용하셨습니다. 신명기 17:7절입니다.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찌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에도 이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죽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죽이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죄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2:27절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을 닮은 사람들은 제도나 법을 내세우기 이전에 먼저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편을 가르고, 사람을 정죄하고,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처럼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사람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사람,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주시는 것(마 5:9)입니다.

2. 주님을 닮은 인간성은 인내하는 여유로운 성품입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송사하는 사람들이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판결을 주문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를 굽히시고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송사하는 사람들은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계속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한 마디 던져놓으시고는 다시 허리를 숙여 무엇인가를 땅바닥에 쓰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흥분과 격동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시는 시간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인들을 참으시며 인내하시는 시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나, 이들을 고소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나, 몰려온 군중들이나 모두가 똑같은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고, 인간들이 서로를 ‘죄인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 인생 중에는 죄가 없는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어떤 헬라어 사본에는 ‘예수께서 땅 위에 그들 모든 사람들의 각각의 죄를 기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성급하고 바쁘게 삽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주는 여유로운 마음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너무 바쁘게 기도합니다. 자신의 할 말만 숨 가쁘게 늘어놓고는 휑하니 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21:19절에서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 히브리서 10:36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고, 야고보서 1: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소망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주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도 인내하며 여유를 가지는 인간성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조급함은 죄악에 치우칠 뿐임을 잊지 않아야합니다.

3. 주님을 닮은 인간성은 용서하는 부드러운 성품입니다.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돌아가 버리자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끝없는 용서이며 사랑입니다. 이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품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남을 정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못했을 때에는 관대한 용서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약 2:13)이라 하셨으며, “비판하고 헤아리는 그 비판과 헤아림으로 도로 받을 것이라”(마 7:2)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오누이가 있었습니다. 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는데, 오빠가 결핵에 걸려 눕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오빠의 모습을 보다 못한 누이는 어쩔 수 없이 오빠의 약값을 위하여 미군에게 몸을 팔았습니다. 덕분에 오빠는 차츰 건강이 회복되어 갔습니다.
어느 날, 오빠가 다니는 교회의 한 신자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말은 금세 온 교인들에게 퍼졌으며 결국 오빠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충격을 받은 오빠는 “동생의 몸을 담보로 내 병이 나았다니…”하며 괴로워했습니다. 더 이상 교회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과 좌절 속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한편 몸까지 팔아 오빠의 생명을 살렸던 누이도 “이제 오빠가 없는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라며 따라서 죽고 말았습니다.
장례식 날, 두 시신을 앞에 둔 목사님은 울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날 저에게 ‘너 아무게 목사야, 너는 네 양떼를 세상에 있을 때 얼마나 잘 돌보았느냐?’고 물으신다면, 하나님 용서하옵소서. 저는 양은 한 마리도 없고 오직 이리떼만 있는 교회에서 이리떼만 먹이다가 왔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이해해주고, 아껴주고, 용서하는 인간성을 만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반면에 교묘하게 이용하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정죄하고, 편을 가르고, 이기적인 인간성은 넘쳐납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짐승의 마음을 가진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세상에 오심을 짐승들의 우리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짐승으로 변한 세상에 사람다운 생명을 주시려고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 사람다운 인간성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갑시다. 나 자신이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민족이 변해갈 것입니다. 이 뜻 깊은 대강절에 주님의 성품을 이루는 복된 삶이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게 이루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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