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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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12-03 21:08
***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 막 10:35-45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버드대 신학대학 교수인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1932-1996)'은 정신박약 장애자 공동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 arche Daybreak)’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며 존경받는 교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장애자 공동체의 봉사자로 들어갔습니다. 이 ‘라르쉬’공동체는 헨리 나우웬 교수가 봉사자로 있으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왜 라르쉬 공동체의 봉사자로 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천재’,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고,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기까지 줄곧 올라왔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성공만을 향하여, 다시 말하자면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지체인 ‘아담’을 만났을 때, 이런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지시설의 봉사자로 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내리막길에서 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책에서 현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쉽게 빠지기 쉬운 유혹이 “현실적이 되는 것, 멋있게 보이는 것, 힘이 최고라는 생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교수의 고백대로 오늘의 사람들은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로지 위에 오르겠다는 생각이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등주의’에 빠져서 운동이든, 공부든, 사업이든, 세일즈든, 하다못해 옷, 장신구, 몸매까지도 튀어야 하고,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운동경기에서도 ‘금메달’이 아니면 기가 죽어야 하고, 내 아이가 일등이 아니면 심기가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성공을 향하여, 남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하여 달리고 또 달립니다. 이런 상황은 교회에도 어김없이 들어와서 ‘우리교회가 다른 교회보다는 나아야 하고 무엇인가가 달라야 한다.’는 엉뚱한 경쟁심과 우월감을 가지려고 기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이 어떤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본문의 배경과 의도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도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형을 받아 죽게 될 것이며,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저마다 속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 길이 영광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저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 때,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요청을 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자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않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나라의 제 이인자의 자리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하는 청탁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발칵’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자신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입니까? 예수님은 인류의 구속을 위한 죽음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창조주로서의 하늘 권능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피조물의 세계로 들어오셨는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자리, 섬김을 받는 자리, 자기 이익과 자기 자랑에 몰두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직분을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이 여기며 자랑하고, 사회적인 신분의 높음이나 소유의 많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미친 듯이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9:24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자랑할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깨닫기를 더디 하는 제자들과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도 선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본문말씀을 통하여 정상에 서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본연의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42절에서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하시며 세상에서 통용되는 권력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거니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높아지고 싶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본문 43-44절을 봅시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낮아짐’에 대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낮아지기 전에 먼저 거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가득 차 있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7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본성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모든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다 비워내시고 낮아지셨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사람이 필요해서 신문에 모집광고를 내었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서 7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회사에서는 시험을 쳐서 그 가운데 적당한 사람들을 뽑기로 했습니다.
시험은 간단했지만 방법이 색달랐습니다. 지원자들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한 사람씩만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시험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사방 벽에 큰 거울이 하나씩 걸려있었습니다. 지원자들은 그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울 위에 쓰여 있는 질문에 맞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질문지에 적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거울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거울에 비친 이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두 번째 거울에는 “이 사람은 여하에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세 번째 거울에는 “이 사람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마지막 네 번째 거울에는 “만일 당신이라면 이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시험의 전부였습니다.
시험을 다 치르고서 시험장 밖으로 빠져 나오는 사람마다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서 수군거렸습니다. “참, 싱거운 시험도 다 있네. 사람을 뽑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쳐서 실력으로 뽑아야지. 어린 아이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러면서도 그들은 저마다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드디어 합격자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70명 가운데 단 한 사람만 합격하고, 나머지 69명은 모두 떨어졌습니다. 합격한 사람은 네 가지 질문에 모두 솔직하게 ‘아니오’라고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 회사는 자기의 실력을 뽐내면서 큰소리치는 사람을 원치 않았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원했습니다. 자기의 부족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뽑는 과정도 이러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는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 과정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고린도전서 1:26절에서 밝히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좋아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시기 위함’입니다. 즉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하지만, 비워진 사람들은 자랑할 것이 없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육신적인 모든 것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비워지지 않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러한 육신적인 자랑거리들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고난과 역경, 어렵고 눈물나는 길들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욥기 23:10절에서 고통과 환난 속에서 부르짖는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8:10절에서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시며 육신의 자랑거리들을 비우게 하십니까? 그것은 인간 스스로는 육신의 것들을 비워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연단하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낮아져야 합니다.
본문 43-44절을 봅시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사람이 자랑거리가 없어지고 나면 낮아집니다. 그렇다면 낮아짐이란 어떤 것입니까?
1) 낮아진다는 것은 겸손한 삶입니다.
성경에서 겸손이라는 단어에는 위대한 약속들이 들어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품 중의 하나이며, 겸손에 있어서 탁월한 모범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서 주님은“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당신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겸손에 대한 대표적인 약속을 보면 잠언 15:33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하시며 22:4절에서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빌립보서 2:3절을 봅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한 삶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높이는 삶입니다. 자기 PR시대라는 지금 세상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인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약속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겸손한 삶을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2) 낮아진다는 것은 봉사와 섬김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는 사역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곧 교육과 전도와 봉사와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삶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당신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섬김과 봉사의 삶은 신앙이 생활 속에서 맺히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착한 일’에 대하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8절에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시며, 고린도후서 9:8절에서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서울에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있습니다. 학교의 건학이념을 ‘만유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받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인 사랑 정신을 가르치고, 배우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다.’라고 정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학교입니다. 현재 정신학원의 교훈은 ‘굳건한 믿음’, ‘고결한 인격’, ‘희생적 봉사’ 이 세 가지입니다. 이 학교에는 노래 선교단이 있는데 매년 방학이 되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오래 전 인솔자와 함께 중창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고등학교. 교회. 대학들을 순방하며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단원은 모두 15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차를 타야 할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차 있는 데로 뛰어가 서로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날 동행했던 장로님 한 분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인솔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학생들은 차를 탈 때마다 앞을 다투어 뛰어갑니까.” 인솔자는 “자동차의 좌석이 열두 좌석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세 명은 차 바닥에 엎드려야 하는데 서로 먼저 타서 엎드리기 위해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궁금해진 장로님이 직접 차 있는 데로 가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뛰어간 두 여학생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날 그 장로님은 정신여고의 중창단을 위하여 15인승 봉고차를 선물로 사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으며, 그 날을 준비하는 대강절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을 기다리는 가장 삶의 자세는 ‘비우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으뜸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대에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는’ 것뿐입니다. 또 다시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주님처럼 비우고 낮아지는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이루어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버드대 신학대학 교수인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1932-1996)'은 정신박약 장애자 공동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 arche Daybreak)’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며 존경받는 교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장애자 공동체의 봉사자로 들어갔습니다. 이 ‘라르쉬’공동체는 헨리 나우웬 교수가 봉사자로 있으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왜 라르쉬 공동체의 봉사자로 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천재’,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고,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기까지 줄곧 올라왔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성공만을 향하여, 다시 말하자면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지체인 ‘아담’을 만났을 때, 이런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지시설의 봉사자로 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내리막길에서 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책에서 현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쉽게 빠지기 쉬운 유혹이 “현실적이 되는 것, 멋있게 보이는 것, 힘이 최고라는 생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교수의 고백대로 오늘의 사람들은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로지 위에 오르겠다는 생각이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등주의’에 빠져서 운동이든, 공부든, 사업이든, 세일즈든, 하다못해 옷, 장신구, 몸매까지도 튀어야 하고,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운동경기에서도 ‘금메달’이 아니면 기가 죽어야 하고, 내 아이가 일등이 아니면 심기가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성공을 향하여, 남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하여 달리고 또 달립니다. 이런 상황은 교회에도 어김없이 들어와서 ‘우리교회가 다른 교회보다는 나아야 하고 무엇인가가 달라야 한다.’는 엉뚱한 경쟁심과 우월감을 가지려고 기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이 어떤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본문의 배경과 의도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도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형을 받아 죽게 될 것이며,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저마다 속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 길이 영광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저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 때,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요청을 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자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않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나라의 제 이인자의 자리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하는 청탁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발칵’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자신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입니까? 예수님은 인류의 구속을 위한 죽음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창조주로서의 하늘 권능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피조물의 세계로 들어오셨는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자리, 섬김을 받는 자리, 자기 이익과 자기 자랑에 몰두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직분을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이 여기며 자랑하고, 사회적인 신분의 높음이나 소유의 많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미친 듯이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9:24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자랑할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깨닫기를 더디 하는 제자들과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도 선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본문말씀을 통하여 정상에 서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본연의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42절에서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하시며 세상에서 통용되는 권력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거니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높아지고 싶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본문 43-44절을 봅시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낮아짐’에 대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낮아지기 전에 먼저 거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가득 차 있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7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본성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모든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다 비워내시고 낮아지셨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사람이 필요해서 신문에 모집광고를 내었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서 7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회사에서는 시험을 쳐서 그 가운데 적당한 사람들을 뽑기로 했습니다.
시험은 간단했지만 방법이 색달랐습니다. 지원자들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한 사람씩만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시험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사방 벽에 큰 거울이 하나씩 걸려있었습니다. 지원자들은 그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울 위에 쓰여 있는 질문에 맞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질문지에 적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거울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거울에 비친 이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두 번째 거울에는 “이 사람은 여하에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세 번째 거울에는 “이 사람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마지막 네 번째 거울에는 “만일 당신이라면 이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시험의 전부였습니다.
시험을 다 치르고서 시험장 밖으로 빠져 나오는 사람마다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서 수군거렸습니다. “참, 싱거운 시험도 다 있네. 사람을 뽑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쳐서 실력으로 뽑아야지. 어린 아이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러면서도 그들은 저마다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드디어 합격자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70명 가운데 단 한 사람만 합격하고, 나머지 69명은 모두 떨어졌습니다. 합격한 사람은 네 가지 질문에 모두 솔직하게 ‘아니오’라고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 회사는 자기의 실력을 뽐내면서 큰소리치는 사람을 원치 않았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원했습니다. 자기의 부족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뽑는 과정도 이러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는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 과정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고린도전서 1:26절에서 밝히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좋아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시기 위함’입니다. 즉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하지만, 비워진 사람들은 자랑할 것이 없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육신적인 모든 것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비워지지 않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러한 육신적인 자랑거리들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고난과 역경, 어렵고 눈물나는 길들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욥기 23:10절에서 고통과 환난 속에서 부르짖는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8:10절에서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시며 육신의 자랑거리들을 비우게 하십니까? 그것은 인간 스스로는 육신의 것들을 비워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연단하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낮아져야 합니다.
본문 43-44절을 봅시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사람이 자랑거리가 없어지고 나면 낮아집니다. 그렇다면 낮아짐이란 어떤 것입니까?
1) 낮아진다는 것은 겸손한 삶입니다.
성경에서 겸손이라는 단어에는 위대한 약속들이 들어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품 중의 하나이며, 겸손에 있어서 탁월한 모범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서 주님은“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당신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겸손에 대한 대표적인 약속을 보면 잠언 15:33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하시며 22:4절에서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빌립보서 2:3절을 봅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한 삶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높이는 삶입니다. 자기 PR시대라는 지금 세상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인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약속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겸손한 삶을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2) 낮아진다는 것은 봉사와 섬김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는 사역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곧 교육과 전도와 봉사와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삶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당신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섬김과 봉사의 삶은 신앙이 생활 속에서 맺히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착한 일’에 대하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8절에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시며, 고린도후서 9:8절에서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서울에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있습니다. 학교의 건학이념을 ‘만유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받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인 사랑 정신을 가르치고, 배우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다.’라고 정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학교입니다. 현재 정신학원의 교훈은 ‘굳건한 믿음’, ‘고결한 인격’, ‘희생적 봉사’ 이 세 가지입니다. 이 학교에는 노래 선교단이 있는데 매년 방학이 되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오래 전 인솔자와 함께 중창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고등학교. 교회. 대학들을 순방하며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단원은 모두 15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차를 타야 할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차 있는 데로 뛰어가 서로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날 동행했던 장로님 한 분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인솔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학생들은 차를 탈 때마다 앞을 다투어 뛰어갑니까.” 인솔자는 “자동차의 좌석이 열두 좌석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세 명은 차 바닥에 엎드려야 하는데 서로 먼저 타서 엎드리기 위해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궁금해진 장로님이 직접 차 있는 데로 가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뛰어간 두 여학생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날 그 장로님은 정신여고의 중창단을 위하여 15인승 봉고차를 선물로 사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으며, 그 날을 준비하는 대강절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을 기다리는 가장 삶의 자세는 ‘비우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으뜸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대에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는’ 것뿐입니다. 또 다시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주님처럼 비우고 낮아지는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이루어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