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에 쏙드는 예배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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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11-20 11:41
*** 하나님의 마음에 쏙드는 예배 / 시 50:7-15
** 들어가는 말
시편 50:7-15, “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교도적인 신실한 신앙을 가진 한 농부가 친분이 있는 어떤 지성적인 현대인의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식사를 초대한 사람은 ‘자신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초대받은 농부는 항상 하던 습관처럼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지성인이 농담 섞인 말투로 “그것은 18세기 인간들의 낡은 유물이니까 내어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할 수 없이 혼자 기도를 한 다음에 “우리 집에도 당신 같은 식구가 하나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지성인은 “그것 참 다행한 일이군요. 내 동료가 있어서 기쁩니다. 누군가요? 대학에 다니는 자제분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아니오, 우리 집 돼지 놈들이지요.”라며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돼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혹시 감사의 조건들을 하나씩 헤아리고 따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하셨는데 많은 성도들은 감사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 속에는 ‘사람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명이 모두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탄식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속담까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성실하고 유능한 변호사인 ‘사무엘 라이프워츠’라는 분은 자신의 일을 돌아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사형구형을 받은 죄수를 변호하는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서 78명이 사형언도를 면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78명 가운데 자신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성탄절 시즌이 되면 크리스마스카드가 그토록 많이 들어오는데, 이 변호사 덕분에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 보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일년 365일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삶이기에 마땅히 감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날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높이며 기뻐하며 감사로 영광 돌리는 날입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며, 적은 것이지만 예물을 정성껏 준비해서 드리는 것은 ‘표현되는 감사가 진실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죄로 인하여 죽은 나를 살려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당면한 생활환경을 생각하면서 그저 일년에 한 번 치르는 행사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본문말씀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예배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감사의 예배’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물이나 감사의 예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베푸신 분에게 당연히 나타내야 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자세도 역시 감사를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4:6-7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감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나타내야 하는 실천적인 신앙의 덕목입니다.
본 시편의 저자인 ‘아삽’은 다윗 왕 때에 성가대를 이끌던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예배를 갈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배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된 증거가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이 본문 7절-15절의 말씀입니다. 아삽이 이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예배의 조건은 실천적인 감사’라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7절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예물이 필요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처럼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13절을 봅시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십니다. 즉 성도들의 마음과 생활은 세상적이면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물과 예배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음에 쏙 들어 하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본문 1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이 말씀은 모든 예배의 기초가 ‘감사’임을 가르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물이 아무리 많고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해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무엇이 부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호세아 6: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예배나 예물이 전혀 필요 없다.’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오히려 이 말씀은 예배하는 것이나 예물을 드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왜 이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요즈음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나 어떤 축하할 일이 있는 날에 ‘축하 이벤트’를 해주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꽃다발이나 선물을 배달하면서 축하 행사를 함께 해주는 그런 일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어느 귀한 분의 생일에 정성껏 선물을 준비하고 축하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정작 받아야 할 분이 없이 빈 집에서 그 일을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썰렁하고 무의미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정성껏 준비한 예물과 예배가 받으시는 하나님이 없이 허공에 대고 하는 일이 된다면 정말 허무한 것이 되겠지요. 반면에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면 최상의 예물과 예배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도록 할 수 있습니까?
1)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예물을 바치며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본문 8-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하여 성도들에게 예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예물뿐만 아니라 진정한 헌신으로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예물을 가장 귀한 것으로 평가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12:44절입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드린 아름다운 꽃과 소산물들과 헌금들은 여러분의 헌신된 마음과 함께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예물로 받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18절에서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빌립보교회가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하여 드린 물질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헌신을 담은 예배와 예물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함께 나누는 삶입니다.
신명기 16:13-17절을 봅시다. “13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이 말씀에서 절기를 지키는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14절에서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과 성직자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성도들이 드린 예물의 쓰임새는 첫째 하나님께 향기롭게 바치는 제물로, 다음으로는 성직자들의 응식으로, 그리고 예배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사는 약한 사람들이 즐거움을 나누는 음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기를 지키는 자세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서원을 갚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을 실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든지, 감사하다’는 표현은 진정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은 없습니까?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잊어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23:21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약속을 지켜야 하나님께도 우리에게 하신 이 약속의 말씀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오늘에 와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배의 형식과 절기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며, 예배나 절기를 지키는 의미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세대에 너무나 형식적으로 변해버린 절기의 의미들을 이제는 말씀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풍성하게 회복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느 성직자의 기도문에는 “오! 주님이시여, 모든 은혜를 내게 풍성히 주셨으니 이제 한 가지 더 주셔서 감격의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1863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4일간을 공휴일로 제정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미국국민들은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이 어려운 가운데서 쟁취한 감사의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잘 전하여 결코 포기함이 없어야 한다.”
성도여러분, 이제는 우리 대복교회를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염치 있는 교회로 세워갑시다.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매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실천적인 감사로 드리는 예배의 삶이 되게 합시다. 이러한 삶에 대하여 15절에서 환난 날의 기도에 응답을 보장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진정한 감사의 삶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삶에서 이루어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시편 50:7-15, “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교도적인 신실한 신앙을 가진 한 농부가 친분이 있는 어떤 지성적인 현대인의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식사를 초대한 사람은 ‘자신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초대받은 농부는 항상 하던 습관처럼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지성인이 농담 섞인 말투로 “그것은 18세기 인간들의 낡은 유물이니까 내어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할 수 없이 혼자 기도를 한 다음에 “우리 집에도 당신 같은 식구가 하나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지성인은 “그것 참 다행한 일이군요. 내 동료가 있어서 기쁩니다. 누군가요? 대학에 다니는 자제분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아니오, 우리 집 돼지 놈들이지요.”라며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돼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혹시 감사의 조건들을 하나씩 헤아리고 따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하셨는데 많은 성도들은 감사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 속에는 ‘사람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명이 모두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탄식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속담까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성실하고 유능한 변호사인 ‘사무엘 라이프워츠’라는 분은 자신의 일을 돌아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사형구형을 받은 죄수를 변호하는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서 78명이 사형언도를 면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78명 가운데 자신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성탄절 시즌이 되면 크리스마스카드가 그토록 많이 들어오는데, 이 변호사 덕분에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 보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일년 365일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삶이기에 마땅히 감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날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높이며 기뻐하며 감사로 영광 돌리는 날입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며, 적은 것이지만 예물을 정성껏 준비해서 드리는 것은 ‘표현되는 감사가 진실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죄로 인하여 죽은 나를 살려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당면한 생활환경을 생각하면서 그저 일년에 한 번 치르는 행사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본문말씀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예배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감사의 예배’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물이나 감사의 예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베푸신 분에게 당연히 나타내야 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자세도 역시 감사를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4:6-7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감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나타내야 하는 실천적인 신앙의 덕목입니다.
본 시편의 저자인 ‘아삽’은 다윗 왕 때에 성가대를 이끌던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예배를 갈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배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된 증거가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이 본문 7절-15절의 말씀입니다. 아삽이 이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예배의 조건은 실천적인 감사’라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7절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예물이 필요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처럼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13절을 봅시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십니다. 즉 성도들의 마음과 생활은 세상적이면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물과 예배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음에 쏙 들어 하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본문 1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이 말씀은 모든 예배의 기초가 ‘감사’임을 가르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물이 아무리 많고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해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무엇이 부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호세아 6: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예배나 예물이 전혀 필요 없다.’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오히려 이 말씀은 예배하는 것이나 예물을 드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왜 이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요즈음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나 어떤 축하할 일이 있는 날에 ‘축하 이벤트’를 해주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꽃다발이나 선물을 배달하면서 축하 행사를 함께 해주는 그런 일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어느 귀한 분의 생일에 정성껏 선물을 준비하고 축하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정작 받아야 할 분이 없이 빈 집에서 그 일을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썰렁하고 무의미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정성껏 준비한 예물과 예배가 받으시는 하나님이 없이 허공에 대고 하는 일이 된다면 정말 허무한 것이 되겠지요. 반면에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면 최상의 예물과 예배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도록 할 수 있습니까?
1)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예물을 바치며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본문 8-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하여 성도들에게 예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예물뿐만 아니라 진정한 헌신으로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예물을 가장 귀한 것으로 평가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12:44절입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드린 아름다운 꽃과 소산물들과 헌금들은 여러분의 헌신된 마음과 함께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예물로 받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18절에서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빌립보교회가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하여 드린 물질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헌신을 담은 예배와 예물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함께 나누는 삶입니다.
신명기 16:13-17절을 봅시다. “13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이 말씀에서 절기를 지키는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14절에서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과 성직자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성도들이 드린 예물의 쓰임새는 첫째 하나님께 향기롭게 바치는 제물로, 다음으로는 성직자들의 응식으로, 그리고 예배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사는 약한 사람들이 즐거움을 나누는 음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기를 지키는 자세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서원을 갚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을 실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든지, 감사하다’는 표현은 진정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은 없습니까?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잊어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23:21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약속을 지켜야 하나님께도 우리에게 하신 이 약속의 말씀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오늘에 와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배의 형식과 절기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며, 예배나 절기를 지키는 의미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세대에 너무나 형식적으로 변해버린 절기의 의미들을 이제는 말씀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풍성하게 회복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느 성직자의 기도문에는 “오! 주님이시여, 모든 은혜를 내게 풍성히 주셨으니 이제 한 가지 더 주셔서 감격의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1863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4일간을 공휴일로 제정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미국국민들은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이 어려운 가운데서 쟁취한 감사의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잘 전하여 결코 포기함이 없어야 한다.”
성도여러분, 이제는 우리 대복교회를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염치 있는 교회로 세워갑시다.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매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실천적인 감사로 드리는 예배의 삶이 되게 합시다. 이러한 삶에 대하여 15절에서 환난 날의 기도에 응답을 보장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진정한 감사의 삶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삶에서 이루어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