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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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11-06 22:05
***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 계 22:10-15
** 들어가는 말
요한계시록 22:10-15,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보상’ 혹은 ‘상급’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저는 이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상이나 상급은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한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보상이나 상급을 말하는 것보다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삶과 행동을 하면 당연히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면 상급이 있다는 것은 신앙의 활력을 주는 것이므로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1:6절을 통하여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보상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보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궁전이 있었습니다. 그 궁전에 들어가려면 열쇠로 문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궁전 문의 열쇠는 선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한 소녀가 그 궁전에 들어가고 싶어 매일 몸단장을 하고 궁전으로 갔지만 궁전의 열쇠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소녀의 열성에 감동한 궁전의 문지기가 소녀에게 “남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에게 열쇠가 주어진단다.”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소녀는 그날 늙은 거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래도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낙심이 되어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 낑낑대는 강아지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만치 산 쪽에 강아지가 덫에 걸려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녀는 강아지가 불쌍해서 안간힘을 다해서 덫을 벌리고 강아지를 풀어주었습니다. 소녀의 손은 덫을 벌리느라 상처가 나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 때 궁전의 문지기가 나타나더니 소녀에게 열쇠를 주었습니다. 소녀가 놀라며 “저는 열쇠를 얻기 위해 강아지를 구해준 것이 아닌데요.”라고 하자, 문지기는 “자신이 지금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남을 돕는 사람에게 열쇠가 주어진단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갓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보상은 분명히 약속되어 있는 것이지만 보상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보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보상을 이 있는 행위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에 활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성도가 하는 일에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본문12, 14절을 봅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보상과 함께 계시록의 일곱 가지 복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 복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고 따르도록 하는 가장 큰 활력소가 이 소망입니다. 이 보상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한 세상에서의 불이익이나 눈물과 아픔을 동반하는 섬김과 봉사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묵묵한 섬김과 때로는 오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고 성실하게 사는 삶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20절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5:10절에서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즉 성도가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판단이 따르며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각 사람이 일한 대로 갚으시는” 보상이 따라옵니다.
이 말씀처럼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보상의 기준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요한복음 5:29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요령껏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든,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몸을 아낌없이 헌신하는 생활이든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역대하 14-16장에는 남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는 자신의 나라에서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행하게 하는 등 ‘신앙의 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비록 왕이었지만 백성들이 오랫동안 행하여 오던 우상숭배와 생활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전쟁까지 겹쳐지면서 개혁을 계속해야 하는지 마음이 많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오뎃’을 통하여 아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역대하 15:7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즉 아사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잘 하고 있다.’고 응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상을 생각할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즉 선을 행하거나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하나님께 하듯 성실하고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생각한다면 설령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런 보상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게 되면 실망하고 그 일을 계속하지 않게 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쉬운 일만 찾아서 요령껏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3:10-1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도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자신이 지은 집에 따라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하십니다. 쉽게 지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보상을 판결하는 불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최선을 다한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을 만나면 더욱 빛이 나게 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행한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대접한 냉수 한 잔까지 말입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2. 보상이 약속된 행위가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봅시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행위는 뚜렷하게 구별이 됩니다.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사람은 불의의 강도가 계속 높아질 것이며,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더욱 의를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하는 자나 의를 행하는 자나 모두 심판 때까지 그대로 두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25절 이하의 말씀에서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이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30절입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추수 때가 가까워지면 알곡과 가라지는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묘하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나, 요령껏 신앙생활 하는 것을 지혜롭게 여깁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잘못을 행할 때마다 징계가 주어진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 8:11절에서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당장에는 시행되지는 않지만 우리가 어느 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세상에서 내가 행한 일이 부메랑처럼 보상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보상을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상이 약속된 행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님께 하듯 신실하게 행하는 모든 일입니다.
이는 교회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게으른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들의 일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절입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라고 하며 이들에게 권면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고 하십니다. 적어도 보상을 기대한다면 자신의 일만 겨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님께 하듯 열심을 품고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16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한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최귀동이라는 걸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구걸한 것으로 18명의 다른 걸인들을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얻어먹을 힘이 있으면 얻어먹을 수 없는 사람을 돕는다.”라는 것인데, 그의 인생 목표는 많은 사람을 크게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어느 선교회 사무실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몸이 약간 불구인 듯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교회 직원은 무슨 도움을 구하러왔거나 물건을 팔러온 사람인 줄 알고 그저 상례적인 인사로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분은 ‘선교헌금을 하러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보다 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며 거친 손으로 돈을 내 밀었습니다. 그 돈은 허름한 1,000원짜리 지폐 100장을 묶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름도. 주소도 밝히기를 원치 않았고 차 한 잔의 대접도 사양하고는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복음송 중에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구요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요한 자도 없어요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상을 받지 못할 만큼 작은 일’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이라도 당연히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님께 하듯 한 모든 행위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 ”(마 25:34-46)라는 둘 중의 한 가지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시며 또한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행위를 규정하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행위는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성실하고 진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각 자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하여 사용해야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하며 골로새서 3:23-24절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악한 사람에게는 악한 대로,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선한 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일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을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억울함과 고통과 슬픔을 참으며 끝까지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세 가지 질문을 받을 것이다.”고 하면서 “네게 준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 네게 준 돈을 어떻게 썼느냐? 그리고 네게 준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느냐?” 라고 이 세 가지를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남들 앞에 내놓기도 부끄러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작게 여기지 않으시며 비웃지 않으십니다. 작은 것이라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따라서 주님께 하듯 성실하고 진실하게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을 이행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을 이루어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계시록 22:10-15,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보상’ 혹은 ‘상급’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저는 이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상이나 상급은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한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보상이나 상급을 말하는 것보다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삶과 행동을 하면 당연히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면 상급이 있다는 것은 신앙의 활력을 주는 것이므로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1:6절을 통하여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보상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보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궁전이 있었습니다. 그 궁전에 들어가려면 열쇠로 문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궁전 문의 열쇠는 선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한 소녀가 그 궁전에 들어가고 싶어 매일 몸단장을 하고 궁전으로 갔지만 궁전의 열쇠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소녀의 열성에 감동한 궁전의 문지기가 소녀에게 “남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에게 열쇠가 주어진단다.”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소녀는 그날 늙은 거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래도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낙심이 되어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 낑낑대는 강아지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만치 산 쪽에 강아지가 덫에 걸려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녀는 강아지가 불쌍해서 안간힘을 다해서 덫을 벌리고 강아지를 풀어주었습니다. 소녀의 손은 덫을 벌리느라 상처가 나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 때 궁전의 문지기가 나타나더니 소녀에게 열쇠를 주었습니다. 소녀가 놀라며 “저는 열쇠를 얻기 위해 강아지를 구해준 것이 아닌데요.”라고 하자, 문지기는 “자신이 지금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남을 돕는 사람에게 열쇠가 주어진단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갓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보상은 분명히 약속되어 있는 것이지만 보상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보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보상을 이 있는 행위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에 활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성도가 하는 일에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본문12, 14절을 봅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보상과 함께 계시록의 일곱 가지 복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 복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고 따르도록 하는 가장 큰 활력소가 이 소망입니다. 이 보상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한 세상에서의 불이익이나 눈물과 아픔을 동반하는 섬김과 봉사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묵묵한 섬김과 때로는 오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고 성실하게 사는 삶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20절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5:10절에서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즉 성도가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판단이 따르며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각 사람이 일한 대로 갚으시는” 보상이 따라옵니다.
이 말씀처럼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보상의 기준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요한복음 5:29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요령껏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든,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몸을 아낌없이 헌신하는 생활이든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역대하 14-16장에는 남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는 자신의 나라에서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행하게 하는 등 ‘신앙의 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비록 왕이었지만 백성들이 오랫동안 행하여 오던 우상숭배와 생활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전쟁까지 겹쳐지면서 개혁을 계속해야 하는지 마음이 많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오뎃’을 통하여 아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역대하 15:7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즉 아사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잘 하고 있다.’고 응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상을 생각할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즉 선을 행하거나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하나님께 하듯 성실하고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생각한다면 설령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런 보상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게 되면 실망하고 그 일을 계속하지 않게 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쉬운 일만 찾아서 요령껏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3:10-1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도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자신이 지은 집에 따라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하십니다. 쉽게 지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보상을 판결하는 불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최선을 다한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을 만나면 더욱 빛이 나게 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행한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대접한 냉수 한 잔까지 말입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2. 보상이 약속된 행위가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봅시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행위는 뚜렷하게 구별이 됩니다.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사람은 불의의 강도가 계속 높아질 것이며,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더욱 의를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하는 자나 의를 행하는 자나 모두 심판 때까지 그대로 두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25절 이하의 말씀에서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이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30절입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추수 때가 가까워지면 알곡과 가라지는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묘하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나, 요령껏 신앙생활 하는 것을 지혜롭게 여깁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잘못을 행할 때마다 징계가 주어진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 8:11절에서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당장에는 시행되지는 않지만 우리가 어느 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세상에서 내가 행한 일이 부메랑처럼 보상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보상을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상이 약속된 행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님께 하듯 신실하게 행하는 모든 일입니다.
이는 교회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게으른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들의 일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절입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라고 하며 이들에게 권면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고 하십니다. 적어도 보상을 기대한다면 자신의 일만 겨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님께 하듯 열심을 품고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16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한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최귀동이라는 걸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구걸한 것으로 18명의 다른 걸인들을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얻어먹을 힘이 있으면 얻어먹을 수 없는 사람을 돕는다.”라는 것인데, 그의 인생 목표는 많은 사람을 크게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어느 선교회 사무실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몸이 약간 불구인 듯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교회 직원은 무슨 도움을 구하러왔거나 물건을 팔러온 사람인 줄 알고 그저 상례적인 인사로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분은 ‘선교헌금을 하러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보다 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며 거친 손으로 돈을 내 밀었습니다. 그 돈은 허름한 1,000원짜리 지폐 100장을 묶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름도. 주소도 밝히기를 원치 않았고 차 한 잔의 대접도 사양하고는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복음송 중에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구요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요한 자도 없어요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상을 받지 못할 만큼 작은 일’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이라도 당연히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님께 하듯 한 모든 행위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 ”(마 25:34-46)라는 둘 중의 한 가지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시며 또한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행위를 규정하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행위는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성실하고 진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각 자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하여 사용해야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하며 골로새서 3:23-24절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악한 사람에게는 악한 대로,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선한 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일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을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억울함과 고통과 슬픔을 참으며 끝까지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세 가지 질문을 받을 것이다.”고 하면서 “네게 준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 네게 준 돈을 어떻게 썼느냐? 그리고 네게 준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느냐?” 라고 이 세 가지를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남들 앞에 내놓기도 부끄러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작게 여기지 않으시며 비웃지 않으십니다. 작은 것이라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따라서 주님께 하듯 성실하고 진실하게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을 이행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을 이루어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