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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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10-15 21:58
*** 완전한 생명의로의 연합 / 롬 6:1-11
** 들어가는 말
로마서 6: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중세시대의 교회와 신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거스틴보다는 기도의 사람인 그 어머니 ‘모니카’를 더 잘 알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청년시절까지 무척 방탕했으며, 이단과 철학에 빠져 허송세월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온 삶을 바쳐서 방탕한 아들이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머니의 오랜 기도로 어거스틴은 30세에 방탕의 길에서 돌아서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가 신앙으로 돌아서려고 발버둥칠 때에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때 읽은 성경이 로마서 13:11-14절의 말씀입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30세에 회심하여 75세까지 살면서 232권의 책으로 구성된 92개의 단행본 외에도 교리문제와 여러 가지 쟁점 등에 관하여 그리스도교 변호의 내용이 담긴 220개의 서신을 포함한 방대한 저작을 남겼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우연히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함께 놀던 아가씨들이 따라 나오며 반색을 합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왜 안 보였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어거스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가며 중얼거렸습니다. “너희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 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옛날의 어거스틴이 아니야.”
지금 우리는 어거스틴이 읽었던 로마서 13:11-14절 말씀이나, 엡 4:22, 24절의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구원을 완성하실 주님의 재림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꾸만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하려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깊은 잠에 빠지려는 영을 깨워야 할 때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지금 행하려는 세례와 성찬은 바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개신교회에서는 성례전으로 두 가지를 인정하는데, 그것이 세례와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처음 행하셨습니다. 성찬은 ‘인류의 죄악을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실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예식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주님의 명을 따라 성찬을 행하며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찢기시고 흘리신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할 것입니다. 이는 나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지위를 얻게 하시려고 거룩하게 하시는 증거입니다.
세례는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나 또한 죄에 대하여, 세상에 얽매여 살던 옛 사람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주님과 연합되어 나 또한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되는 표시입니다. 신학자인 ‘랄프 윈트’는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세례를 줄 때에 물로 하는 것보다 관을 갖다 놓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은 조금 찍어 바르니까 죽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사람을 관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고하면 더욱 실감이 날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믿는 부모가 어린아이의 신앙고백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즉 아이가 자신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믿음 안에서 양육하겠다는 서약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가 자라서 자신이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 ‘입교식’을 행하게 됩니다. 입교식은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의 신앙을 확인하고 합당하다고 판단되었을 때에 입교서약을 함으로써 세례교인으로서의 권리를 행하게 됩니다. 통상적으로 학습이나 세례, 입교는 만 14세 이상이 되었을 때에 행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는 입교인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입교서약을 할 사람도 있고, 유아세례를 받을 아이도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세례를 받아서 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겠다.’는 약속이며,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21절을 봅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미 세례를 받아서 입교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나 이제 입교서약을 할 사람이나 모두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하게 연합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본문에는 ‘연합’을 의미하는 단어인 “연합”, “합하여”, “함께”라는 단어가 아홉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연합은 본문에서 강조하는 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연합”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Ἐν Χριστω)”라는 말입니다. 우리교회 주보 앞머리에 들어있는 글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다면 결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을 봅시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죽는 것이 먼저입니다. 세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자만이 성찬에 참예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는 ‘나도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세상 사람인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적절하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떤 그리스도인인 중년 남자가 한적한 해변 길을 혼자 거닐고 있었습니다. 저만큼 앞에서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에 뭔가 삐쭉이 솟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모래를 파고 꺼내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주전자였습니다.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뚜껑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모양의 종이 나타났습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소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제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한 가지밖에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셔서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던 사나이는 “지금부터 꼭 1년 후의 석간신문을 나에게 갖다 주게.”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이 사나이는 1년 뒤의 주식시세를 미리 알아서 그곳에 몽땅 투자를 하여 큰 갑부가 되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한참 기분 좋게 신문을 보고 있던 그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것은 주식의 시세를 알리는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것이 꿈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세상일에만 집착하여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몰려왔습니다. 그 꿈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저도 며칠 전에 아는 사람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수억 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허황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의 욕망을 추구하던 옛 관심의 죽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완전한 생명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돈 버는 일, 쾌락, 안락한 삶, 명예를 얻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아직 옛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내 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나고 새 부대가 되었다면, 새사람의 관심으로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속사람으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원한다면 옛사람의 성품과 관심을 비워내야 합니다.
옛사람의 성품과 관심을 비워내는 길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아무리 육신의 욕망들을 내어버리려 해도 결코 그렇게 할 수없습니다. 내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순간부터 옛사람은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내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으므로 우리는 이미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에 관심을 두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영역을 확장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이 죽으면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본문 5-6절을 봅시다.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의 옛사람이 죽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의 성품과 행실을 비워내기만 하면 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 영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일에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이것을 두고 ‘사족(蛇足)’이라 할만합니다. ‘아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을 두고 사족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풍성함에 대하여 주님께서 분명하게 약속하시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또한 빌립보서 4:6절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일어나며, 하나님의 의가 이루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아 입교인이 된 성도들과 오늘 입교서약을 하는 성도들 모두는 하나님께 소속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새사람으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직장에서의 일이나 사업장에서의 일이나 공부하는 일이나 가정의 일이나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한 옛사람의 죽음이며 동시에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찬에 참예하시는 여러분, 이 거룩한 예식을 통하여 주님과의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이 이루어지며, 주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로마서 6: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중세시대의 교회와 신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거스틴보다는 기도의 사람인 그 어머니 ‘모니카’를 더 잘 알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청년시절까지 무척 방탕했으며, 이단과 철학에 빠져 허송세월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온 삶을 바쳐서 방탕한 아들이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머니의 오랜 기도로 어거스틴은 30세에 방탕의 길에서 돌아서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가 신앙으로 돌아서려고 발버둥칠 때에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때 읽은 성경이 로마서 13:11-14절의 말씀입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30세에 회심하여 75세까지 살면서 232권의 책으로 구성된 92개의 단행본 외에도 교리문제와 여러 가지 쟁점 등에 관하여 그리스도교 변호의 내용이 담긴 220개의 서신을 포함한 방대한 저작을 남겼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우연히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함께 놀던 아가씨들이 따라 나오며 반색을 합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왜 안 보였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어거스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가며 중얼거렸습니다. “너희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 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옛날의 어거스틴이 아니야.”
지금 우리는 어거스틴이 읽었던 로마서 13:11-14절 말씀이나, 엡 4:22, 24절의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구원을 완성하실 주님의 재림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꾸만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하려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깊은 잠에 빠지려는 영을 깨워야 할 때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지금 행하려는 세례와 성찬은 바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개신교회에서는 성례전으로 두 가지를 인정하는데, 그것이 세례와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처음 행하셨습니다. 성찬은 ‘인류의 죄악을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실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예식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주님의 명을 따라 성찬을 행하며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찢기시고 흘리신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할 것입니다. 이는 나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지위를 얻게 하시려고 거룩하게 하시는 증거입니다.
세례는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나 또한 죄에 대하여, 세상에 얽매여 살던 옛 사람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주님과 연합되어 나 또한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되는 표시입니다. 신학자인 ‘랄프 윈트’는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세례를 줄 때에 물로 하는 것보다 관을 갖다 놓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은 조금 찍어 바르니까 죽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사람을 관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고하면 더욱 실감이 날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믿는 부모가 어린아이의 신앙고백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즉 아이가 자신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믿음 안에서 양육하겠다는 서약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가 자라서 자신이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 ‘입교식’을 행하게 됩니다. 입교식은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의 신앙을 확인하고 합당하다고 판단되었을 때에 입교서약을 함으로써 세례교인으로서의 권리를 행하게 됩니다. 통상적으로 학습이나 세례, 입교는 만 14세 이상이 되었을 때에 행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는 입교인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입교서약을 할 사람도 있고, 유아세례를 받을 아이도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세례를 받아서 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겠다.’는 약속이며,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21절을 봅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미 세례를 받아서 입교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나 이제 입교서약을 할 사람이나 모두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하게 연합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본문에는 ‘연합’을 의미하는 단어인 “연합”, “합하여”, “함께”라는 단어가 아홉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연합은 본문에서 강조하는 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연합”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Ἐν Χριστω)”라는 말입니다. 우리교회 주보 앞머리에 들어있는 글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다면 결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을 봅시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죽는 것이 먼저입니다. 세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자만이 성찬에 참예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는 ‘나도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세상 사람인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적절하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떤 그리스도인인 중년 남자가 한적한 해변 길을 혼자 거닐고 있었습니다. 저만큼 앞에서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에 뭔가 삐쭉이 솟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모래를 파고 꺼내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주전자였습니다.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뚜껑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모양의 종이 나타났습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소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제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한 가지밖에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셔서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던 사나이는 “지금부터 꼭 1년 후의 석간신문을 나에게 갖다 주게.”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이 사나이는 1년 뒤의 주식시세를 미리 알아서 그곳에 몽땅 투자를 하여 큰 갑부가 되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한참 기분 좋게 신문을 보고 있던 그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것은 주식의 시세를 알리는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것이 꿈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세상일에만 집착하여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몰려왔습니다. 그 꿈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저도 며칠 전에 아는 사람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수억 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허황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의 욕망을 추구하던 옛 관심의 죽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완전한 생명을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돈 버는 일, 쾌락, 안락한 삶, 명예를 얻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아직 옛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내 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나고 새 부대가 되었다면, 새사람의 관심으로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속사람으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원한다면 옛사람의 성품과 관심을 비워내야 합니다.
옛사람의 성품과 관심을 비워내는 길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아무리 육신의 욕망들을 내어버리려 해도 결코 그렇게 할 수없습니다. 내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순간부터 옛사람은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내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으므로 우리는 이미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에 관심을 두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영역을 확장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이 죽으면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본문 5-6절을 봅시다.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의 옛사람이 죽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의 성품과 행실을 비워내기만 하면 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 영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일에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이것을 두고 ‘사족(蛇足)’이라 할만합니다. ‘아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을 두고 사족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풍성함에 대하여 주님께서 분명하게 약속하시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또한 빌립보서 4:6절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일어나며, 하나님의 의가 이루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아 입교인이 된 성도들과 오늘 입교서약을 하는 성도들 모두는 하나님께 소속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새사람으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직장에서의 일이나 사업장에서의 일이나 공부하는 일이나 가정의 일이나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한 옛사람의 죽음이며 동시에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찬에 참예하시는 여러분, 이 거룩한 예식을 통하여 주님과의 완전한 생명으로의 연합이 이루어지며, 주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