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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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10-01 22:51
*** 삶의 문 / 요한복음 10:7-15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0:7-15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던 유명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부와 명예와 지식으로 사회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점점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중년의 나이에 폐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폐병은 점점 심해져 결국 요양소로 격리되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요양소에서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여러 번 자살충동을 느꼈습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그가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나비 한 마리가 창문 틈새로 병실에 들어왔습니다. 그 나비는 이리저리 날다가 밖으로 나가려는 듯 창문에 부딪히면서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그는 나비를 잡아 밖으로 보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비는 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저 나비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평안과 안식의 장소로 인도하시기 위해 선한 손길을 펴시는데 난 얼마나 그 손길을 피해 다녔던가요?”
이 교수는 화려했던 인생의 뒤안길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나약해져서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육신의 눈이 보는 것과 육신의 삶에 매어있는 인간의 이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육신의 욕망이 강한 사람은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내면의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물을 구별하는 육신의 눈이며, 다른 하나는 육신의 눈이 볼 수 없는 사물의 의미를 보는 마음의 눈입니다. 이러한 눈은 종교적인 면에도 적용이 됩니다. 사람이 어떤 종교를 따르든지 각자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신앙의 시각이 있습니다. 이 신앙의 시각이 사람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내면의 빛(inner light)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들은 내면의 빛을 따라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1: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십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본문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라고 표현하신 것은 ‘인생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종교가 인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죄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무엇이라 하던고! 삼강오륜도 몰랐었느냐?” 라고 나무랐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죄인을 대하기를, “인생은 그런 거야. 생로병사, 고해인간, 무상한 것이야. 네 운명이니 어찌하겠나. 전생의 인과로 인한 것이니 다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눈이나 감고 자신을 더 깊이 생각해 보게나”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위대한 영웅도 인생이 가야할 삶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을 위하여 생명을 지불하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나는 양의 문이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신적인 선언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삶의 문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어떤 ‘삶의 문’이 되십니까?
1. 예수님은 인생의 출입을 주관하시는 삶의 문이십니다.
본문의 앞에는 ‘선한 목자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예수님은 양을 인도하는 두 종류의 목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양의 우리가 있고 그 안에 양들이 있는데, 정문으로 들어가는 선한 목자와 담을 넘어 다니는 거짓 목자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본문에서도 역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생의 삶을 의미 있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진정한 인도자와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삯꾼 목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1958년에 노벨 문학상을 탄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닥터 지바고’를 아시지요? 그 내용 중에서 무척 인상 깊게 남겨진 장면이 있는데 마지막 부분의 ‘장군과 타냐의 대화 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라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그 말을 받아 장군은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라고 합니다.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자식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신(神)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富)할 때나 인생의 좋은 시절에는 친구도 많고 가까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할 때나 인생의 고난이 겹칠 때에는 곁에 머물려고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부부나 가족조차도 떠나갑니다. 욥의 경우를 잘 알지 않습니까?
노회의 동역자 중에 교도소 사역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저께 회의를 마치고 대화 중에 갑자기 “교회에 비누나 수건 같은 것 남는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했더니 “이번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나누는 행사를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감자 중의 80%가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면회를 오는 사람이 없는 수감자들에게 비누와 칫솔, 수건 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의 한 단면이기도 하며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부귀영화나 명예도 권력도 세상 친구도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다 떠나갈 것입니다. 마치 가짜 아버지였던 ‘코마로프’가 불붙는 전쟁터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고 도망쳤듯이 내가 우상처럼 추구하던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배반하고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12-13절에서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고 하십니다.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을 위하여 생명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내놓으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삶의 모든 출입을 주관하시는 문이십니다. “문”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보호막이며 안전하게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2. 예수님은 인생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삶의 문이십니다.
선한 목자의 비유를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본문에서 자신이 양의 우리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비유의 방향이 바뀐 것은 유대인들이 앞에서 주신 비유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목자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양들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의 일부만 불러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언약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의 우리에 들어온 목자가 양들 중에서 이름을 불러서 골라내고 있고, 그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양이라고 해서 모두가 양이 아니라, 양 중에서도 골라냄을 받은 어떤 선택된 부류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 설명해 주시고자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시고자 하심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기 때문에 따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선민 유대인이라는 것 자체에 있다고 여겼으며,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단지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 지적하십니다. 어떤 특정한 신분이나 특정한 민족이라는 그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라고, 장로라고, 권사라고, 집사라고, 교회에 다닌다고, 대대로 교인의 가정이라고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이십니다. 구원과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지 않고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모두 구원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문은 그저 통과하는 문이 아닙니다. 그 문을 지남으로써 사형선고 받은 죄인이 무죄 선언을 받게 되는 생명의 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문이다!”라고 선포하시면서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얻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혹시 세상의 것들이 잠깐 동안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즐거움과 평안함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올 때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새벽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아침 해가 돋으면 곧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찬송가 269장 3절 가사에서 “웬 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물건 불 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고 탄식합니다. 마지막에 웃을 수 있도록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내면의 빛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삶의 문이십니다.
본문 9-10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이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만 얻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출입에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9절에서 말씀하시는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꼴을 얻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보호와 양식의 공급’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공급은 일회적이거나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10절에 나오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여러분, 혹시 영이나 육신의 삶에 염려가 있습니까?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며,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도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은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출입과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의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장이십니다. 이 주님이 내 인생의 삶의 문이심을 확신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0:7-15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던 유명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부와 명예와 지식으로 사회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점점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중년의 나이에 폐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폐병은 점점 심해져 결국 요양소로 격리되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요양소에서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여러 번 자살충동을 느꼈습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그가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나비 한 마리가 창문 틈새로 병실에 들어왔습니다. 그 나비는 이리저리 날다가 밖으로 나가려는 듯 창문에 부딪히면서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그는 나비를 잡아 밖으로 보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비는 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저 나비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평안과 안식의 장소로 인도하시기 위해 선한 손길을 펴시는데 난 얼마나 그 손길을 피해 다녔던가요?”
이 교수는 화려했던 인생의 뒤안길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나약해져서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육신의 눈이 보는 것과 육신의 삶에 매어있는 인간의 이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육신의 욕망이 강한 사람은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내면의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물을 구별하는 육신의 눈이며, 다른 하나는 육신의 눈이 볼 수 없는 사물의 의미를 보는 마음의 눈입니다. 이러한 눈은 종교적인 면에도 적용이 됩니다. 사람이 어떤 종교를 따르든지 각자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신앙의 시각이 있습니다. 이 신앙의 시각이 사람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내면의 빛(inner light)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들은 내면의 빛을 따라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1: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십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본문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라고 표현하신 것은 ‘인생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종교가 인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죄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무엇이라 하던고! 삼강오륜도 몰랐었느냐?” 라고 나무랐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죄인을 대하기를, “인생은 그런 거야. 생로병사, 고해인간, 무상한 것이야. 네 운명이니 어찌하겠나. 전생의 인과로 인한 것이니 다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눈이나 감고 자신을 더 깊이 생각해 보게나”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위대한 영웅도 인생이 가야할 삶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을 위하여 생명을 지불하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나는 양의 문이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신적인 선언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삶의 문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어떤 ‘삶의 문’이 되십니까?
1. 예수님은 인생의 출입을 주관하시는 삶의 문이십니다.
본문의 앞에는 ‘선한 목자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예수님은 양을 인도하는 두 종류의 목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양의 우리가 있고 그 안에 양들이 있는데, 정문으로 들어가는 선한 목자와 담을 넘어 다니는 거짓 목자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본문에서도 역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생의 삶을 의미 있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진정한 인도자와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삯꾼 목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1958년에 노벨 문학상을 탄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닥터 지바고’를 아시지요? 그 내용 중에서 무척 인상 깊게 남겨진 장면이 있는데 마지막 부분의 ‘장군과 타냐의 대화 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라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그 말을 받아 장군은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라고 합니다.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자식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신(神)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富)할 때나 인생의 좋은 시절에는 친구도 많고 가까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할 때나 인생의 고난이 겹칠 때에는 곁에 머물려고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부부나 가족조차도 떠나갑니다. 욥의 경우를 잘 알지 않습니까?
노회의 동역자 중에 교도소 사역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저께 회의를 마치고 대화 중에 갑자기 “교회에 비누나 수건 같은 것 남는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했더니 “이번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나누는 행사를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감자 중의 80%가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면회를 오는 사람이 없는 수감자들에게 비누와 칫솔, 수건 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의 한 단면이기도 하며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부귀영화나 명예도 권력도 세상 친구도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다 떠나갈 것입니다. 마치 가짜 아버지였던 ‘코마로프’가 불붙는 전쟁터에서 어린 타냐를 떼어놓고 도망쳤듯이 내가 우상처럼 추구하던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배반하고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12-13절에서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고 하십니다.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을 위하여 생명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내놓으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삶의 모든 출입을 주관하시는 문이십니다. “문”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보호막이며 안전하게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2. 예수님은 인생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삶의 문이십니다.
선한 목자의 비유를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본문에서 자신이 양의 우리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비유의 방향이 바뀐 것은 유대인들이 앞에서 주신 비유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목자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양들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의 일부만 불러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언약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의 우리에 들어온 목자가 양들 중에서 이름을 불러서 골라내고 있고, 그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양이라고 해서 모두가 양이 아니라, 양 중에서도 골라냄을 받은 어떤 선택된 부류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 설명해 주시고자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시고자 하심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기 때문에 따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선민 유대인이라는 것 자체에 있다고 여겼으며,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단지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 지적하십니다. 어떤 특정한 신분이나 특정한 민족이라는 그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라고, 장로라고, 권사라고, 집사라고, 교회에 다닌다고, 대대로 교인의 가정이라고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이십니다. 구원과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지 않고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모두 구원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문은 그저 통과하는 문이 아닙니다. 그 문을 지남으로써 사형선고 받은 죄인이 무죄 선언을 받게 되는 생명의 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문이다!”라고 선포하시면서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얻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혹시 세상의 것들이 잠깐 동안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즐거움과 평안함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올 때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새벽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아침 해가 돋으면 곧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찬송가 269장 3절 가사에서 “웬 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물건 불 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고 탄식합니다. 마지막에 웃을 수 있도록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내면의 빛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삶의 문이십니다.
본문 9-10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이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만 얻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출입에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9절에서 말씀하시는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꼴을 얻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보호와 양식의 공급’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공급은 일회적이거나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10절에 나오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여러분, 혹시 영이나 육신의 삶에 염려가 있습니까?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며,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도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은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출입과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의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장이십니다. 이 주님이 내 인생의 삶의 문이심을 확신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