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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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4-02 13:32
*** 예정된 길 / 누가복음 19:28-40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9:28-40,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비석을 다듬는 석공이 있었습니다. 석공은 땀이 뚝뚝 흐르는 무릎 꿇은 자세로 부지런히 비석을 깎고 다듬었습니다. 비석 다듬기를 마친 석공은 그 비석에 글을 새겼습니다. 그 과정을 한 정치인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작업을 마무리 짓던 석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돌같이 단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당신처럼 유연하게 다듬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소. 그리고 돌에 명문이 새겨지듯 사람들의 마음과 역사에 내 자신이 새겨졌으면 좋겠소.”
그러자 석공이 대답합니다.
“선생님도 저처럼 무릎 꿇고 일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람들은 세상에 무엇인가 자신의 자취를 남겨 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자신의 우수한 유전자를 남기려고 생존경쟁을 합니다.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명문가문, 명문학교, 명문회사, 오랜 역사를 이어온 나라와 민족성, 그 명문의 역사를 증명하려는 문화 유적들 등등.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성을 자랑하며, 그 대를 이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세계의 어느 민족이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백의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우리나라도 명문대열에서 한 몫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 중에 ‘유대민족’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라는 ‘민족정통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이들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라고 환호한 것도 이러한 자부심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군중들의 “호산나”외침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진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의 예화에서처럼 거친 돌이 석공에 의해서 매끈하게 다듬어 지고, 능숙하게 글이 새겨지는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탐을 냈던 정치인과 같습니다. 그 단단한 돌을 깎고 다듬고 글을 새기기까지의 그 고통과 수고의 땀, 무엇보다도 일에 대한 석공의 열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비록 환호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입성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만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친 것과는 딴판이지요.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 혹시 이렇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33년 생애의 가장 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지막 종착지에 들어오시는 날입니다. 이날부터 한 주간을 예루살렘과 근처에 머무시면서 종말을 사는 인생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기십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 다음날부터 부활의 아침까지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을 이룬 일주일입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교훈을 살펴보려합니다.
먼저, 본문의 전체적인 배경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기사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배경들은 조금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서 마지막 통과지인 ‘여리고’에서의 이야기가 앞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리들에게 ‘므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삭개오를 만난 사건이나, ‘므나 비유’의 이야기는 모두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직전에서 삭개오를 만나시고 그 집에서 하루를 머무신 일을 통하여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목적’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19:9-10절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므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시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베다니에 이르셔서 나귀의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 축제기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전국에서 모여온 큰 인파로 거리마다 가득했습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의 순례자들이 거의 25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옛 조상들의 애굽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사람들이 한 번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깔고, 무리들은 길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고, 손에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기하는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군중들의 마음이 온통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에 분노하며 절망합니다. 본문 다음의 47-48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이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온 무리들에게 큰 소동을 불려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보는 시종일관 조용하고 침착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과 군중들과 지도자들의 마음이 다른 것입니까?
1. 예수님의 길은 예정된 길이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하나하나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0절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길은 예정된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를 향하신 구원계획의 길이었습니다. 이 구원계획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 때부터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길을 겸손하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교의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성경을 이루게 하시려고 제자 둘을 보내시면서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스가랴 9:9절을 봅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귀를 가지러 가는 제자들에게 이미 나귀가 예비 되어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심부름만 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자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외치는 것은 ‘메시아에 대한 환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예정된 길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된 구원의 길의 절정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이미 아버지에 의하여 예정된 길이었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인류의 죄의 짐이 너무 추하고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성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이 깨어지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픔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순종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 뜻에 순종’이라는 하나의 목표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흔들림 없이 그 아버지의 예정하신 길에 순종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예정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이 평안의 길입니다.
시편 37:2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잠언 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시며 잠언 19:21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방송인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패기가 넘치는 이 젊은이는 방송활동과 출세에 몰두해 주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습니다. 이 젊은이의 어머니는 오로지 출세를 향하는 아들의 바쁜 일상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세상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름다운 풍경이 인쇄된 예쁜 엽서를 사서 짧은 글을 써 보냈습니다.
“얘야, 너무 빨리 달리지 말아라. 그러면 좋은 풍경을 못 본단다.”
어머니의 엽서를 받은 젊은이는 자신이 ‘너무 빨리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많은 일들을 정리하여 주변의 생의 아름다운 것들을 살폈다고 합니다.
우리네 일상생활은 정말 바쁘고 빠듯하게 살아갑니다. 주변을 돌아볼 정신도 없이 사는 일에 바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기 때문에 온갖 헤쳐가야 할 일들로 머리가 아픕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의 결과까지도 만들어내려고 애쓰니 삶이 고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걸 두고 ‘인생 바벨탑’이라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 후의 세대들이 흩어짐을 면하자고 거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대한 계획이었든지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보셨으며,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 일을 중단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을 내세우고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행할 때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상 15:2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익과 자신들의 계획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라고 외쳤지만, 자신의 계획들이 무산될 때에는 지체 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일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 안에서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생활에서 주님과 교통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모든 일을 주님께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늘 가까이 하며 깨닫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입니다.
다음으로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영을 통하여 또는 양심을 통하여 감동을 주십니다.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은 적극적으로 저지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면 마음이 화인을 맞은 듯 죄에 대하여 감각이 무뎌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벗어나게 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길은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기쁨과 평안을 주시며 끝내 승리를 이루게 하십니다. 잠언 22:4절에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왕의 자리에 앉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버리는 길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겸손한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이 이루도록 하는 것이 주님이 가시는 예정된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야 하는 길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는 예루살렘 입성이 고통과 멸시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된 길에 순종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갑시다.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9:28-40,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비석을 다듬는 석공이 있었습니다. 석공은 땀이 뚝뚝 흐르는 무릎 꿇은 자세로 부지런히 비석을 깎고 다듬었습니다. 비석 다듬기를 마친 석공은 그 비석에 글을 새겼습니다. 그 과정을 한 정치인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작업을 마무리 짓던 석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돌같이 단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당신처럼 유연하게 다듬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소. 그리고 돌에 명문이 새겨지듯 사람들의 마음과 역사에 내 자신이 새겨졌으면 좋겠소.”
그러자 석공이 대답합니다.
“선생님도 저처럼 무릎 꿇고 일한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람들은 세상에 무엇인가 자신의 자취를 남겨 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자신의 우수한 유전자를 남기려고 생존경쟁을 합니다.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명문가문, 명문학교, 명문회사, 오랜 역사를 이어온 나라와 민족성, 그 명문의 역사를 증명하려는 문화 유적들 등등.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성을 자랑하며, 그 대를 이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세계의 어느 민족이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백의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우리나라도 명문대열에서 한 몫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 중에 ‘유대민족’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라는 ‘민족정통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이들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라고 환호한 것도 이러한 자부심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군중들의 “호산나”외침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진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의 예화에서처럼 거친 돌이 석공에 의해서 매끈하게 다듬어 지고, 능숙하게 글이 새겨지는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탐을 냈던 정치인과 같습니다. 그 단단한 돌을 깎고 다듬고 글을 새기기까지의 그 고통과 수고의 땀, 무엇보다도 일에 대한 석공의 열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비록 환호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입성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만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친 것과는 딴판이지요.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 혹시 이렇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33년 생애의 가장 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지막 종착지에 들어오시는 날입니다. 이날부터 한 주간을 예루살렘과 근처에 머무시면서 종말을 사는 인생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기십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 다음날부터 부활의 아침까지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을 이룬 일주일입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교훈을 살펴보려합니다.
먼저, 본문의 전체적인 배경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기사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배경들은 조금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서 마지막 통과지인 ‘여리고’에서의 이야기가 앞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리들에게 ‘므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삭개오를 만난 사건이나, ‘므나 비유’의 이야기는 모두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직전에서 삭개오를 만나시고 그 집에서 하루를 머무신 일을 통하여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목적’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19:9-10절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므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시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베다니에 이르셔서 나귀의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 축제기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전국에서 모여온 큰 인파로 거리마다 가득했습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의 순례자들이 거의 25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옛 조상들의 애굽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사람들이 한 번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깔고, 무리들은 길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고, 손에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기하는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군중들의 마음이 온통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에 분노하며 절망합니다. 본문 다음의 47-48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이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온 무리들에게 큰 소동을 불려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보는 시종일관 조용하고 침착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과 군중들과 지도자들의 마음이 다른 것입니까?
1. 예수님의 길은 예정된 길이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하나하나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0절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길은 예정된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를 향하신 구원계획의 길이었습니다. 이 구원계획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 때부터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길을 겸손하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교의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성경을 이루게 하시려고 제자 둘을 보내시면서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스가랴 9:9절을 봅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귀를 가지러 가는 제자들에게 이미 나귀가 예비 되어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심부름만 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자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외치는 것은 ‘메시아에 대한 환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예정된 길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된 구원의 길의 절정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이미 아버지에 의하여 예정된 길이었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인류의 죄의 짐이 너무 추하고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성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이 깨어지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픔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순종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 뜻에 순종’이라는 하나의 목표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흔들림 없이 그 아버지의 예정하신 길에 순종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예정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이 평안의 길입니다.
시편 37:2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잠언 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시며 잠언 19:21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방송인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패기가 넘치는 이 젊은이는 방송활동과 출세에 몰두해 주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습니다. 이 젊은이의 어머니는 오로지 출세를 향하는 아들의 바쁜 일상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세상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름다운 풍경이 인쇄된 예쁜 엽서를 사서 짧은 글을 써 보냈습니다.
“얘야, 너무 빨리 달리지 말아라. 그러면 좋은 풍경을 못 본단다.”
어머니의 엽서를 받은 젊은이는 자신이 ‘너무 빨리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많은 일들을 정리하여 주변의 생의 아름다운 것들을 살폈다고 합니다.
우리네 일상생활은 정말 바쁘고 빠듯하게 살아갑니다. 주변을 돌아볼 정신도 없이 사는 일에 바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기 때문에 온갖 헤쳐가야 할 일들로 머리가 아픕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의 결과까지도 만들어내려고 애쓰니 삶이 고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걸 두고 ‘인생 바벨탑’이라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 후의 세대들이 흩어짐을 면하자고 거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대한 계획이었든지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보셨으며,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 일을 중단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을 내세우고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행할 때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상 15:2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익과 자신들의 계획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라고 외쳤지만, 자신의 계획들이 무산될 때에는 지체 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일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 안에서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생활에서 주님과 교통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모든 일을 주님께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늘 가까이 하며 깨닫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입니다.
다음으로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영을 통하여 또는 양심을 통하여 감동을 주십니다.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은 적극적으로 저지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면 마음이 화인을 맞은 듯 죄에 대하여 감각이 무뎌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벗어나게 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길은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기쁨과 평안을 주시며 끝내 승리를 이루게 하십니다. 잠언 22:4절에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왕의 자리에 앉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버리는 길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겸손한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이 이루도록 하는 것이 주님이 가시는 예정된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야 하는 길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는 예루살렘 입성이 고통과 멸시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된 길에 순종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