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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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3-26 23:30
***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 막 12:28-34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면서 ‘당신께서 친히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향 길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길을 묻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며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했습니다. 그때 무리들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세리들은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고,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자 청년관원은 예수님께로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율법사도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인생의 길과 천국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길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생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모릅니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생들이 알지 못하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역시 길을 찾는 인간 교주들이 이끄는 종교가 길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TV에서 ‘논어’강의를 했던 ‘도올 김용옥’교수라는 분 아시지요? 마치 세상 종교와 이치를 다 아는 듯이 거만을 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한 번은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을 강의에 초대하여 잠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장입니다. 그런데 그 잠깐의 강의를 하는 중에 ‘진리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의 구원관이기도 한 그런 내용입니다. 추기경은
“산 정상은 하나이지만 그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럿인 것처럼,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여럿이 있다. 즉 구원은 하나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방법은 여럿이 있다.”
는 내용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불교나 유교나 심지어는 무당종교까지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지성이라고 하는 두 사람이 한 통속이 되어서 진리의 길을 매도하는 기막힌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서 가톨릭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쉬운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좀더 쉽고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길을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들도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쉽고 편안한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4:12절에서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자세하게 가르치십니다. 여러분도 혹시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부터 살펴봅시다.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22:34-40, 누가복음 10:25-28절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상황적인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며, 진정한 이웃에 대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서론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의 진실한 마음을 알고자 하여 시험하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의 질문자인 서기관은 ‘당시의 율법인 금지명령 365가지와 긍정적 명령 248가지, 도합 613가지의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랍비들은 이 많은 율법 중에서 중요한 순서대로 구분하거나 세부적인 규정을 만드는 일로 자주 논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이 서기관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32-33절의 예수님의 답변에 대한 서기관의 견해를 보아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은 구약 율법의 요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영생의 길이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은 지키기 어려운 형식주의와 위선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진정한 의도를 요약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새 계명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실천적인 계명입니다.
1.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한 서기관이 거침없는 예수님의 답변을 듣다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이 서기관은 자신의 율법적 지식을 확인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주저 없이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30절 말씀만 다시 한 번 봅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네 번에 걸쳐 “다 한다(ejx o{lh\"/ with all)”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완전한’, ‘전체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다 한다(with all).’는 말은 ‘원천적인 최선의 삶’을 의미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서기관의 질문에 답변하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라는, 가장 강력한 명령의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을 ‘쉐마’(עמשׁ, hear, 듣다)라고 합니다. 쉐마의 내용은 신명기 6:4-9절의 말씀입니다. 쉐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명기 6:4절의 첫 글자인 ‘쉐마’를 땄기 때문입니다. 쉐마의 요약은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첫 머리에 사용하신 것은 신앙의 출발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섬길 수 있는 다른 신이나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믿는 사람은 이 하나님이 유일한 나의 주이시며 최선의 사랑을 드려야 할 분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 신앙이 확립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의 문을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십니다.
‘Habitat(해비타트)’라고 들어보셨지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입니다. 지난 3월 9일에는 ‘울산 헤비타트 창립총회’가 문수경기장 컨벤션센터에서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의 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인 활동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좌우명이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은 계기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함대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한 번은 근무시간에 다른 일을 하다가 함장에게 적발되었습니다. 카터는 함장에게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의 변명을 듣던 ‘리커버’ 함장은 짧게 물었습니다. “귀관은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Have you done your best?)” 이 질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카터는 그때부터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과연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지금은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헤비타트 운동을 직접 실천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인생의 길을 찾고 있다면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말은 헬라 말로 ἁγαπὴσεις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법조문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로써 강력한 명령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사랑의 방법과 한계를 나타내는 네 가지의 단어를 살펴봅시다.
(1) with all your heart(마음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마음(καρδὶα)이란? 사람의 생각과 활동의 중심인 自我, 즉 인격의 중심을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는 사랑은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킨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말씀과 4:20절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2) with all your soul(목숨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목숨(ψυχὴ , 프쉬케)이란? 육체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목숨을 다하는 사랑이란, 적당히 어느 한계까지만 사랑하는 것이 아닌, 생명을 내어놓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십니다.
(3) with all your mind(뜻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뜻(διάνοια)이란? 지적인 능력 즉 생각하는 힘을 말합니다. 뜻을 다하는 사랑이란 무지하거나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분명한 생각과 통찰력을 가진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4) with all your strength(힘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힘(ἰσχὺς, 이스퀴스)이란? 사람이 소유한 모든 능력, 즉 영혼과 육신의 모든 활동 능력을 말합니다. 힘을 다하는 사랑이란,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9:3절에서 표현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네 가지 단어는 “인간의 생명을 포함한 전 인격과 모든 정성과 모든 능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부분적인 사랑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2. 인생의 차선의 길은 이웃을 향한 실천적 사랑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하는 서기관에게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차선의 길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자기사랑을 기준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이란? 자신의 유익을 따지는 이기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가치,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6: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남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자학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에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며, 베드로전서 2:9절에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듯이 이웃을 동일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사랑이 현실적이듯이 이웃 사랑 또한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랍비 힐렐(Hillel)에게 이방인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소.” 라고 도전했다. 랍비 힐렐은 “네가 싫은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온 율법이요 나머지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가서 이것을 배우라” 고 했습니다.
랍비 힐렐의의 대답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웃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쉽게 가르치는 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생각하는 사순절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길을 제대로 찾았습니까? 그리고 그 길로 성실하게 가고 있습니까? 아직 방황하는 마음이 많이 있다면, 아직도 길을 찾고 있다면, 늦기 전에 이 사랑의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면서 ‘당신께서 친히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향 길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길을 묻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며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했습니다. 그때 무리들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세리들은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고,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자 청년관원은 예수님께로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율법사도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인생의 길과 천국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길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생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모릅니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생들이 알지 못하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역시 길을 찾는 인간 교주들이 이끄는 종교가 길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TV에서 ‘논어’강의를 했던 ‘도올 김용옥’교수라는 분 아시지요? 마치 세상 종교와 이치를 다 아는 듯이 거만을 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한 번은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을 강의에 초대하여 잠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장입니다. 그런데 그 잠깐의 강의를 하는 중에 ‘진리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의 구원관이기도 한 그런 내용입니다. 추기경은
“산 정상은 하나이지만 그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럿인 것처럼,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여럿이 있다. 즉 구원은 하나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방법은 여럿이 있다.”
는 내용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불교나 유교나 심지어는 무당종교까지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지성이라고 하는 두 사람이 한 통속이 되어서 진리의 길을 매도하는 기막힌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서 가톨릭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쉬운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좀더 쉽고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길을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들도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쉽고 편안한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4:12절에서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자세하게 가르치십니다. 여러분도 혹시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부터 살펴봅시다.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22:34-40, 누가복음 10:25-28절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상황적인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며, 진정한 이웃에 대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서론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의 진실한 마음을 알고자 하여 시험하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의 질문자인 서기관은 ‘당시의 율법인 금지명령 365가지와 긍정적 명령 248가지, 도합 613가지의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랍비들은 이 많은 율법 중에서 중요한 순서대로 구분하거나 세부적인 규정을 만드는 일로 자주 논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이 서기관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32-33절의 예수님의 답변에 대한 서기관의 견해를 보아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은 구약 율법의 요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영생의 길이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은 지키기 어려운 형식주의와 위선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진정한 의도를 요약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새 계명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실천적인 계명입니다.
1.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한 서기관이 거침없는 예수님의 답변을 듣다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이 서기관은 자신의 율법적 지식을 확인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주저 없이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30절 말씀만 다시 한 번 봅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네 번에 걸쳐 “다 한다(ejx o{lh\"/ with all)”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완전한’, ‘전체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다 한다(with all).’는 말은 ‘원천적인 최선의 삶’을 의미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서기관의 질문에 답변하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라는, 가장 강력한 명령의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을 ‘쉐마’(עמשׁ, hear, 듣다)라고 합니다. 쉐마의 내용은 신명기 6:4-9절의 말씀입니다. 쉐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명기 6:4절의 첫 글자인 ‘쉐마’를 땄기 때문입니다. 쉐마의 요약은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첫 머리에 사용하신 것은 신앙의 출발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섬길 수 있는 다른 신이나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믿는 사람은 이 하나님이 유일한 나의 주이시며 최선의 사랑을 드려야 할 분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 신앙이 확립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의 문을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십니다.
‘Habitat(해비타트)’라고 들어보셨지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입니다. 지난 3월 9일에는 ‘울산 헤비타트 창립총회’가 문수경기장 컨벤션센터에서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의 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인 활동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좌우명이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은 계기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함대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한 번은 근무시간에 다른 일을 하다가 함장에게 적발되었습니다. 카터는 함장에게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의 변명을 듣던 ‘리커버’ 함장은 짧게 물었습니다. “귀관은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Have you done your best?)” 이 질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카터는 그때부터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과연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지금은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헤비타트 운동을 직접 실천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인생의 길을 찾고 있다면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말은 헬라 말로 ἁγαπὴσεις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법조문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로써 강력한 명령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사랑의 방법과 한계를 나타내는 네 가지의 단어를 살펴봅시다.
(1) with all your heart(마음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마음(καρδὶα)이란? 사람의 생각과 활동의 중심인 自我, 즉 인격의 중심을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는 사랑은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킨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말씀과 4:20절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2) with all your soul(목숨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목숨(ψυχὴ , 프쉬케)이란? 육체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목숨을 다하는 사랑이란, 적당히 어느 한계까지만 사랑하는 것이 아닌, 생명을 내어놓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십니다.
(3) with all your mind(뜻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뜻(διάνοια)이란? 지적인 능력 즉 생각하는 힘을 말합니다. 뜻을 다하는 사랑이란 무지하거나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분명한 생각과 통찰력을 가진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4) with all your strength(힘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힘(ἰσχὺς, 이스퀴스)이란? 사람이 소유한 모든 능력, 즉 영혼과 육신의 모든 활동 능력을 말합니다. 힘을 다하는 사랑이란,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9:3절에서 표현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네 가지 단어는 “인간의 생명을 포함한 전 인격과 모든 정성과 모든 능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부분적인 사랑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2. 인생의 차선의 길은 이웃을 향한 실천적 사랑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하는 서기관에게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차선의 길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자기사랑을 기준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이란? 자신의 유익을 따지는 이기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가치,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6: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남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자학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에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며, 베드로전서 2:9절에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듯이 이웃을 동일하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사랑이 현실적이듯이 이웃 사랑 또한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랍비 힐렐(Hillel)에게 이방인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소.” 라고 도전했다. 랍비 힐렐은 “네가 싫은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온 율법이요 나머지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가서 이것을 배우라” 고 했습니다.
랍비 힐렐의의 대답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웃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쉽게 가르치는 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생각하는 사순절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길을 제대로 찾았습니까? 그리고 그 길로 성실하게 가고 있습니까? 아직 방황하는 마음이 많이 있다면, 아직도 길을 찾고 있다면, 늦기 전에 이 사랑의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