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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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3-11 22:59
***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마가복음 10:35-45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언젠가 어느 결혼식에서 있었던 축하 연주 때였습니다. 결혼 축하 시간에 피아노 5중주의 축하 연주가 있었습니다. 연주곡목은 여러분도 잘 아실 ‘사랑의 기쁨’이었습니다. 이 곡은 프랑스 작곡가 ‘장 폴 마르티니(Jean Paul Egide Martini, 1741-1816)’의 유명한 곡입니다. 그러나 제목은 ‘사랑의 기쁨’이지만 원곡은 달빛 아래서 사랑을 맹세한 여인이 사랑을 배반하고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는 노래입니다. 가사의 대략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은 영원히 남았네.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의 것, 사랑의 아픔만이 영원한 것이라오.…”
이 사실을 신랑 신부가 알았더라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이런 때는 모르는 것이 다행입니다. 때로는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저 부드럽고 감미로운 연주만 생각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이 기막힌 사연은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면서 그곳에서 일어날 고난과 대속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일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라는 전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개혁을 일으키고 왕이 될 것’이라는 상상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 그대로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가는 이 길이 멸시와 천대와 고난과 처참한 죽음이라는 내면을 알지 못합니다. 왕으로서의 화려한 입성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고난의 노래를 사랑의 세레나데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리를 요구하는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만사형통하고 부귀영화를 얻는 길이 아님을 아십니까? 우리가 따르는 이 길이 출세와 명성을 얻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일찍이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은 제자의 길이 무엇을 얻는 길이 아니라, 버리는 길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3-44절에서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재확인하십니다.
‘팻 로버슨’ 목사는 예일대 법학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버지니아주 상원의원이며 은행통화위원장이었습니다. 이 분이 목사가 되기 전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날이었습니다. 퇴근시간에 한잔 하러 가자는 친구의 요청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현관문을 열고는 “여보, 나 구원받았소.”하고 외쳤습니다. 느닷없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당신 미쳤군요.”라고 했습니다. 로버슨은 “난 미치지 않았소. 난 구원을 받았단 말이오.”
그리고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무 말도 없이 찬장 문을 열고 거기 있던 위스키 병들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씩 마개를 열고 하수도에 쏟아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당신 왜 이래요? 얼마나 비싼 것들인데!” 하면서 달려와 마지막 술병을 잡아채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까지 빼앗아 다 쏟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길은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옛 것으로 가득 찬 자리에는 새 것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옛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6: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무엇을 버렸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자꾸만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전체 과정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생애 마지막 여정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 온 부자청년 관원에 대하여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영생을 얻는 길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야 하며, 핍박까지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영광을 기대하던 제자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게 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황당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지요? 생각이 한 곳에 몰려있을 때는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해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오히려 ‘높은 자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지원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과감하게 나섰습니다.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용감한 형제는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않게 하여 주소서.”라고 알짜배기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엉뚱한 요구를 하는 형제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라고 묻습니다. 역시 형제는 용감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망설임도 없이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더 설명하지 않으시고, 자리에 대한 권한이 성부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의 현재적인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모범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45절).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1. 주님께 무엇을 얻기를 기대한다면 먼저 버려야 합니다.
본문 앞쪽의 29-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도 주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는 세상에서의 소유와 욕심을 버린 후에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9:17절을 봅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공관복음에 모두 나오는 이 말씀은 버리지 못한 세상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아직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새 언약의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형통함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과 번민만 가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5:7절에서 말씀하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은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버린 후의 요청을 뜻합니다. 세상의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 말씀만 믿고 구한다면 주님의 요구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상태를 야고보서 4:3절에서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하십니다.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따를 때에는 아무것도 깨달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 충만 하여 자신을 버린 후에는 죽음도 불사하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자신의 버려야 할 것들을 알고 있지만,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지.’ ‘기도생활을 회복해야지.’ ‘이런 습관을 버려야지.’ ‘이제는 정말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하지만 잠시 후면 다시 옛 것으로 돌아 가버리고 포기해 버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옛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입을 수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에게는 ‘게알리스바디아스’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소크라테스만 만나면 “나는 너를 싫어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를 만나기만 하면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거울 앞에서처럼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주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소크라테스의 인격 앞에 드러남으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세상적인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으려면 예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고, 시간이 없다고 주님을 가까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결코 옛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힘이 들더라도 마음을 정하고 주님께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을 가까이 하시고 만나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8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하십니다.
2. 주님께 무엇을 얻기를 기대한다면 자기를 낮추고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를 기대한다면 먼저 고난의 길을 지나야 합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도 영광의 자리를 요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당하실 그 고난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십니다. 그리고 본문43-4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유럽의 종교 개혁자 중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쯔빙글리’는 여러 사상에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이른 아침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산길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깊이 감동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만치 건너편 가파른 산길에서 두 마리의 염소가 마주친 장면입니다. 한 마리는 위로 올라가는 중이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두 마리 염소가 마주친 길은 한마리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낭떠러지 길이었습니다.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는 꼿꼿이 서서 마치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내려가던 염소가 엎드린 염소의 등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엎드렸던 염소도 일어나서 올라갔습니다.
쯔빙글리는 한갓 미물인 염소들도 서로 부딪칠 때는 싸우지 않고 한 쪽이 겸손하게 엎드릴 줄 아는 지혜에 탄복했습니다. 그 후 쯔빙글리는 지혜롭게 서로를 받아들여 위대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한갓 미물과 같은 인생들을 위하여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시며,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더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높은 자리, 영광의 길, 형통한 삶, 부귀영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생각이 서로 달라져 있는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5: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의 요청에 대한 주님의 응답의 조건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입니다. 이는 주님과 우리가 한 생각, 한 뜻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영광이나 형통함이나 모든 좋은 것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요청을 하기 전에 먼저 주님과 뜻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무엇을 얻기를 원한다면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주님이 가신 길을 뒤따르는 고난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동상이몽의 꿈을 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옛 사람의 생각과 욕망과 습관과 사상들을 버려야 합니다. 새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옛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음을 맞추고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즉 나를 위하여 낮아지신 주님을 닮아 겸손의 삶으로 변화되며, 주님이 가신 길을 뒤따르는 고난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언젠가 어느 결혼식에서 있었던 축하 연주 때였습니다. 결혼 축하 시간에 피아노 5중주의 축하 연주가 있었습니다. 연주곡목은 여러분도 잘 아실 ‘사랑의 기쁨’이었습니다. 이 곡은 프랑스 작곡가 ‘장 폴 마르티니(Jean Paul Egide Martini, 1741-1816)’의 유명한 곡입니다. 그러나 제목은 ‘사랑의 기쁨’이지만 원곡은 달빛 아래서 사랑을 맹세한 여인이 사랑을 배반하고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는 노래입니다. 가사의 대략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은 영원히 남았네.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의 것, 사랑의 아픔만이 영원한 것이라오.…”
이 사실을 신랑 신부가 알았더라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이런 때는 모르는 것이 다행입니다. 때로는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저 부드럽고 감미로운 연주만 생각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이 기막힌 사연은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면서 그곳에서 일어날 고난과 대속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일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라는 전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개혁을 일으키고 왕이 될 것’이라는 상상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 그대로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가는 이 길이 멸시와 천대와 고난과 처참한 죽음이라는 내면을 알지 못합니다. 왕으로서의 화려한 입성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고난의 노래를 사랑의 세레나데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리를 요구하는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만사형통하고 부귀영화를 얻는 길이 아님을 아십니까? 우리가 따르는 이 길이 출세와 명성을 얻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일찍이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은 제자의 길이 무엇을 얻는 길이 아니라, 버리는 길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3-44절에서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재확인하십니다.
‘팻 로버슨’ 목사는 예일대 법학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버지니아주 상원의원이며 은행통화위원장이었습니다. 이 분이 목사가 되기 전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날이었습니다. 퇴근시간에 한잔 하러 가자는 친구의 요청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현관문을 열고는 “여보, 나 구원받았소.”하고 외쳤습니다. 느닷없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당신 미쳤군요.”라고 했습니다. 로버슨은 “난 미치지 않았소. 난 구원을 받았단 말이오.”
그리고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무 말도 없이 찬장 문을 열고 거기 있던 위스키 병들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씩 마개를 열고 하수도에 쏟아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당신 왜 이래요? 얼마나 비싼 것들인데!” 하면서 달려와 마지막 술병을 잡아채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까지 빼앗아 다 쏟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길은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옛 것으로 가득 찬 자리에는 새 것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옛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6: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무엇을 버렸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자꾸만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전체 과정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생애 마지막 여정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 온 부자청년 관원에 대하여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영생을 얻는 길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야 하며, 핍박까지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영광을 기대하던 제자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게 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황당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지요? 생각이 한 곳에 몰려있을 때는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해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오히려 ‘높은 자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지원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과감하게 나섰습니다.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용감한 형제는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않게 하여 주소서.”라고 알짜배기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엉뚱한 요구를 하는 형제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라고 묻습니다. 역시 형제는 용감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망설임도 없이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더 설명하지 않으시고, 자리에 대한 권한이 성부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의 현재적인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모범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45절).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1. 주님께 무엇을 얻기를 기대한다면 먼저 버려야 합니다.
본문 앞쪽의 29-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도 주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는 세상에서의 소유와 욕심을 버린 후에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9:17절을 봅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공관복음에 모두 나오는 이 말씀은 버리지 못한 세상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아직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새 언약의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형통함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과 번민만 가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5:7절에서 말씀하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은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버린 후의 요청을 뜻합니다. 세상의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 말씀만 믿고 구한다면 주님의 요구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상태를 야고보서 4:3절에서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하십니다.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따를 때에는 아무것도 깨달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 충만 하여 자신을 버린 후에는 죽음도 불사하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자신의 버려야 할 것들을 알고 있지만,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지.’ ‘기도생활을 회복해야지.’ ‘이런 습관을 버려야지.’ ‘이제는 정말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하지만 잠시 후면 다시 옛 것으로 돌아 가버리고 포기해 버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옛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입을 수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에게는 ‘게알리스바디아스’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소크라테스만 만나면 “나는 너를 싫어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를 만나기만 하면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거울 앞에서처럼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주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소크라테스의 인격 앞에 드러남으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세상적인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으려면 예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고, 시간이 없다고 주님을 가까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결코 옛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힘이 들더라도 마음을 정하고 주님께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을 가까이 하시고 만나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8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하십니다.
2. 주님께 무엇을 얻기를 기대한다면 자기를 낮추고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를 기대한다면 먼저 고난의 길을 지나야 합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도 영광의 자리를 요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당하실 그 고난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십니다. 그리고 본문43-4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유럽의 종교 개혁자 중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쯔빙글리’는 여러 사상에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이른 아침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산길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깊이 감동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만치 건너편 가파른 산길에서 두 마리의 염소가 마주친 장면입니다. 한 마리는 위로 올라가는 중이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두 마리 염소가 마주친 길은 한마리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낭떠러지 길이었습니다.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는 꼿꼿이 서서 마치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내려가던 염소가 엎드린 염소의 등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엎드렸던 염소도 일어나서 올라갔습니다.
쯔빙글리는 한갓 미물인 염소들도 서로 부딪칠 때는 싸우지 않고 한 쪽이 겸손하게 엎드릴 줄 아는 지혜에 탄복했습니다. 그 후 쯔빙글리는 지혜롭게 서로를 받아들여 위대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한갓 미물과 같은 인생들을 위하여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시며,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더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높은 자리, 영광의 길, 형통한 삶, 부귀영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생각이 서로 달라져 있는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5: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의 요청에 대한 주님의 응답의 조건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입니다. 이는 주님과 우리가 한 생각, 한 뜻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영광이나 형통함이나 모든 좋은 것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요청을 하기 전에 먼저 주님과 뜻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무엇을 얻기를 원한다면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주님이 가신 길을 뒤따르는 고난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동상이몽의 꿈을 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옛 사람의 생각과 욕망과 습관과 사상들을 버려야 합니다. 새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옛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음을 맞추고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즉 나를 위하여 낮아지신 주님을 닮아 겸손의 삶으로 변화되며, 주님이 가신 길을 뒤따르는 고난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