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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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3-06 00:08
***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 사도행전
**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16:6-15,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에서 오는 나쁜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몇 가지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1문 - ‘속상할 때 어떻게 하는가?’
20대들의 대답 / 1) 잔뜩 취하게 술을 마신다. 2) 디스코텍에 가서 진땀날 때까지 흔든다. 3)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른다. 4) 문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5) 친구들에게 전화 걸어 만난다. 등이었습니다.
30대나 40대들의 대답 / 1) 술을 마신다. 2) 무조건 집을 뛰쳐나간다. 3) 드라이브를 한다. 4) 책을 본다. 5) 친구를 만난다. 6) 노래방에 간다. 등입니다. 이들이 노래방에서 불렀다는 노래의 1위는 ‘소양강 처녀’였습니다.
2문 - ‘당신이 선택한 그 방법으로 속상한 것이 풀렸는가?’
단 한 명도 속이 풀렸다든지 상한 감정이 그런 방법으로 치유됐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밤새도록 술 마시고 속 쓰려 죽을 뻔 했다.” “밤새도록 술 마시고 그 다음날 해장국 먹느라고 돈만 들어갔다.” “차 몰고 집나갔다 교통사고로 돈만 손해 봤다.” “노래방 가서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다가 이비인후과 신세졌다.” 등 ‘자신들의 선택한 방법들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습니다.
3문 - ‘당신이 선택한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나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제일 많았습니다.
4문 - ‘당신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는가?’
92.5%가 ‘그런 친구가 없다.’고 대답 했습니다.
요즈음 삶이 뜻대로 잘되지 않지요? 이래저래 속상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 것이 뜻대로 잘되지 않고, 속이 상할 때면 어떻게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를 만나면 마음이 격렬해진다든지 의기소침해집니다. 그리고 세상적이거나 육신적인 방법으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아시고 시편 146:3-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권력가들을 믿지 말아라. 사람은 너희를 구해 줄 수 없으니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때에는 모든 계획 사라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146:5절에서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1.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15:36절부터 18:22절까지는 바울 전도단의 2차 전도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안디옥을 출발하여 비교적 가까운 소아시아 지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곧 바울 전도단은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2차 전도여행은 본격적으로 본도를 비롯한 아시아 내륙으로 진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출발하기도 전에 전도단이 내부 마찰을 일으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친척인 마가를 데려가자고 한 것이 다툼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에 도중에서 돌아 가버린 마가를 다시 데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은 이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은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안디옥을 출발하여 뱃길로 구브로를 향하여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해변을 따라 육로로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더베와 루스드라를 거쳐면서 복음을 전하고 1차 전도여행 때 지났던 교회들을 방문하고 격려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라는 신실한 제자가 전도여행에 합세하게 되어 바울은 힘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아시아 내륙으로 선교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성령께서 그의 걸음을 막으셨습니다. 결국 바울 전도단은 유럽과의 경계지역인 ‘드로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통하여 유럽지역인 ‘마케도니아’로 방향을 잡게 하셨습니다. 잠언 16: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37:23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바울 전도단은 즉시 유럽지역으로 출발했습니다.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할 때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길이 막혔는데, 유럽지역에서는 선교거점도, 돕는 사람들도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는 일들이 술술 풀렸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2: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과 환경들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돌아봅시다.
2.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안디옥을 출발하여 길리기아 다소를 거쳐 갈라디아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에서 1차 전도여행 때에 다녀갔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지나면서 교회들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길이 막혔습니다. 본문 6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방향을 돌려서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서 갈라디아를 거쳐 무시아에서 본도 쪽인 비두니아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길이 막혔습니다. 본문 7절에서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시아를 지나서 해안도시인 드로아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뱃길로 돌아가려고 계획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드로아는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는 트로이(Troy)입니다. 트로이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트로이라는 이름에서 드로아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3차 전도여행기인 사도행전 20:6-7절 상반절에서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드로아 교회는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누가가 바울을 알게 되어 동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길이 막힌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몇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든지 둘째는 그 지역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든지(때가 되지 않음) 셋째는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든지,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길이 막혔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바울의 삶의 길이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는 세 번째 이유가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전도단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에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바울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말씀은 바울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길이 막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형태로든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태풍이나 폭우 등의 천재지변일 수도 있고, 도로 사정이나 이동수단 등의 여건이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건 혹은 질병 등으로 인한 신상의 이유 또는 사람들로 인한 막힘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로 도저히 목적지로 갈 수 없게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경험과 여러 상황을 토대로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목적을 정하고 실행합니다. 그런데 일이 계획대로 다 되지는 않습니다. 물질이 따라주지 않든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일을 그르치든지, 뜻하지 않은 사건과 사고로 막히든지, 건강상의 이유로 포기해야 하든지, 등등. 삶이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본문의 사도 바울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길이 막혔지만 화를 내지 않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길이 막히는 중에도 교회를 돌아보고,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하여 여러 방향으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앞 쪽의 4절에서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성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라고 하며, 7절에서는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라고 최선의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이 막힐 때에는 서두르지 말고,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도 말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에서 증언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사사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할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삿 6:11). 선지자 엘리사는 12겨리 소로 밭을 갈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로 일하고 있을 때, 마태는 세관에서 일할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르심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대부분은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요한복음 5:17절에서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열정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비록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3.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세상의 상술은 ‘장사가 안 되고 불황일 때에 매장의 분위기를 더 밝게 하고 상품을 더 많이 들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뜩이나 손님이 없어서 썰렁한데 조명이 어둡고 상품도 별 것 없으면 사람들이 더 외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다가 삶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설 때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연단’의 의미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야 합니다. 설령 연단이 아니라 징계라고 한다면 더욱 자신을 낮추고 주님께 다가서야 살 길이 열립니다. 야고보 4:8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하십니다.
강기슭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쭉쭉 가지를 뻗어 무성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이런 거만한 자세로 뽐내기가 일쑤였습니다.
“나는 참 튼튼하단 말이야. 세상에 나를 쓰러뜨릴 놈은 하나도 없어.”
그러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난 어느 날, 참나무는 폭풍우를 견디지 못해 와지끈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동강이 난 참나무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갈대밭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참나무는 무성한 갈대에게 물었습니다.
“갈대야. 넌 어제 밤 그 무서운 비바람 속에서 부러지기는커녕 상처하나 없으니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갈대는 동정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쌍한 참나무님. 바람이 나를 해치지 못한 비결은요, 바람이 지날 때면 늘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당신은 버티고 서서 부는 바람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부러진 것이지요. 쯧쯧, 거센 바람과 맞서 버티려하다니…”
본문 10절을 봅시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이 드로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한 편으로는 진행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바울에게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머뭇거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즉시 유럽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이는 10절 후반절에서 표현한 대로 그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세상적으로 흘러가거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분을 품거나, 세상적인 것에 마음을 두게 되면 일은 점점 더 꼬이게 됩니다.
본문 11-15절을 보면 길이 시원하게 뚫리고,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척척 준비되는 것이 보이지요? 이런 것을 두고 형통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길은 이렇게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로 가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이러한 형통함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만재홀수선(Plimsoll line)’ 혹은 ‘적재한계선(Load Lin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세기에 대영제국이 오대양을 누볐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많은 배들이 침몰했습니다. 침몰의 이유는 ‘배의 적재 능력 이상으로 짐을 너무 많이 실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연구하던 새뮤얼 플림솔(Samuel Plimsoll)은 1880년 영국 의회에 한 법안을 제출했습니다. 그 법안은 ‘선체에 적재 능력에 해당하는 하나의 선을 그리고, 짐을 실을 때 물이 그 선까지 오르면 더 이상 짐을 싣지 못하도록 규제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이 ‘만재 홀수선’ 혹은 ‘적재한계선’이라고 합니다.
이 선은 생명선과 같습니다. 그 이상을 실으면 침몰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Load Line이 아닌 Lord Line을 그어야 합니다. 즉 ‘주님을 섬기는 선’을 그어야 합니다. 이 선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이 선을 멀리 벗어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멀어지며, 결국 세상 속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세상에 속한 부귀영화와 물질과 명예와 권세들은 많이 쌓을수록 더 빠르게 침몰할 뿐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경고하십니다. 삶이 어려워진다고 나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힘을 다 써버리고, 남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멀리 떠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삶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주어진 삶에 더욱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에게 많은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의 결론인 마태복음 25:21절에서 주님께서는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시며, 므나 비유의 결론인 누가복음 19:17절에서는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삶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며 더욱 깊이 의지해야 합니다. 연단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용광로와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더욱 가까이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세상으로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 순종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16:6-15,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에서 오는 나쁜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몇 가지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1문 - ‘속상할 때 어떻게 하는가?’
20대들의 대답 / 1) 잔뜩 취하게 술을 마신다. 2) 디스코텍에 가서 진땀날 때까지 흔든다. 3)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른다. 4) 문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5) 친구들에게 전화 걸어 만난다. 등이었습니다.
30대나 40대들의 대답 / 1) 술을 마신다. 2) 무조건 집을 뛰쳐나간다. 3) 드라이브를 한다. 4) 책을 본다. 5) 친구를 만난다. 6) 노래방에 간다. 등입니다. 이들이 노래방에서 불렀다는 노래의 1위는 ‘소양강 처녀’였습니다.
2문 - ‘당신이 선택한 그 방법으로 속상한 것이 풀렸는가?’
단 한 명도 속이 풀렸다든지 상한 감정이 그런 방법으로 치유됐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밤새도록 술 마시고 속 쓰려 죽을 뻔 했다.” “밤새도록 술 마시고 그 다음날 해장국 먹느라고 돈만 들어갔다.” “차 몰고 집나갔다 교통사고로 돈만 손해 봤다.” “노래방 가서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다가 이비인후과 신세졌다.” 등 ‘자신들의 선택한 방법들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습니다.
3문 - ‘당신이 선택한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나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제일 많았습니다.
4문 - ‘당신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는가?’
92.5%가 ‘그런 친구가 없다.’고 대답 했습니다.
요즈음 삶이 뜻대로 잘되지 않지요? 이래저래 속상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 것이 뜻대로 잘되지 않고, 속이 상할 때면 어떻게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를 만나면 마음이 격렬해진다든지 의기소침해집니다. 그리고 세상적이거나 육신적인 방법으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아시고 시편 146:3-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권력가들을 믿지 말아라. 사람은 너희를 구해 줄 수 없으니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때에는 모든 계획 사라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146:5절에서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1.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15:36절부터 18:22절까지는 바울 전도단의 2차 전도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안디옥을 출발하여 비교적 가까운 소아시아 지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곧 바울 전도단은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2차 전도여행은 본격적으로 본도를 비롯한 아시아 내륙으로 진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출발하기도 전에 전도단이 내부 마찰을 일으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친척인 마가를 데려가자고 한 것이 다툼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에 도중에서 돌아 가버린 마가를 다시 데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은 이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은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안디옥을 출발하여 뱃길로 구브로를 향하여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해변을 따라 육로로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더베와 루스드라를 거쳐면서 복음을 전하고 1차 전도여행 때 지났던 교회들을 방문하고 격려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라는 신실한 제자가 전도여행에 합세하게 되어 바울은 힘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아시아 내륙으로 선교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성령께서 그의 걸음을 막으셨습니다. 결국 바울 전도단은 유럽과의 경계지역인 ‘드로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통하여 유럽지역인 ‘마케도니아’로 방향을 잡게 하셨습니다. 잠언 16: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37:23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바울 전도단은 즉시 유럽지역으로 출발했습니다.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할 때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길이 막혔는데, 유럽지역에서는 선교거점도, 돕는 사람들도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는 일들이 술술 풀렸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2: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과 환경들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돌아봅시다.
2.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안디옥을 출발하여 길리기아 다소를 거쳐 갈라디아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에서 1차 전도여행 때에 다녀갔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지나면서 교회들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길이 막혔습니다. 본문 6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방향을 돌려서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서 갈라디아를 거쳐 무시아에서 본도 쪽인 비두니아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길이 막혔습니다. 본문 7절에서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시아를 지나서 해안도시인 드로아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뱃길로 돌아가려고 계획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드로아는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는 트로이(Troy)입니다. 트로이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트로이라는 이름에서 드로아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3차 전도여행기인 사도행전 20:6-7절 상반절에서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드로아 교회는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누가가 바울을 알게 되어 동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길이 막힌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몇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든지 둘째는 그 지역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든지(때가 되지 않음) 셋째는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든지,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길이 막혔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바울의 삶의 길이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는 세 번째 이유가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전도단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에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바울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말씀은 바울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길이 막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형태로든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태풍이나 폭우 등의 천재지변일 수도 있고, 도로 사정이나 이동수단 등의 여건이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건 혹은 질병 등으로 인한 신상의 이유 또는 사람들로 인한 막힘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로 도저히 목적지로 갈 수 없게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경험과 여러 상황을 토대로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목적을 정하고 실행합니다. 그런데 일이 계획대로 다 되지는 않습니다. 물질이 따라주지 않든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일을 그르치든지, 뜻하지 않은 사건과 사고로 막히든지, 건강상의 이유로 포기해야 하든지, 등등. 삶이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본문의 사도 바울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길이 막혔지만 화를 내지 않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길이 막히는 중에도 교회를 돌아보고,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하여 여러 방향으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앞 쪽의 4절에서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성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라고 하며, 7절에서는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라고 최선의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이 막힐 때에는 서두르지 말고,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도 말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에서 증언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사사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할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삿 6:11). 선지자 엘리사는 12겨리 소로 밭을 갈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로 일하고 있을 때, 마태는 세관에서 일할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르심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대부분은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요한복음 5:17절에서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열정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비록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3.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세상의 상술은 ‘장사가 안 되고 불황일 때에 매장의 분위기를 더 밝게 하고 상품을 더 많이 들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뜩이나 손님이 없어서 썰렁한데 조명이 어둡고 상품도 별 것 없으면 사람들이 더 외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다가 삶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설 때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연단’의 의미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야 합니다. 설령 연단이 아니라 징계라고 한다면 더욱 자신을 낮추고 주님께 다가서야 살 길이 열립니다. 야고보 4:8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하십니다.
강기슭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쭉쭉 가지를 뻗어 무성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이런 거만한 자세로 뽐내기가 일쑤였습니다.
“나는 참 튼튼하단 말이야. 세상에 나를 쓰러뜨릴 놈은 하나도 없어.”
그러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난 어느 날, 참나무는 폭풍우를 견디지 못해 와지끈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동강이 난 참나무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갈대밭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참나무는 무성한 갈대에게 물었습니다.
“갈대야. 넌 어제 밤 그 무서운 비바람 속에서 부러지기는커녕 상처하나 없으니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갈대는 동정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쌍한 참나무님. 바람이 나를 해치지 못한 비결은요, 바람이 지날 때면 늘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당신은 버티고 서서 부는 바람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부러진 것이지요. 쯧쯧, 거센 바람과 맞서 버티려하다니…”
본문 10절을 봅시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이 드로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한 편으로는 진행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바울에게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머뭇거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즉시 유럽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이는 10절 후반절에서 표현한 대로 그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세상적으로 흘러가거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분을 품거나, 세상적인 것에 마음을 두게 되면 일은 점점 더 꼬이게 됩니다.
본문 11-15절을 보면 길이 시원하게 뚫리고,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척척 준비되는 것이 보이지요? 이런 것을 두고 형통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길은 이렇게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로 가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이러한 형통함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만재홀수선(Plimsoll line)’ 혹은 ‘적재한계선(Load Lin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세기에 대영제국이 오대양을 누볐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많은 배들이 침몰했습니다. 침몰의 이유는 ‘배의 적재 능력 이상으로 짐을 너무 많이 실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연구하던 새뮤얼 플림솔(Samuel Plimsoll)은 1880년 영국 의회에 한 법안을 제출했습니다. 그 법안은 ‘선체에 적재 능력에 해당하는 하나의 선을 그리고, 짐을 실을 때 물이 그 선까지 오르면 더 이상 짐을 싣지 못하도록 규제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이 ‘만재 홀수선’ 혹은 ‘적재한계선’이라고 합니다.
이 선은 생명선과 같습니다. 그 이상을 실으면 침몰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Load Line이 아닌 Lord Line을 그어야 합니다. 즉 ‘주님을 섬기는 선’을 그어야 합니다. 이 선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이 선을 멀리 벗어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멀어지며, 결국 세상 속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세상에 속한 부귀영화와 물질과 명예와 권세들은 많이 쌓을수록 더 빠르게 침몰할 뿐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경고하십니다. 삶이 어려워진다고 나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힘을 다 써버리고, 남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멀리 떠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삶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주어진 삶에 더욱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에게 많은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의 결론인 마태복음 25:21절에서 주님께서는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시며, 므나 비유의 결론인 누가복음 19:17절에서는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삶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며 더욱 깊이 의지해야 합니다. 연단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용광로와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더욱 가까이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세상으로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 순종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