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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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2-25 23:23
*** 생각하라 / 히브리서 10:23-37
**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 10:23-37,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인생은 어부 시간은 강물. 하지만 인간들이 그곳에서 낚는 것은 오직 한줌의 연기뿐…”
영국의 방랑시인인 ‘데이비스’가 인생을 노래한 한 구절입니다. 인생이라는 어부는 끊임없이 강물이라는 시간 속에서 행복의 고기를 낚아보려고 했지만 낚는 것은 죽음뿐이었다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노래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찾아보지만 결국 얻는 것은 죽음입니다.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내가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라고 하며 2:23절에서는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 라고 인생무상을 탄식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그렇지요?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었습니까? 아니면 지난 한 주간, 몸이 아파도 마음대로 쉬지 못하고, 아이들 걱정, 살림걱정, 돈 걱정, 장래걱정으로 마음 편할 시간 없이 일하고 고민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어떤 성도가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높은 시온 산꼭대기에 온갖 보석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새 예루살렘성이 보였습니다. 그 성도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왔구나.” 하면서 성으로 가까이 올라갔습니다.
성에는 굳게 닫힌 큰 문이 있었는데, 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된 문이었습니다. “야. 내가 새 예루살렘성에 왔구나.”라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더니 베드로가 나왔습니다. 성도는 “저는 ○○교회에서 온 ○○○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성에 들어오려면 믿음표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표를 가지고 왔느냐?” 성도가 대뜸 “네. 가져왔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안주머니를 만져 보니 믿음표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주머니를 다 뒤져도 믿음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졌습니다.”라며 “지금 믿음표는 없지만 ○○교회에 몇 십 년을 다녔는데 좀 들어갈 수 없겠습니까?” 통 사정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은 안 되네. 오래 다녔다는 것으로는 아무 쓸데없네. 믿음표가 있어야지.” 다급해진 성도가 “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그 교회에서 장로로 일한지 십 년이나 됐습니다. 그래도 좀 들어갈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아니. 장로를 십 여 년이나 믿음 없이 했으면 말썽꾸러기였겠구먼. 그게 무슨 쓸데가 있어.”하고는 문을 ‘꽝’닫고는 들어 가버렸습니다. 그 문소리에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더랍니다.
꿈이었기에 망정이지. 실제였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함입니다. 이러한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본문 말씀처럼 ‘생각해야’합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심판의 날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23-25절을 봅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7절에서 말씀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을 생각하라.’는 것은 심판 자리에서 ‘의로운 쪽’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심판의 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더욱 성실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망을 굳게 잡고 둘째는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고 셋째는 서로 권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먼저,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굳게 잡아야 할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왜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6:19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잡는 것이 이 땅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며,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은 목표가 없는 것이며, 떠돌이 인생이 될 뿐입니다.
두 번째로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선행이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가 행하여야 할 마땅한 사명입니다.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선행은 성도가 천국잔치에 참여할 예복이 됩니다. 계시록 19:8절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 번째는 서로 권면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올수록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삽 겹줄은 잘 끊어지지 않는다.”(전 4:12)고 한 것처럼, 성도가 모일수록 환난을 이겨낼 힘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울수록 환난이 심해지고 믿음을 떠나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이기를”이라는 단어가 ‘회당 예배 이외의 다른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뜻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정규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다른 특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즉 정규적인 예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잘 모여야 하고, 또 다른 성도들의 모임도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세상에 관심을 두고 세상적인 모임에 빠져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모임에 빠지면 세상 습관만 몸에 배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을 생각한다면 소망을 굳게 잡고, 성도들이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고, 서로 권면하여 성도들의 모임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2. 받을 형벌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26-29절을 봅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오늘의 사람들은 ‘망상증(妄想症)’에 ‘망각(妄覺)증’까지 겹쳐있습니다. 망상증이란 피해망상, 과대망상, 몽상망상처럼 병적으로 잘못된 신념을 말하며, 망각증이란 잘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잊어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부어지는 형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7절에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고 형벌의 무서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망상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짐짓 죄”라고 표현합니다. “짐짓”이란 ‘자진해서’, ‘고의로’, ‘의도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무시하는 죄악 된 행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알고서도 하나님을 떠나며 우상을 섬기는 배교행위이며,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욕되게 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감각이 없게 되며 결국은 죽음의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는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하지만 그것이 잘못인 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 때는 주일뿐만 아니라 예배에 빠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한 번이라도 빠지면 큰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운 생각으로 가득하지요. 그러다가 열심이 식어지면서 한 번 빠지게 되고, 수요예배에 빠지고, 주일 저녁예배에 빠지고, 결국은 주일 낮 예배마저 드문드문 이빨이 빠지게 됩니다. 이럴 때쯤이면 벌써 영은 아사 상태가 되어서 별로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예배는 형식이 되고, 하나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즉 들어도 듣는 것으로 끝나며 순종의 삶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는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4-6절을 봅시다.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오래 전에 한 전방 도시에서 마차를 끌던 말이 아이를 태운 채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이가 위험한 것을 보고 한 젊은이가 생명을 무릅쓰고 말을 붙들어 마차를 세웠습니다. 구출된 그 아이는 성장하여 무법자가 되었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 위하여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죄수가 재판장을 보다가 그 재판장이 오래 전에 자기 생명을 구해준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죄수는 자신을 살려주었던 마차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재판장은 “젊은이, 그때는 내가 당신의 구원자였소.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의 재판자요. 나는 당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언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무한정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주님이 부르실 때에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긴 은혜의 날 동안 나는 너의 구원자였으며, 나는 너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많은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의 행위대로 심판할 심판자이다.”라고 말입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3. 상급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32-37절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신앙에 뜨거운 열심이 있을 때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신앙 열심이 있을 때에는 힘든 일, 어려운 일, 환경 등이 문제가 되지를 않았지요? 이 말씀은 바로 그러한 첫 사랑의 열정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환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이 열정을 담대하게 지켜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영원한 상급을 결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0-1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에게는 상급을 결정하는 공력심판이 있습니다. 14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다고 또는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면 금, 은, 보석 같은 재료가 되겠습니까?
지금 한국교회도 이미 키질이 시작되었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회개에 동참하며 스스로를 성결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강 건너 불 보듯 별 반응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주일 말씀이었던 계시록 22:10-11절을 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즉 마지막 때에 확연하게 갈라지는 두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갈라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어느 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 10:23-37,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인생은 어부 시간은 강물. 하지만 인간들이 그곳에서 낚는 것은 오직 한줌의 연기뿐…”
영국의 방랑시인인 ‘데이비스’가 인생을 노래한 한 구절입니다. 인생이라는 어부는 끊임없이 강물이라는 시간 속에서 행복의 고기를 낚아보려고 했지만 낚는 것은 죽음뿐이었다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노래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찾아보지만 결국 얻는 것은 죽음입니다.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내가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라고 하며 2:23절에서는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 라고 인생무상을 탄식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그렇지요?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었습니까? 아니면 지난 한 주간, 몸이 아파도 마음대로 쉬지 못하고, 아이들 걱정, 살림걱정, 돈 걱정, 장래걱정으로 마음 편할 시간 없이 일하고 고민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어떤 성도가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높은 시온 산꼭대기에 온갖 보석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새 예루살렘성이 보였습니다. 그 성도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왔구나.” 하면서 성으로 가까이 올라갔습니다.
성에는 굳게 닫힌 큰 문이 있었는데, 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된 문이었습니다. “야. 내가 새 예루살렘성에 왔구나.”라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더니 베드로가 나왔습니다. 성도는 “저는 ○○교회에서 온 ○○○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성에 들어오려면 믿음표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표를 가지고 왔느냐?” 성도가 대뜸 “네. 가져왔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안주머니를 만져 보니 믿음표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주머니를 다 뒤져도 믿음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졌습니다.”라며 “지금 믿음표는 없지만 ○○교회에 몇 십 년을 다녔는데 좀 들어갈 수 없겠습니까?” 통 사정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은 안 되네. 오래 다녔다는 것으로는 아무 쓸데없네. 믿음표가 있어야지.” 다급해진 성도가 “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그 교회에서 장로로 일한지 십 년이나 됐습니다. 그래도 좀 들어갈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아니. 장로를 십 여 년이나 믿음 없이 했으면 말썽꾸러기였겠구먼. 그게 무슨 쓸데가 있어.”하고는 문을 ‘꽝’닫고는 들어 가버렸습니다. 그 문소리에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더랍니다.
꿈이었기에 망정이지. 실제였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함입니다. 이러한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본문 말씀처럼 ‘생각해야’합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심판의 날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23-25절을 봅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7절에서 말씀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을 생각하라.’는 것은 심판 자리에서 ‘의로운 쪽’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심판의 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더욱 성실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망을 굳게 잡고 둘째는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고 셋째는 서로 권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먼저,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굳게 잡아야 할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왜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6:19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잡는 것이 이 땅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며,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은 목표가 없는 것이며, 떠돌이 인생이 될 뿐입니다.
두 번째로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선행이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가 행하여야 할 마땅한 사명입니다.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선행은 성도가 천국잔치에 참여할 예복이 됩니다. 계시록 19:8절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 번째는 서로 권면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올수록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삽 겹줄은 잘 끊어지지 않는다.”(전 4:12)고 한 것처럼, 성도가 모일수록 환난을 이겨낼 힘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울수록 환난이 심해지고 믿음을 떠나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이기를”이라는 단어가 ‘회당 예배 이외의 다른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뜻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정규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다른 특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즉 정규적인 예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잘 모여야 하고, 또 다른 성도들의 모임도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세상에 관심을 두고 세상적인 모임에 빠져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모임에 빠지면 세상 습관만 몸에 배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을 생각한다면 소망을 굳게 잡고, 성도들이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고, 서로 권면하여 성도들의 모임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2. 받을 형벌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26-29절을 봅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오늘의 사람들은 ‘망상증(妄想症)’에 ‘망각(妄覺)증’까지 겹쳐있습니다. 망상증이란 피해망상, 과대망상, 몽상망상처럼 병적으로 잘못된 신념을 말하며, 망각증이란 잘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잊어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부어지는 형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7절에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고 형벌의 무서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망상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짐짓 죄”라고 표현합니다. “짐짓”이란 ‘자진해서’, ‘고의로’, ‘의도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무시하는 죄악 된 행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알고서도 하나님을 떠나며 우상을 섬기는 배교행위이며,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욕되게 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감각이 없게 되며 결국은 죽음의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는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하지만 그것이 잘못인 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 때는 주일뿐만 아니라 예배에 빠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한 번이라도 빠지면 큰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운 생각으로 가득하지요. 그러다가 열심이 식어지면서 한 번 빠지게 되고, 수요예배에 빠지고, 주일 저녁예배에 빠지고, 결국은 주일 낮 예배마저 드문드문 이빨이 빠지게 됩니다. 이럴 때쯤이면 벌써 영은 아사 상태가 되어서 별로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예배는 형식이 되고, 하나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즉 들어도 듣는 것으로 끝나며 순종의 삶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는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4-6절을 봅시다.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오래 전에 한 전방 도시에서 마차를 끌던 말이 아이를 태운 채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아이가 위험한 것을 보고 한 젊은이가 생명을 무릅쓰고 말을 붙들어 마차를 세웠습니다. 구출된 그 아이는 성장하여 무법자가 되었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 위하여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죄수가 재판장을 보다가 그 재판장이 오래 전에 자기 생명을 구해준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죄수는 자신을 살려주었던 마차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재판장은 “젊은이, 그때는 내가 당신의 구원자였소.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의 재판자요. 나는 당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언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무한정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주님이 부르실 때에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긴 은혜의 날 동안 나는 너의 구원자였으며, 나는 너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많은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의 행위대로 심판할 심판자이다.”라고 말입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3. 상급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32-37절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신앙에 뜨거운 열심이 있을 때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신앙 열심이 있을 때에는 힘든 일, 어려운 일, 환경 등이 문제가 되지를 않았지요? 이 말씀은 바로 그러한 첫 사랑의 열정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환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이 열정을 담대하게 지켜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영원한 상급을 결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0-1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에게는 상급을 결정하는 공력심판이 있습니다. 14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다고 또는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면 금, 은, 보석 같은 재료가 되겠습니까?
지금 한국교회도 이미 키질이 시작되었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회개에 동참하며 스스로를 성결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강 건너 불 보듯 별 반응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주일 말씀이었던 계시록 22:10-11절을 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즉 마지막 때에 확연하게 갈라지는 두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갈라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어느 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