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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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2-19 01:01
***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 계 22:10-15
** 들어가는 말
요한계시록 22:10-15,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오늘은 민족 최대명절인 ‘설날’이 겹쳐지면서 많은 성도들이 고향에서 예배하리라 생각합니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마음을 괜스레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명절이 되기 몇 주 전부터 고향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들뜨게 됩니다. 부모와 친지를 만나는 것과 잔치를 위해서 선물을 사고, 음식을 마련하느라 부산스럽게 준비를 합니다. 이렇게 이 땅의 고향에서의 잔치를 위해서는 준비를 잘 하는데, 정말 중요한 잔치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히브리서 11: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시며, 계시록 19:7-9절에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며, 본향에서 성대하게 치러질 가장 중요한 잔치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본향에서의 또 다른 잔치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요?
불과 몇 주 전에 똑 같은 본문을 가지고 ‘보상과 상급’을 주제로 말씀을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하고도 가장 중요한 천국잔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고자합니다.
구약의 다니엘서나 본문을 포함하는 요한계시록 같은 글을 ‘묵시문학’으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묵시의 글’들은 말 그대로 대부분의 의미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묵시서인 계시록의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열려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예언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의미가 개방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길을 열어 놓은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때란,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며, 우리가 참여할 ‘천국 잔치의 날’입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엄청난 이혼’ (The Great Divorce)이라는 제목의 우화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지옥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행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보내신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를 않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지고,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 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버스가 운행 중지 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우화에서처럼, 지금 이 세상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쾌락과 부귀영화에서 쉽게 돌아서지 못하여 망설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마 13:22)들인 가시떨기로 비유된 마음의 소유자들일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다른 쪽 편에 달렸던 강도나 사도바울처럼, 인생의 마지막 무렵에 가서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극적인 반전(反轉)이나 이변(異變)들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특히 스포츠에서 짜릿한 반적이나 이변들이 속출합니다. 예전의 월드컵 경기의 대 이탈리아 전에서 종료 2분여를 남겨두고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에서 골든 골을 넣는 것 같은 극적인 반전, 처음 출전한 선수가 챔피언을 꺾는 이변도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인생의 마지막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참담한 반전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반전이나 이변들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권사업이 잘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이런 극적인 반전이나, 전혀 예상을 뒤엎는 이변들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나 십자가상의 한 강도처럼 영적인 이변이나 극적인 반전이 종말이 가까울수록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11절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변과 반전이 없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의 극적인 반전이나 이변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것이 본문 12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1. 잔치를 위하여 두루마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잔치에서 ‘옷’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2:1-14절에는 ‘혼인잔치’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인 임금이 청함 받은 손님들을 살펴보던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임금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에서처럼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입을 예복은 ‘세마포’입니다. 계시록 19:8절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옷은 바로 이 세마포 옷입니다.
그런데 본문14절에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빤다.’는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의지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며 더러움이 없는 깨끗한 세마포 두루마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은 계시록의 일곱 복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의 복입니다. 즉 마지막 때에 깨어 있어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준비한 사람이 영생을 얻으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권세를 얻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렇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기회는 깨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면서 게으름에 빠져있거나 세상에 젖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중국 당나라 때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안록산의 군대가 옹구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옹구성의 수비대장은 ‘장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안록산의 반란군이 워낙 거세어서 옹구성이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장순은 묘책을 써서 모든 병사들에게 ‘짚으로 인형을 천개이상 만들어서 검정 옷을 입히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들을 새끼줄에 엮어서 한밤중에 성 아래로 달아 내렸습니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안록산의 반란군은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내려오는 줄 알고 정신없이 활을 쏘았습니다. 한 참 지난 후 장순은 인형을 걷어 올리게 했고, 힘들이지 않고 인형에 꽂힌 수만 개의 화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중에 장순은 500명의 정예군과 함께 줄을 타고 성을 내려갔습니다. 안록산의 반란군은 ‘또 속을 줄 아느냐?’는 듯 활을 쏘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장순의 정예군은 단번에 안록산의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단의 무리들은 하와를 속이던 때처럼, 주님의 재림에 의심을 품게 만들고 평안하다고 안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단의 주특기가 ‘거짓말이며, 속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단은 성도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세상일에 바쁘게 하며,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빌미로 자기 명예와 부귀영화를 꿈꾸도록 부추깁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금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을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2-33절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십니다. 예복도 준비되지 못한 채 갑자기 주님을 만나는 당황스러운 일이 없도록 예복을 준비합시다.
2. 요행을 기대하지 말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하겠는데 지금은 아니고, 세상을 조금 더 즐기고 돈도 벌어놓은 후에 믿겠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재림이 그렇게 여유롭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나, 우리 인생의 종말은 어느 날 소리도 없고 예고도 없이 다가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준비하러 간 사이에 주님이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실컷 즐기고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가겠다.’는 요행심리는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11-12절에서 ‘불의한 자는 불의 한 대로, 더러운 자는 더러운 대로, 의로운 자는 의로운 대로, 거룩한 자는 거룩한 대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그들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는 결코 극적인 반전도 이변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대한 부담감에 지레 겁을 먹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십일조를 하라. 헌금 하라.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집회, 성경 공부, 제자훈련, 전도하라. 봉사하라. 섬기라. 등등. 그래서 대충 참여하고 적당하게 빠져버리는 ‘눈치 신앙’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도 대충만 기대해야 하는데, 은혜와 복은 더 많이 받으려합니다. 이것이 요행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살피시기 때문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적당한 준비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중국 제나라 위왕 8년에 이웃의 초나라가 대군을 거느리고 침범해왔습니다. 위왕은 자신의 군대만으로는 강대한 초나라를 상대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왕은 임기응변에 능한 ‘순우곤’이라는 신하를 불러 조나라의 구원병을 얻어오라고 명했습니다. 왕은 조나라에 보내는 예물로 황금 백 근(약 60㎏), 말 40필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을 본 순우곤은 크게 웃었습니다. 왕은 “그대가 지금 조나라에 보내는 예물이 적다고 나를 비웃는 것인가?”라고 순우곤을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순우곤은 즉시
“아니로소이다. 왕이시여. 조금 전 신은 이곳에 오는 도중에 길가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돼지발톱 하나와 술 한 잔을 놓고서 다음과 같이 빌더이다. ‘높은 골짜기에는 그릇에 가득한 수확. 낮은 들판에는 수레에 가득한 수확. 오곡이 모두 잘 익어서 집안 구석구석에 가득가득 차도록 채워주소서.’ 신은 그들이 바친 것은 너무 적고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이 하도 우스워서 웃었을 뿐이옵니다.”
라고 했습니다. 위왕은 느낀 바 있어서 황금 천 근(약650㎏), 흰구슬 열 말. 말 400필을 내어주었고. 순우곤은 그것을 가지고 조나라에 가서 조나라 정예병사 10만과 전차 1,000승을 얻어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초나라 침략군은 감히 싸울 수가 없어서 물러가버렸다고 합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되며,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결코 심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목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들’을 제외한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21:8절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자들’의 명단에 들어있습니다. ‘개들’은 성경에서 ‘더럽고 악한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특히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낸다.’는 것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이런 것에 물들거나 동조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2:20-21절에서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많은 일로 부담스러워 하거나 눈치 신앙에 빠지지 말고, 한 번에 하나씩만 해 나갑시다. 그리하여 요행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깨어있어 작은 일부터 시작하고, 영원한 천국의 잔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계시록 22:10-15,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오늘은 민족 최대명절인 ‘설날’이 겹쳐지면서 많은 성도들이 고향에서 예배하리라 생각합니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마음을 괜스레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명절이 되기 몇 주 전부터 고향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들뜨게 됩니다. 부모와 친지를 만나는 것과 잔치를 위해서 선물을 사고, 음식을 마련하느라 부산스럽게 준비를 합니다. 이렇게 이 땅의 고향에서의 잔치를 위해서는 준비를 잘 하는데, 정말 중요한 잔치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히브리서 11: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시며, 계시록 19:7-9절에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며, 본향에서 성대하게 치러질 가장 중요한 잔치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본향에서의 또 다른 잔치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요?
불과 몇 주 전에 똑 같은 본문을 가지고 ‘보상과 상급’을 주제로 말씀을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하고도 가장 중요한 천국잔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고자합니다.
구약의 다니엘서나 본문을 포함하는 요한계시록 같은 글을 ‘묵시문학’으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묵시의 글’들은 말 그대로 대부분의 의미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묵시서인 계시록의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열려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예언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의미가 개방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길을 열어 놓은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때란,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며, 우리가 참여할 ‘천국 잔치의 날’입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엄청난 이혼’ (The Great Divorce)이라는 제목의 우화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지옥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행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보내신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를 않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지고,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 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버스가 운행 중지 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우화에서처럼, 지금 이 세상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쾌락과 부귀영화에서 쉽게 돌아서지 못하여 망설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마 13:22)들인 가시떨기로 비유된 마음의 소유자들일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다른 쪽 편에 달렸던 강도나 사도바울처럼, 인생의 마지막 무렵에 가서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극적인 반전(反轉)이나 이변(異變)들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특히 스포츠에서 짜릿한 반적이나 이변들이 속출합니다. 예전의 월드컵 경기의 대 이탈리아 전에서 종료 2분여를 남겨두고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에서 골든 골을 넣는 것 같은 극적인 반전, 처음 출전한 선수가 챔피언을 꺾는 이변도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인생의 마지막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참담한 반전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반전이나 이변들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권사업이 잘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이런 극적인 반전이나, 전혀 예상을 뒤엎는 이변들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나 십자가상의 한 강도처럼 영적인 이변이나 극적인 반전이 종말이 가까울수록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11절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변과 반전이 없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의 극적인 반전이나 이변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것이 본문 12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1. 잔치를 위하여 두루마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잔치에서 ‘옷’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2:1-14절에는 ‘혼인잔치’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인 임금이 청함 받은 손님들을 살펴보던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임금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에서처럼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입을 예복은 ‘세마포’입니다. 계시록 19:8절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옷은 바로 이 세마포 옷입니다.
그런데 본문14절에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빤다.’는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의지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며 더러움이 없는 깨끗한 세마포 두루마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은 계시록의 일곱 복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의 복입니다. 즉 마지막 때에 깨어 있어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준비한 사람이 영생을 얻으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권세를 얻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렇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기회는 깨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면서 게으름에 빠져있거나 세상에 젖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중국 당나라 때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안록산의 군대가 옹구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옹구성의 수비대장은 ‘장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안록산의 반란군이 워낙 거세어서 옹구성이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장순은 묘책을 써서 모든 병사들에게 ‘짚으로 인형을 천개이상 만들어서 검정 옷을 입히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들을 새끼줄에 엮어서 한밤중에 성 아래로 달아 내렸습니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안록산의 반란군은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내려오는 줄 알고 정신없이 활을 쏘았습니다. 한 참 지난 후 장순은 인형을 걷어 올리게 했고, 힘들이지 않고 인형에 꽂힌 수만 개의 화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중에 장순은 500명의 정예군과 함께 줄을 타고 성을 내려갔습니다. 안록산의 반란군은 ‘또 속을 줄 아느냐?’는 듯 활을 쏘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장순의 정예군은 단번에 안록산의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단의 무리들은 하와를 속이던 때처럼, 주님의 재림에 의심을 품게 만들고 평안하다고 안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단의 주특기가 ‘거짓말이며, 속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단은 성도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세상일에 바쁘게 하며,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빌미로 자기 명예와 부귀영화를 꿈꾸도록 부추깁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금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을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2-33절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십니다. 예복도 준비되지 못한 채 갑자기 주님을 만나는 당황스러운 일이 없도록 예복을 준비합시다.
2. 요행을 기대하지 말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하겠는데 지금은 아니고, 세상을 조금 더 즐기고 돈도 벌어놓은 후에 믿겠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재림이 그렇게 여유롭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나, 우리 인생의 종말은 어느 날 소리도 없고 예고도 없이 다가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준비하러 간 사이에 주님이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실컷 즐기고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가겠다.’는 요행심리는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11-12절에서 ‘불의한 자는 불의 한 대로, 더러운 자는 더러운 대로, 의로운 자는 의로운 대로, 거룩한 자는 거룩한 대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그들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는 결코 극적인 반전도 이변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대한 부담감에 지레 겁을 먹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십일조를 하라. 헌금 하라.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집회, 성경 공부, 제자훈련, 전도하라. 봉사하라. 섬기라. 등등. 그래서 대충 참여하고 적당하게 빠져버리는 ‘눈치 신앙’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도 대충만 기대해야 하는데, 은혜와 복은 더 많이 받으려합니다. 이것이 요행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살피시기 때문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적당한 준비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중국 제나라 위왕 8년에 이웃의 초나라가 대군을 거느리고 침범해왔습니다. 위왕은 자신의 군대만으로는 강대한 초나라를 상대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왕은 임기응변에 능한 ‘순우곤’이라는 신하를 불러 조나라의 구원병을 얻어오라고 명했습니다. 왕은 조나라에 보내는 예물로 황금 백 근(약 60㎏), 말 40필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을 본 순우곤은 크게 웃었습니다. 왕은 “그대가 지금 조나라에 보내는 예물이 적다고 나를 비웃는 것인가?”라고 순우곤을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순우곤은 즉시
“아니로소이다. 왕이시여. 조금 전 신은 이곳에 오는 도중에 길가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돼지발톱 하나와 술 한 잔을 놓고서 다음과 같이 빌더이다. ‘높은 골짜기에는 그릇에 가득한 수확. 낮은 들판에는 수레에 가득한 수확. 오곡이 모두 잘 익어서 집안 구석구석에 가득가득 차도록 채워주소서.’ 신은 그들이 바친 것은 너무 적고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이 하도 우스워서 웃었을 뿐이옵니다.”
라고 했습니다. 위왕은 느낀 바 있어서 황금 천 근(약650㎏), 흰구슬 열 말. 말 400필을 내어주었고. 순우곤은 그것을 가지고 조나라에 가서 조나라 정예병사 10만과 전차 1,000승을 얻어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초나라 침략군은 감히 싸울 수가 없어서 물러가버렸다고 합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되며,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결코 심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목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들’을 제외한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21:8절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자들’의 명단에 들어있습니다. ‘개들’은 성경에서 ‘더럽고 악한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특히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낸다.’는 것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이런 것에 물들거나 동조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2:20-21절에서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많은 일로 부담스러워 하거나 눈치 신앙에 빠지지 말고, 한 번에 하나씩만 해 나갑시다. 그리하여 요행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깨어있어 작은 일부터 시작하고, 영원한 천국의 잔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